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445 - 『장흥문화』, 8호부터 이어진 인연 47호에 이르다

향토학인 2026. 5. 10. 21:14

인지의 즐거움445
 

『장흥문화』, 8호부터 이어진 인연 47호에 이르다
-제47호 편집후기에 몇줄 덧대서-
-1985년 장흥 지표조사의 회고를 겸하여-

 

김희태

 
장흥문화원에서 매년 내는 『장흥문화』 2025년 제47호 편집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편집이 마무리될 무렵, 편집후기도 정리하였다. 보통은 초안을 거칠게 정리해 주면 문화원측에서 손보거나 덧대서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기도 보낸 준 ‘초안’ 그대로 실렸다. 그 후기에 몇줄 덧대서 정리해 본다.
 
돌이켜 보니 제8호부터 글이 실렸다. 그 이전에도 『장흥문화』를 본 것 같기는 하지만, 글이 실리고 교정 참여는 제8호이다. 그해가 1985년이다. 책은 1986년 1월에 나왔다. 올해가 40년째이다. 40년 기념주년, 되돌아 보고자하는 연유이기도 하다.
 
제8호에 실은 글은 「우리 고장의 文化財」. 세 종류를 소개했다. 장흥읍 원도리 석불입상, 장흥읍 평장리 오릿대와 선독(돌), 석대모퉁이 암벽에 새겨진 선정비를 포함하여 장흥읍 공적비군.
 
1985년. 문화재 역사 현장의 마음가짐
 
8호에 실린 「우리 고장의 文化財」 글에 실린 머릿글을 다시 읽어 본다. 당시는 한자를 많이 썼던 시기라, 그대로 옮겨 본다.
 
“筆者는 木浦大學博物館에서 實施한 85年度 長興地域 문화유적 지표조사에 參與할 기회가 있었다. 연고지가 長興이며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他地를 전전했기 때문에 故鄕에 對한 매력은 항상 떨칠 수가 없었다. 더우기 史學徒로 入門한지 日淺하지만 鄕土의 일면에 關心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여름날의 땀방울도 아랑곳 않고 돌아 다녔다. 그러나 아직 學生의 身分으로 여러 면에서 不足한 점이 많아 目的한 바의 完全한 조사를 다 하지 못했음을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이러한 不足感을 筆者의 이 지역 文化遺産에 對한 愛着과 硏究·努力을 통해 補完할 것이며, 調査責任을 맡아주신 木浦大學 史學科 李海濬교수님과 調査에 參與한 동료 學友들에게 長興人의 한 사람으로 깊은 感謝를 드린다. 아울러 調査에 協調를 아끼지 않으신 長興文化院과 강수의 문화원장님, 長興郡 文化公報室과 各 邑·面 文公擔當 公務員, 그리고 뙤약볕을 마다 않고 提報를 해 주신의 여러 어르신들께 調査者의 입장에서 재삼·재사 감사를 드린다. 본 란에서는 유적(資料) 三例를 소개 하고자 하며 앞으로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당시 목포대박물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지원으로 장흥 지역 지표조사를 했는데, 조사책임은 이해준교수였다. 조사보조원으로 참여했지만 한 팀(김삼기 등)을 이루어 현장 조사와 사진 촬영, 실측 등을 하고 다녔다. 늦게 시작한 공부길이지만 마냥 신나는 일이었다. 이때 조사 내용은 조사카드에 기록되었고, 책으로 발간되지는 않았다. 조사한 필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제출하는 조사방식이었다. 한 유적 당 칼라 6장, 슬라이드 3장, 흑백 3장을 찍고, 인화한 사진과 필름, 그리고 조사 정리한 카드를 제출한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찍은 사진을, 한참 뒤 2009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일반 공개를 하였다. 
 
이 지표조사에 참여한 내용을『장흥문화』 8호에 실은 것이다. 소개한 장흥읍 원도리 석불입상은 당시 장흥교도소 앞에 있었다. 원래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지에 있었는데 원도리로 옮겼다. 1994년에 보림사로 옮겨 졌고 1998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長興 傳 義湘庵址 石佛立像)”. 1985년의 지표조사 정리 자료 기초가 되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지정의 일을 전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 직에 있으면서 맡았었다.
 
장흥읍 평장리 오릿대와 선독(돌)은 마을 공동체 민속의례이자 생활사 유산이다. 장흥읍 공적비군 가운데 석대모퉁이 암벽에 새겨진 선정비는 지금은 오르기 어렵게 되어 있다. 교도소 앞 비군 가운데 벽사역 찰방 기념비군은 전라남도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2023년에 정되었으니. 1985년 조사 이래 38년만이다.
 
첫글을 썼던 『장흥문화』 8호를 이번에 자세히 보니, 교정상의 일화가 됨직한 부분이 있음을 보았다. 1985년 무렵의 인쇄 기술은 ‘사진식자’라는게 도입되던 시기였다. 활자를 입력하고 인화지에 프린트하여 그 위에 습자지를 붙인다. 이 습자지 위에 교정 내용을 표기를 하면 다시 인쇄소에서 한글자씩 수정을 하는 방식이다.
 
『장흥문화』 8호 가운데, 보림사 설화를 다루는 글에, 설화로 설명한 내용이 〈창성탑비〉나 〈보림사 사적기〉에 나오는 부분이어서, 사적기 기록에 있는 내용이라는 *표시와 함께 습자지 위에 적어 두었다. 기록과 설화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어서이다. 필자나 교정책임자가 보면, 확인해서 문장을 한번 더 살펴보았으면 했던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교정 표기인줄 알고 그대로 인쇄되어 버린 것이다. 오자(誤字)도 그대로이다.
 
이후, 이따금 거르기는 했지만, 47호에 이르기까지 고향의 향토학계 어르신들과 선배님, 그리고 동학들의 가르침과 도움으로, 글을 쓰고, 글을 청탁하고, 새로운 자료를 편집실 명의로 소개하고, 편집에 참여하고, 다듬기도 하고, 교정을 보곤했다. 1985년 8호에 썼던 문화재 역사 현장의 마음가짐, “여러 不足感을 지역 文化遺産에 對한 愛着과 硏究·努力을 통해 補完할 것”이라는 초심을 잇고자 함이었지만, 불편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허물도 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부분을 느낀 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한다. 이제는 내려 놓아도 될 듯 싶다. 『장흥문화』 제47호 편집후기를 발췌하여 옮긴다.
 
『장흥문화』 제47호 편집후기
 
장흥의 상징적인 브랜드네임이라 할 ‘문림의향 장흥(文林義鄕 長興)’. 장흥문화원은 그 전통과 정신을 이어서 오늘에 되살리는 다양한 일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관광 르네상스 시대에 부응하고자 함입니다.
 
2025년에도 정월대보름맞이 민속놀이 한 마당 행사를 시작으로 문림의향 정신계승 장흥향교 청소년 문화체험, 한국문학특구 포럼, 문화예술인 대회, 문화인 한마음 어울마당 등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역사와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이번 『장흥문화』 제47호는 문화가족. 출향향우 등 많은 분들의 협조로 알차게 꾸민 문화학술지가 되었습니다.
 
[기획특집1]은 반계사와 정경달입니다. 반곡 정경달선생은 문과에 급제해 선산부사로 문관임에도 수백명의 왜군을 무찔렀으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기의 일기를 남겨 육전의 난중일기로 불립니다. 이 난중일기를 비롯한 반계사 소장 유물이 1988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이순신장군과 정경달선생 등을 배향한 반계사가 2025년 7월 10일 유물과 함께 추가 지정되었습니다.
 
이같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문림 의향(文林義鄕)과 반곡 정경달〉(김준옥), 〈반계사의 역사와 배향인물〉(편집실), 〈반계사 소장 유물 현황과 성격〉(조미은), 〈반계사의 건축 현황과 특징〉(편집실)을 정리하였습니다.
 
[기획특집2]는 장흥학 논단으로 〈문림의향 장흥을 재조명한다〉(문병길), 〈천풍가(天風歌)의 작자 청사 노명선의 생몰연대〉(이병혁), 〈기호학적 관점에서 본 장흥 삼합〉(이화영)을 실었습니다. 문림의향의 연원을 살피면서 그 인식의 확장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천풍가(天風歌)〉의 작가 청사(晴沙) 노명선(盧明善)선생의 재세 기간이 처음에 1707~1775년 설로 썼다가 그보다 일주갑 앞선 1647~1715년 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병혁박사님이 문집이나 교류 인물, 각종 기록을 검증하여 1587~1655년으로 고증하였습니다. 처음에 알려진 것보다 이주갑 120년의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선생 바로 이어서 가사문학 작가로서 지리매김 되어가리라 여깁니다.
 
이같은 수정 재세기간을 이병혁님의 고증자료와 함께 <네이버 제식백과>에 제공(김희태)하면서 수정요청하여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 올라 있는 ‘1707~1775’ 생몰년을 ‘1587년~1655년’으로 2025년 9월 29일자로 수정된바 있습니다, 장흥 가사문학연구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라 생각합니다.
 
[기획특집3] 장흥학 문헌과 현장은 〈송기숙 작가의 문학과 삶에 대하여〉(유용수), 〈장흥에도 드디어 철도길 열려〉(김동옥), 〈1935년 장흥 선비들의 철도 여행〉(김희태)으로 편집했습니다.
 
먼저, 송기숙 작가의 문학과 삶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어 목포보성선 철도 개통을 계기로 장흥역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는데 훗날의 역사자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1935년 장흥 선비들의 기록에 나타난 장흥-영산포-경성 남대문역-금강산의 철도여행에 대한 여행 기록 <탐승록>(정강 김주현)을 소개하였습니다.
 
제3회 장흥문학제 및 장흥문학상의 심사과정 보고와 심사평(채희윤)을 실었습니다. 2025년에는 이승우 소설가의 <목소리들>이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제1회에는 임철우 소설가의 장편 <돌담에 속삭이는>, 제2회에는 윤흥길 소설가의 대하장편소설 <문신>이 수상작이었습니다.
 
제15회 한국문학특구포럼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문학세계를 주제로 했는데, 발제문 〈검은 나무에 손 내미는 ‘고통의 빛’〉(우찬제), 〈애도와 폭력 비판-한강의 『소년이 온다』 다시 읽기〉(이수형)과 토론문(김중일, 김형중)을 실었습니다.
 
새 국가유산은 전남 도지정 유형문화유산 장흥 반계사와 소장 유물(이상석),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장흥 청계재 영광김씨 정열문, 장흥 충현사, 천자문 목판(조수선·정재익)을 정리했습니다.
 
문예 산책은 1인 1편 기준으로 편집했는데 시는 김동옥님, 김홍연, 문인호, 문정배, 백남선, 백학근, 위형윤, 이동규, 이상진, 이호연, 장승진, 한시는 고두석, 신동규, 이세규, 시조는 고두석, 수필은 김정렬, 김창석, 유헌, 윤옥주, 이동규, 이현수, 전미란님이 보내오신 옥고를 실었습니다.
 
또한 장흥문화원 백일장 및 그림그리기 대회 경연에 참가한 초‧중‧고 학생들의 당선작과 심사평을 게재하여 미래의 문림의향 장흥을 이어갈 주인공들의 작품을 소개하였고, 군민, 문화가족과 함께 했던 문화원 사업과 언론속에 비춰진 장흥문화원 활동사항을 정리하였습니다.
 
『장흥문화』 제47호 발간을 위해 수고해 주신 편집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장흥문화』 제47호가 두루 읽혀져 장흥의 문화와 역사 이해가 더 확장되기를 기대합니다.끝으로 귀한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흥문화』 제47호에 편집후기는 편집위원 명의로 실렸다.
■ 장흥문화 편집위원
안현홍, 김성남, 박유미 부원장
고홍천, 위 등 총무분과 이사
유용수 사업운영분과 이사
김경한 문예분과 이사
양기수, 김상찬 향토사분과 이사
김희태 장흥문화원 자문위원
김미옥 장흥문화원 사무국장
장 한 장흥문화원 과장
정순주 장흥문화원 주임

『장흥문화』(敬文學舍 서재)

첫 글을 실었던 『 장흥문화 』 제 8 호 (1985 년호 , 1986 년 1 월 발간 )
장흥문화 제8호 차례
장흥문화 제8호의 화보사진. 장흥교됴소 앞에 있던 의상암지 석불입상과 기념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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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 8호의 <보림사 설화 > 부분. - 당시 사진식자로 인쇄했는데, 활자를 입력하고 출력된 인화지에 습자지를 붙여 그 위에 교정 표기를 하면 인쇄소에서 한글자씩 다시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보림사 설화> 글 관련하여, 전하는 설화와 기록에 나오는 내용은 구분해서 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참고 표기를 하고 습자지에 표기해 두었는데, 이게 교정 내용인줄 알고 그대로 인쇄되어 버렸던것 같다. 그리고 첫줄의 "寺蹟記"는 "事蹟記", 둘째줄의 "寺蹟글로는"은 "事蹟記는"이 맞는 표기이다. 실로 40년만에 교정을 다시 본다. <장흥문화>의 매호마다 편집이나 교정 등에 관계한 분들의 이야기도 정리한다면, 그 또한 장흥 문화사가 될 것이다.

원도리 석불입상 사진

-1985년 지표 조사 사진, 2009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하여 일반 공개 하였는데. 그때 다운 받은 자료이다. 2012년 2월 8일 장흥 해설사 강의 때 1985년 지표조사 전체 사진을 소개한 바 있다.

1985년 지표조사 정리 카드(목포대박물관)
평장리 오릿대와 선독(선돌)(1985)
원도리 공적비군(1985)
원도리 공적비군 조사카드

석대 모퉁이 공적비 암각 - 1985년 사진은 확인이 안되고 2007년 사진이다.  지금은 아래 사진(2021.04.05) 처럼 철망에 가려 다가갈 수 없다.

향양리 석탑(승탑, 부도)(1985) - 만학으로 시작한 사학도(김희태)의 지표조사 길에 길라잡이로 동행한 죽마고우(김상찬). 뒤에 전남 문화관광해설사 회장과 전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합을 맞췄다. 크기를 비교하기 위한 한 컷이기도 한데. 풋풋한 저들도 이제 7학년이 코앞이다. 하여 "회고"라 하여 자료를 소개하였다.
『장흥문화』 제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