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41
어부의 피리소리에 푸른 마름이 찰랑거리네, 시서 김선
-영산강 유역의 누정문화와 세거사족의 풍류5-
김희태
시서 김선(市西 金璇, 1568~1642)은 조선 중기 나주 출신 학자이다. 본관이 광산이고, 자는 이헌(而獻),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 또는 지서자(之西子)이다. 1587년(선조 20, 정해) 향시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수은 강항, 반환 홍천경과 우열을 다투었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관료로 나아가지 않고, 오락정(五樂亭)을 마련하고 은거하였다. 양란과 난정(亂政), 반정(反正) 등 많은 내우외환 속에서도 명분과 대의를 지킨 학자였다.
김선은 1609(광 해원년)에 오현서원 청액소를 올려 나주의 금양서원(錦陽書院)이 경현서원(景賢書院)으로 사액을 받는데 앞장섰다. 1610년(광해 2년)에는 도내 유림의 소두(疏頭)가 되어 문묘의 동방오현 배향을 위한 ‘청 오현 종사소(請五賢從祀疏)를 주창하여 허가를 받았다.
김선은 도학자이면서 시인으로 1,200여 수의 사를 남겼다. 시서 시의 성정(性情)은 우국지정(憂國之情)과 안빈락도(安貧樂道)가 잘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선 관련 문화유산으로는, 초상화가 시서영당에 봉안되어 있다. ’시서 영정(市西影幀)’ 명칭으로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1987.06.01.)되어 있다. 1626년(인조 4) 이응하(李應河)가 영암을 방문하였을 때 아들 김시호(金時晧)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을 후대에 모사한 본이다. 영당은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 강정 마을에 있다. 문집은 번역본(김종섭 옮김, 『국역 시서 유고』, 나주시·동신대인문과학연구소, 2003)이 나왔다. 김선의 문집에 실린 시를 나주의 역사 문화자원과 함께 소개한 『시서 김선 생생과 함께 하는 400년전 나주를 만나다』(김종순, 2016)도 나주학 자료로서 중요하다.
고막원에서 맞이한 영산강 봄풍경 시는, 단순한 강변 풍경 묘사를 넘어 영산강 수운 체계 속 고막원의 기능적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26일에 고막원에서 말을 먹이다.[二十六日 秣馬古幕院]
강가의 풍경은 고막원의 봄빛에 어리고
해질녁에 오고가는 사람이 끝이 없네
상선은 어느 곳 굽은 모래톱에 얹혀있는가
어부의 피리소리에 푸른 마름이 찰랑거리네
江上風景古院春 夕陽無限往來人
何處商帆依曲渚 一聲漁笛出靑蘋(『市西遺稿』 권1)
고막원(古幕院)은 전라도 나주 일대 교통 요충지의 역원(驛院)으로 영산강 수운과 육로가 만나는 장소이다. 1구는 강과 역원이 결합된 공간으로 자연과 인간 왕래가 함께하는 ‘교통·유통의 경관’을 형상화 하였다. 2구는 해질녁에도 이어지는 사람들로서 활발한 상업이나 교통을 암시한다. 3구는 굽은 모래톱[曲渚]에 상선이 얹혀 있는 듯 완만히 흐르는 영산강과 정박 풍경이다. 4구는 한 배를 이른느다. 4구는 어부의 피리 소리와 수초를 대비해 정적 속에서 생동하는 청각·시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漁笛’은 어로 활동 생업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의 생동하는 일상과 정서를 함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창랑정에서 석촌의 시에 차운한 시는, 봄 강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 지나간 인물과 옛 흥취를 회고하는 정서를 포개어, 경치와 회고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차운시이다. 봄바람이 강 위로 스며들고 버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영산강 특유의 완만한 흐름과 수변 생태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과거 낚시하던 자리는 사라지고 상선만이 오가는 장면은, 수운의 현실적 움직임과 개인의 은일적 기억이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는 영산강을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인간 삶의 흔적을 축적한 정서적 공간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창랑정에서 석촌의 시에 차운하다[滄浪亭次石村韻]
봄바람이 강가의 사립문을 등지지 않고
부드런 안개 낀 물가로 드니 푸른 버들에 가대네
그날 두건을 쓰고 강가에서 낚시하던 그곳에
상선만이 공연히 석양을 끼고 돌아가네
東風不負半江扉 嫩入烟洲翠柳依
當日岸巾垂釣處 商帆空帶夕陽歸(『市西遺稿』 권1)
창랑정은 나주 이창동 진부마을 가야산중턱에 있었던 정자로 임자정(林子定)이 창건하였다. 삼영동 택촌으로 건너는 창랑나루가 있었다. 김선은 창랑정에서 창사의 운을 자운한 시(〈滄浪亭次晴沙韻〉)도 암긴다. 청사는 고용후(高用厚, 1577~?)의 호이다. 고용후는 김선과 사마시(진사) 동방(同榜)이다. 김선의 문집에는 박개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창랑정 시도 있다.
석촌은 임서(林㥠, 1570~1624)의 호이다. 임서는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회진출생으로 자는 자신(子愼)이다. 초명은 업(𢢜)이다. 아버지는 정자 임복(林復, 1521~1576)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승지 등을 지냈다. 황해도관찰사로 민폐시정, 농사장려 등 선정을 베풀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웠다. 『석촌유고』 가 있다.
앙암(仰巖)을 오가며 지은 시도 있다. 양영백의 시에 차운한 시는, 영산강 유역의 장대한 수석 경관을 통해 자연과 인간 정신의 교감을 그려낸다. 강 한가운데 우뚝 선 바위는 붕새와 노룡에 비유되며 시간의 축적과 기상의 웅혼함을 드러낸다. 늦봄의 버들·꽃·물새가 어우러진 강변 풍경은 속세를 벗어난 선경으로 승화되고, 창랑정 일대의 유람은 현실의 번다함을 잊게 하는 자각으로 귀결된다. 안기생(安期生) 동해의 봉래산에서 살았다는 전설상의 선인(仙人)이다.
양영백의 앙암에 배를 띄우고란 시에 차운하다.(고체시이다)[次梁榮伯 仰岩泛舟韻](古詩)
창랑정 옆의 가야산 아래 백 길의
바위가 흐르는 물가에 버티고 있네
우뚝우뚝 기세 높아 만고에 바람 불고,
의젓하게 모습높아 천년에 달이 뜨네
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고인처럼 절을 하고,
정신과 기가 두렵나니 병든 이의 눈을 놀라게 하네
처음에 큰 붕새가 큰 날개를 떨치는 듯하더니
마침내 늙은 용이 놀라 고개를 돌리는 듯 하네
사람들이 말하네, 이 바위가 물길을 막아
그래서 금성에는 현명한 관리가 많다나.
야야의 절벽 때문에 한나라에 재상이 났다지만
이를 여기에 비교하면 더불어 짝하기 부끄럽네
동방의 빼어난 경치 많다고 하지만
3백 고을에서 이보다 나을 것 몇 되지 않네
내 놀러간 때가 막 늦은 봄인데
버들 솜이 물가 언덕에 가득하고 꽃은 물가에 가득하네
붉고 푸른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 다니니
신선을 하필 도화원에서 찾을까?
가냘픈 노래와 높은 피리소리가 신비한 연못에 퍼지고
솔밭 밖의 석양은 붉은 빛을 거두려 하네
왁자지껄하며 왕래하는 길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신선 안기생(安期生)의 무리로 오인하네
강산이 이와 같은데 돌아오지 않으니
속세의 한바탕 꿈은 모두 아득하구나.
江南佳麗地 共作江南遊
滄浪亭畔伽倻下 有石百丈撑中流
嵬嵬勢峻風萬古 落落形危月千秋
見之不覺古人拜 神𢥠氣竦駭病眸
初疑大鵬怒垂翼 竟訝老龍驚回頭
人言此石當水位 所以錦城多賢侯
耶耶之壁漢砥柱 比之於斯羞與侔
環東形勝固云多 過此無幾三百州
我遊政値三月暮 柳絲繭岸花繭洲
丹禽翠羽飛上下 神仙何必桃源求
纖歌高笛動神湫 松外夕陽紅欲牧
紛紛往來路上人 指點錯認安期儔
江山如此不歸來 一夢塵世俱悠悠(『市西遺稿』 권1)
양영백은 영백(榮伯)이라는 자나 호를 쓰는 인물인듯하다. 남원양씨 양유인(梁有仁, 1596~?)의 자가 영백(榮伯)으로 확인되긴 하지만, 같은 사람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28살의 나이차가 있어서이다. 양유인은 1616년(광해군 8 병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고 1618년(광해군 10 무오)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방목상의 거주지는 전주이다.
다시 ‘앙암을 향하며’에 차운하여[又次‘向仰岩’韻]
바위 드러나니 용의 등뼈와 같고
구름이 걷히니 학의 날개인 듯 하구나
노래 재촉하니 돛단배에 비가 내리고
꽃은 석양의 물가에서 어지럽게 나네
오히려 왕공(王公)의 취흥은 기억해도
굴자(屈子)의 맑은 깨어남은 잊었구나
마고(麻姑) 선녀를 기다릴 만 하니
나란히 자하(紫霞) 골로 수레타고 가리라
岩露如龍脊 雲開似鶴翎
歌催半帆雨 花亂夕陽汀
却憶王公醉 全忘屈子醒
麻姑徜可待 同馭紫霞騈(『市西遺稿』 권1)
이 시에선느 영산강의 수변 경관을 신선적 상상과 결합하여 서정적으로 형상화한다. 물가에 드러난 바위는 용의 등뼈처럼 장중하고, 구름 걷힌 하늘은 학의 날개처럼 고요하여 강과 하늘이 서로 응답하는 듯하다. 돛배 위에 내리는 비와 석양 속 어지러운 꽃잎은 유람의 순간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왕공의 취흥-속세의 향락과 굴자[屈原]의 각성-도적적 절개를 대비시키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다가, 끝내 마고와 자하로 상징되는 도교적 선계로의 초월 상상으로 나아가는 구조이다. 영산강 유람의 감흥을 속세 풍경을 넘어선 선계로 심화시킨다.


김선의 사마방목(진사시)


시선 김선선생의 행장(부분)(정호[鄭澔, 1648~1736] 지음, <장암집(丈巖集)> 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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