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38
푸른 물은 새 쪽빛으로 물들었구나, 석천 임억령
석양의 맑은 물결 참으로 흡족하네, 하서 김인후
- 영산강 유역의 누정문화와 세거사족의 풍류2 -
김희태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은 16세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명성이 알려진 시인이다. 임억령은 탁월한 문학적 능력뿐 아니라 세류에 흔들리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삶의 태도로도 추앙을 받았다.
임억령의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 하의(荷衣)이고 선산임씨(善山林氏)이다. 아버지는 임우형(遇亨),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따님이다. 외삼촌 박곤(朴鯤)과 눌재 박상(訥齋 朴祥)의 문하로 152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성산가단(星山歌壇)을 열었으며, 애국 애민정신이 반영된 서사시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는 서사한시의 백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천의 문하에서 제봉 고경명, 서하 김성원, 송강 정철 등이 배출되어 조선 중기 한시단을 살찌웠다.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석천시집』 역주본(2025)을 냈다.
임억령은 해남으로 가면서 금강(영산강) 나루터에 저물녘에 이르러 푸른 물이 쪽빛으로 물들었음을 읊었다. 영산강 유역의 정취를 배경으로, 유랑과 삶의 취미를 서정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다. 단순한 여정의 기록을 넘어,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내면과 문학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버들개지 휘날린다는 시어로 보아 봄날인 듯 싶다. 시를 좋아함이 타고난 것이라 하였다. 나루에서 본 배를 누선(樓船)이라 표기하고 있다.
금강누선에 제하다 [題錦江樓船]
나그네가 처자를 데리고
머나먼 해남으로 향하네
저물녘에야 옛 나루터에 이르니
푸른 물은 새 쪽빛으로 물들었구나
펄럭펄럭 버들개지가 휘날리고
나부끼는 바람 적삼에 가득하여라
평생토록 세상 놀랠 시 구절을
성벽인지라 지금도 좋아하노라
有客携妻子。遙遙指海南。
黃昏來古渡。碧水染新藍。
撲撲柳飛絮。蕭蕭風滿衫。
平生驚世句。性癖至今耽。(『石川詩集』 권3 오언사운)
1~2구의 “有客携妻子 遙遙指海南(나그네가 처자를 데리고 머나먼 해남을 향하네)”는 가족과 함께 이동한다는 점에서 선비의 풍류 여정이 아니라 생활이 결부된 여정임을 암시한다. ‘요요(遙遙)’라는 표현은 길의 아득함뿐 아니라 인생 행로의 길고도 막막함을 은연중 나타낸다. 이는 조선 사대부가 지방을 전전하거나 이주를 경험하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하겠다.
3~4구의 “黃昏來古渡 碧水染新藍(저물녘에 옛 나루에 이르니 푸른 물이 새 쪽빛으로 물들었다)”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정취가 절묘하게 포착된다. 황혼이라는 시간은 하루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경계의 순간이며, ‘고도(古渡)’는 예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장소이다. 영산강(금강) 나루를 자주 오갔던 예전의 추억이기도 하다. 특히 ‘碧水染新藍’은 물빛을 ‘쪽빛’에 비유하여, 자연을 마치 염색된 직물처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비유이다. 이는 영산강의 잔잔하면서도 깊은 색감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5~6구의 “撲撲柳飛絮 蕭蕭風滿衫(버들개지가 흩날리고 바람이 옷자락에 가득하다)”에서는 청각과 촉각이 어울어진 표현이 돋보인다. ‘撲撲(박박)’과 ‘蕭蕭(소소)’ 같은 의성·의태어는 봄날 강나루의 생동감을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쓸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유랑의 정취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마지막 구 “平生驚世句 性癖至今耽(평생 세상을 놀라게 할 시구를 좋아하는 성벽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이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형상화 한 자연의 묘사가 단순한 풍경 감상을 넘어, 시를 짓기 위한 감흥의 축적이었음을 밝힌다. ‘경세구(驚世句)’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시구를 의미하며, 이는 문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창작 욕망을 드러낸다. 동시에 ‘성벽(性癖)’이라는 시어는 시 짓기가 습관이자 타고난 본성임을 나타내 준다.
이 시는 영산강 나루 봄날의 황혼 풍경을 배경으로, 유랑의 삶과 자연의 감각적 아름다움,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내적 열망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시이다. 조선 중기 한시가 자연 묘사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정서와 문학적 자각을 함께 담아내는 방향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도 영산강을 자주 넘나든다. 그리고 영산강을 배경으로 한 풍류와 자의식이 어우러진 시를 남긴다.
금강 누선에 적다 [題錦江樓船]
강호에 이름 알린 지 삼십 년 되었으니
이 강나루를 몇 번이나 오갔나
취하여 미인을 채색 배에 싣고 떠나가니
석양의 맑은 물결 참으로 흡족하네
湖海知名三十春 幾番來往此江津
畫舡醉載妖姬去 落日淸波眞奇人(『河西先生全集』 권7 칠언절구)
하서는 삼십 년간 강호에 이름을 알린 삶과 영산강 나루를 오간 것을 돌아보며, 공간을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결한다. 이어 화려한 배에 미인을 태우고 술에 취해 떠나는 장면을 통해 속세를 벗어난 호방한 풍류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석양 아래 맑은 물결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향유하는 자신을 ‘기인’으로 자각한다. 이 시는 자연, 유람, 자부심이 어울어진 풍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영산강이 남도 선비들의 풍류현장 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시는 『지봉유설(芝峯類說)』(1633년, 이수광),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1652년, 김육),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송성명, 박성양),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1660년, 정도응) 등에 올라 있다.
지봉 이수광은 이 시를 평하여 “세상에서는 이를 절창이라 여긴다. 그 가운데 경련(頸聯)은 참으로 뛰어나다. 다만 아래 연의 ‘삼(衫)’ 자는 ‘함(咸)’ 운에 속하니, 통압(通押)이 온전하지 못하다. 또한 끝 구절의 표현에도 미흡함이 있고, 앞뒤 내용이 서로 잘 이어지지 않는 점이 아쉽다.[世以爲絶唱。其頸聯固佳矣。但下聯衫字乃咸韻。通押未穩。尾句措語有病。且不相接爲欠]”고 하였다.(『지봉류설』 권9 문장부2 시평(詩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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