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437 - 빙설 같은 금강을 창연히 바라보고파, 김종직 금성곡

향토학인 2026. 4. 1. 00:48

인지의 즐거움437

 

빙설 같은 금강을 창연히 바라보고파, 김종직 금성곡

-영산강 유역의 누정문화와 세거사족의 풍류1-

 

김희태

 

<영산강 유역의 누정문화와 세거사족의 풍류>를 주제로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시 문속에서 나주의 정서와 경관을 읽어 보려 하였다. 문학적 감성이 떨어지는 필자로서는 한시 이해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문학적으로 형상화 된 시문을 보면서 시어나 행간에서 현장과 경관을 풀어내 보려 한 것이다. 역시 어려웠지만 정리한 글을 일부 손보고 덧대어서 몇차례로 나누어 소개한다. 당시 강의자료로 제공한 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차 례
1. 누각과 정자, 수려한 경관 속 강학과 유식
2. 향촌 공동체의 문화 공간, 관루(官樓)와 민정(民亭)
3. 보산정사와 보산8, 한마을 8명 문과 급제
4. 빙설 같은 금강을 창연히 바라보고파, 김종직 금성곡
5. 푸른 물은 새 쪽빛으로 물들었구나, 석천 임억령
6. 하늘빛과 산색이 외론 배에 가득하네, 학봉 김성일
7. 창파에 저녁바람 급해지리니, 백호 임제
8. 아득한 안개 낀 물결 옛 나루에 이어지고, 진경문
9. 고깃배 피리소리에 푸른 개구리밥풀이 나오네, 김선
10. 강의 남북에 이름난 고을이 많은데, 임상덕 금성잡곡
11. 물가의 풀과 산꽃이 모두 그림 속 풍경 같구나, 임서
12. 맑게 갠 평호의 달빛 아래 다시 만나길, 시남 유계
13.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이 읊은 영산강
14. 옛 정취와 유산 현장, 오늘에 되살리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금성곡은 모두 12수인데 고려시기의 사적과 나주의 풍물 경관 특산 등에 대해서 읊은 것이다. 1487(성종 18) 전라도 관찰사 시절 순행차 나주에 왔다.

 

김종직의 연작 기속시는 후삼국 분열기의 왕건의 사적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염백의 누선이 변한 지방을 지나가니 환호성이 이미 금성산을 진동하였네[鹽白樓舡過卞韓 歡聲已振錦城山]”라 하였는데, 염백의 누선은 왕건 휘하 수군의 위용을 말한다. 당시에 전후 상황을 파악한 금성 고을 사람들은 왕건 부대를 환대하였는데, 그 환호성이 금성산을 뒤흔든다고 하였다.

 

이어 교활한 오랑캐 깃발이 덕진을 뒤덮었을 제 어찌 남포에 천인이 주둔한 줄을 알았으랴[猾虜旌旗蔽德津 豈知南浦駐天人]”라 하여 덕진에서 견훤군과 겨루었을 때 남포에 주둔한 천인(왕건)의 사적을 말하고 있다.

 

왕건의 나주 정벌 승리는 나주 토성 오씨와의 기연으로 이어져 용손이 당일에 군함을 여기에 대고서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네[龍孫當日艤戈船 忽夢朝雲暮雨仙]”라 하면서 왕건은 용의 자손으로 격상하고 오씨는 신녀로 신격화 했다.

 

하여 행인들은 그곳을 가리켜 완사천이라 하네[行人指點浣紗泉]”라 하여 완사천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비단 빨던 강가는 혜종 외가의 고향으로 흥룡사 안에 그 서광 어리었도다[濯錦江邊舅氏鄕 興龍寺裏藹祥光]”라고 하여 왕건의 처가이며 혜종의 외가인 금강진(錦江津)과 그곳에 세워진 흥룡사(興龍寺)를 돌아보며 서광을 말하였다.

 

다음으로는 고려 현종의 나주 몽진 사적을 대동강 푸른 나무가 전란으로 문드러지자 현종이 배에 올라 비단 빨던 강으로 왔으니[浿江靑木爛戈矛 顯廟來航濯錦流]”라 한다.

 

고려 말기에 나주로 유배를 왔던 정도전의 행적도 살핀다. “부질없이 동문에서 부로들 유시했다던데 잠자코 회진에 숨어 지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謾煩父老東門諭 爭似三緘隱會津]”라 하였는데, 아마도 김종직 관찰사도 동문루에 올랐던 것 같다.

 

정도전은 나주 거평부곡 소재동에서 13755월부터 13777월까지 3년여 동안 주민들과 생활하며 호남 농민의 생활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고 이 경험은 그가 추구한 민본의 바탕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종직은 약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한 것 같다.

 

김종직은 나주의 산천, 인물, 명물을 두루 예찬하였다. “삼향의 대화살은 천하에 소문났으니[三鄕竹箭聞天下]”라 하여 특산품을 삼향의 죽전(竹箭)은 천하에 유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향은 지금의 무안군 삼향면 지역인데, 당시 나주목의 월경처였다. 전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죽전 산지였다. 1906년에 이르러서 나주 소속에서 떨어져 무안으로 편입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35권 나주목 고적조에 군산부곡(群山部曲)ㆍ극포부곡(極浦部曲)ㆍ임성부곡(任城部曲) 이상 세부곡은 지금은 합하여 삼향리(三鄕里)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토산조에 죽전(竹箭)은 삼향리(三鄕里)에서 난다.”는 기록이 있다. 삼향은 조선시대 화살대[竹箭] 산지로 전국에서 가장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어 영산창의 백만섬 곡식, 앙암(仰巖)과 복암(伏巖) 바위와 유람객 뱃놀이, 금강과 수홍교, 수려한 월정봉(月井峯)과 학교(鶴橋)의 경관, 나주의 재래 음사 풍속 폐해를 차례대로 읊고 있다.

 

국역문은 한국고전종합DB를 주로 참조하였다. 금성곡은 점필재집(佔畢齋集))(1789, 김종직),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동국여지지(1656, 유형원), 여재촬요(輿載撮要)(1894, 오횡묵) 등에 실려 있다.

 

금성곡[錦城曲]

 

용손이 당일에 군함을 여기에 대고서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네

천재에 박씨 계집과 참으로 같은 법칙인데

행인들은 그곳을 가리켜 완사천이라 하네

 

비단 빨던 강가는 혜종 외가의 고향인데

흥룡사 안에 그 서광이 어리었도다

지금도 부로들이 남긴 덕을 사모하여

퉁소와 북 울려 추대왕을 즐겁게 하네

 

대동강 가의 청목이 전란으로 문드러지매

현종이 배를 타고 비단 빨던 강으로 왔으니

당 명황이 서촉에 몽진한 것과 뭐가 다르랴

무이루를 도리어 산화루로 삼았구려

 

누가 종지를 기설의 무리라 하였던가

험난함과 평탄함이 끝내 몸을 위태롭게 하였네

부질없이 동문에서 부로들을 유시했으니

어찌 잠자코 회진에 숨은 것만 하리오

 

붉은 뱃전 검은 노가 파도 위에 가득하고

자잘한 집 마을마다 노적 더미가 높직한데

영산창에는 백만 섬의 곡식이 쌓여 있으니

금년에는 백성의 고혈 탈취한다 말하지 마소

 

앙암 복암 두 바위는 기괴하고도 훌륭한데

노는 사람은 동쪽 서쪽 멋대로 배를 띄우니

빙설 같은 금강을 창연히 바라보고파

말타기를 뿌리치고 수홍교를 건너가노라

 

龍孫當日艤戈船 忽夢朝雲暮雨仙

千載薄姬眞合轍 行人指點浣紗泉

 

濯錦江邊舅氏鄕 興龍寺裏藹祥光

至今父老懷遺德 簫鼓歡娛皺大王

 

浿江靑木爛戈矛 顯廟來航濯錦流

何異明皇竄西蜀 夷樓作散花樓

 

誰謂宗之夔契倫 崎嶇平地竟阽身

謾煩父老東門諭 爭似三緘隱會津

 

紅舷烏榜滿波濤 矮屋村村積稻高

百萬榮山倉裏粟 今年休道浚民膏

 

仰伏兩巖奇且勝 遊人一棹任西東

氷雪錦江生悵望 却揮騎從度垂虹(佔畢齋集22)

 

2구의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네에서 용손은 고려 태조를 가리킨다. 고려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가 주둔하고 있을 적에 목포(木浦)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 구름이 서려 있으므로, 그곳을 가 보니 후일 장화왕후(莊和王后)가 될 오씨(吳氏)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큰 절을 세워 흥룡사(興龍寺)라 하고, 그 앞에 오씨가 일찍이 빨래했던 우물은 완사천(浣紗泉)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나주 완사천 (浣紗泉)은 나주시 송월동 1096-7번지 일원이며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3구의 천재에 박씨 계집과 참으로 같은 법칙인데박씨 계집[薄姬]이란 중국 진() 나라 말기에 위왕 표(魏王豹)의 궁중(宮中)에 있었던 미천한 신분의 여자였는데, 위왕 표가 멸망한 뒤에 그가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문제(文帝)를 낳았는바, 문제가 대왕(代王)에 봉해지자 대태후(代太后)가 되었고, 문제가 제위(帝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황태후(皇太后)가 되었으므로, 이 시에서는 태조의 장화왕후를 비유한 말이다.

 

8구의 퉁소와 북 울려 추대왕을 즐겁게 하네나주가 바로 혜종의 외가 고향이라, 그가 즉위한 뒤에는 그곳을 특별히 돌보고 보호해 주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흥룡사(興龍寺) 안에 혜종사(惠宗祠)를 세워 혜종을 제사지내고 있음을 뜻한다. 추대왕(皺大王)은 얼굴이 주름진 임금이란 뜻으로, 곧 혜종을 가리킨다.

 

12구의 무이루를 도리어 산화루로 삼았구려고려 현종이 거란(契丹)의 침략을 피해 나주로 파천하여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퇴각하자 다시 환도(還都)했던 고사를 가지고 당 명황(唐明皇)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으로 몽진한 것에 비유한 말이다. 금강(錦江)은 서촉과 나주에 다 있고, 무이루(撫夷樓)는 나주에 있는 누각이며, 산화루(散花樓)는 서촉에 있는 누각이다. 이백(李白)의 상황서순남경가(上皇西巡南京歌)비단 빨던 맑은 강이 만리를 흐르는데 구름 돛단 큰 배가 양주로 내려가네 북쪽 서울엔 비록 상림원을 자랑하지만 남경에는 도리어 산화루가 있다오[濯錦淸江萬里流 雲帆龍舸下揚州 北地雖誇上林苑 南京還有散花樓]” 하였다. 李太白集 卷七

 

16구의 어찌 잠자코 회진에 숨은 것만 하리오에서, 종지(宗之)는 정도전의 자이고, 기설(夔契)은 순() 임금을 섬긴 두 명신(名臣)의 이름이다. 고려 신우(辛禑) 초기에 정도전으로 하여금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라고 하자, 정도전이 말하기를 내가 의당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거나, 아니면 그를 결박하여 명() 나라로 보내겠소.”라고 하여, 마침내 회진(會津)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가 회진에 가던 도중 나주의 동문루(東門樓)에 올라 아름다운 산천과 번성한 인물들을 바라보고 나서 그곳의 부로들을 유시하는 글[諭父老書]을 지었던 데서 온 말이다.

 

참고문헌

*출전 : 김희태, 영산강 유역의 누정문화와 세거사족의 풍류, 마한의 모태영산강의 뱃길, 그역사와 생태, 나주시국립목포대 호남문화콘텐츠연구소, 2025.10.16.

-김희태, 선현들의 시문해제, 선현들의 시문 속에서 나주를 읽다, 나주문화원, 2021. 참조.

-김희태, 삼향의 대화살이 천하에 소문나니(三鄕竹箭聞天下)”-“나주 삼향무안 삼향의 역사적 변천과 대죽도의 삼향정-」 『무안문화16, 무안문화원, 2016. 127~149.

-이원걸, 김종직의 연작 紀俗詩形象觀風易俗 이념, 퇴계학14,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004.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금성곡(깁종직, 점필재집)
금성곡 십이영(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제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