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35
4대의 문향이 전승되는 영광 덕림정사
김희태
영광 홍농의 조산(祖山)이라 불리는 덕림산 자락.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단정한 건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웅장한 현판도 보이질 않고 화려한 단청을 입힌 것도 아니지만 누군들 이 앞에 서면 차분해 진다. 소소하지만 활달한 필체의 현판을 보니 덕림정사(德林精舍).
이 덕림정사는 여러 측면에서 상징적인 곳이다. 우선은 필법이 4대로 전해져 오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필법과 학문의 전승을 위한 후학 양성의 요람이기도 했다. 곁에 있는 덕림사(德林祠)에 이농, 이호, 이승달 전주이씨 세분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근령군 이농, 병자호란 시기 의병을 일으킨 덕은 이호, 대한제국기에 항일 활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성와 이승달이다. 이호가 덕림산 아래 홍농 풍암으로 은거한다.
그리고 이승달선생을 이어 아들 운초 이택근, 손자, 지수 이학용, 증손자 긍당 이경회에 이르기까지 4대의 문향(文香)이 전승되고 있다. 저 선조로부터 치자면 수백 년에 걸쳐 지켜 온 ‘충절’과 ‘문예’가 전승되는 곳이라 하겠다.
덕림정사의 역사는, 덕림사에 모셔진 조선 왕실의 근녕군 이농으로부터 연원이 된다.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영광 홍농으로 입향한 후손들에게 이농의 충절정신이 이어지고 있고, 사우를 세워 향사하고 있어서이다.
이농(李襛, 1411~1461)은 태종(1367~1422)의 여덟째 아들이었지만, 권력의 중심이 되는 대신 의리를 택했다. 이농의 군호는 근령군(謹寜君), 시호는 희의공(僖懿)이다. 이농은 계유정난이라는 권력 투쟁 속에서 세조의 요청을 뒤로하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1455년 단종이 강제적으로 선위(禪位) 당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드는데, 이농은 혼자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왕자의 신분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충절’을 택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길로 나선 것이다. 불식으로 뜻을 밝히며 생을 마감한 근령군의 선택은, 이후 후손들에게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이 질문은 세대를 건너 병자호란의 혼란 속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농의 6대손 덕은 이호(德隱 李浩)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호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싸웠고, 화의가 성립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통곡하며 고향 고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지만, 조정의 부패와 간신의 전횡 앞에서 끝내 벼슬을 버린다. 그리고 선택한 곳이 바로 영광 덕림산 아래 풍암(風巖)이었다.
풍암(風巖)은 지금은 영광군 홍농면 월암리에 속한 마을이지만, 오랜 연원을 지닌 행정지명이다. 1789년(정조 13)에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의 영광 홍농면 조에 보인다. 이 책은 전국적으로 마을 이름이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의 관찬 자료이다.

풍암에 정착한 이호는 매달 덕림산에 올라 임금을 향해 절을 올렸다.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마음속 충성까지 내려놓지는 않았다. 덕림산 자락은 그렇게 한 선비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은거의 공간이 되었고, 뒷날 덕림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시간은 다시 흘러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맞는다. 덕은 이호의 8대손 성와 이승달(醒窩 李丞達, 1875~1952)은 1907년 항일 의병 활동에 참여했고,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되자 부친과 함께 덕림산에 올라 망궐통곡하며 자정순국을 결의했지만, 죽음 대신 오래 남을 길을 택했다. 바로 교육이었다. 무너진 나라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사람의 정신에 있다고 믿었다. 그 공간이 바로 덕림정사이다. 1935년경, 아들 이택근이 회갑을 맞은 아버지를 위해 정사를 지었다. 이곳 덕림정사는 공부방을 뛰어넘어 시대의 아픔을 견디는 문화와 정신의 피난처가 되었다.
덕림정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건물의 구조를 보면 남다른 고민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세살문 위에 환기창을 두고, 다시 다락의 교살창을 얹은 삼단 구성은 밝은 채광과 통풍을 고려한 수법이다. 높게 솟은 퇴칸 기둥과 팔작지붕의 곡선은 소박하지만 단단하다. 이곳에서 청소년들은 글을 배웠고, 어른들은 세상의 이치를 토론했다. 충절을 말과 글, 삶의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교육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승달 이후에도 덕림정사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이승달–이택근–이학용-이경회로 이어지는 4대에 걸쳐 후학들이 길러졌고, 지역 사회의 작은 배움터로 기능했다. 그리고 1978년에 영광 유림들은 덕림사를 창건했다. 근녕군 이농의 충절, 덕은 이호의 절의와 은거, 성와 이승달의 교육 정신을 함께 기리면서, 충절과 문예의 계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덕림정사에는 강학자료를 포함하여 필법과 선비문화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 4,654점이 전해 오고 있다. 근래에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되어 연구가 진행중이다.
오늘날 덕림정사에 서면, 과거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 듯하다. “당신의 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지킬 것인가.” 덕림정사는 과거를 기리는 장소이자,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작은 서당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이며, 충절이 어떻게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덕림정사 자료(한국학호남진흥원 사진)

덕림정사 자료 조사(한국학호남진흥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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