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63
1894년, 함평 선비 박농산이 황룡강을 지나 금성산을 보며 관군을 추모하다
김희태
望錦城山(是時招討使閔種烈九朔守城平東搖)
금성산을 바라보며(이때 초토사 민종렬이 수성한지 아홉달에 “동요(동학농민혁명)”가 평정되었다.)
함평쪽 자료를 찾다가 시(詩)의 제목에서 “금성산”을 보았는데 지역의 역사지명이라 내용을 살폈다. 시의 제목 밑에 작은 글씨로 주석이 있다. “금성산”, “초토사”, “민종렬”, “아홉달 수성”, “동요 평정”. 이십여 글자이지만 분명 역사의 한 장면, 현장을 읽을 수 있을 듯 싶다. 시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사실” 그 자체는 아니고 형상화한 것이지만, 현장과 기록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종렬은 1893년 11월 20일~1895년 12월 사이 나주목사로 재임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조선왕조 말기로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반외세” “반봉건”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시기였다. 1894년 5월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동학군측의 정책이 실제 시행에 들어간다. 그런데 나주는 집강소 설치도 되지 않았고 동학농민군이 수성군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1894년 9월 29일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로, 10월 28일 호남 초토사(湖南招討使)로 임명하자는 의정부의 건의를 윤허하는 기록이 <고종실록>에 있다. 동학농민군을 대적하기 위한 관군 대장격인 호남초토사를 나주목사가 겸임한 셈이다.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수많은 혁명군들은 붙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비록 시의 제목에 달린 협주이지만, 1894년 당시 동학농민혁명군과 관군(수성군)과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수성군 관군측 나주목사를 기리는 시이지만, 당시의 시대인식을 알 수 있다. 관군이나 유생들은 동학농민혁명군을 지칭하기를 “동도(東徒)” “동비(東匪)”라 하였다. 그리고 기록으로도 많이 남지 않았다. 몇 글자 짧은 내용이고 유생이 주인공이지만 귀중한 이유이다.
함평쪽 자료는 함평 선비 농산 박한풍(農汕 朴漢豊, 1851~1924)의 문집이다. 농산만록(漫錄)(농산집). 4권 2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古348-25-358)되어 있다. 1935년 간행. 효성도 지극하였고 평생을 학문으로 일관하였다. 금성산을 바라보며 시를 지은 시기에 서울 나들이를 갔다 돌이오던 길이었던 것 같다. 이 시 앞에 “도동작(渡銅雀)”, “숙화성대황교(宿華城大皇橋)”, “소사주중(素沙舟中)”, “금강주중(錦江舟中)”, “도완산....(到完山....)”, “여산황화정(礪山皇華亭)” 등의 제목을 통해 미루어 볼 수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고 수원(화성), 소사를 지나 금강을 건너고 완산, 여산을 지나는 호남대로 길을 지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제와 함께 다른 시의 제목이나 밑에 적힌 주석을 통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문집에 실린 순서가 시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서이다. 하나씩 풀어보자.
① 渡銅雀(甲午見屈會圍適値東搖辭京而歸)
동작을 건너며(갑오년에 회시에서 떨어졌느네, 그때 마침 동요가 닥치자 서울을 떠나 돌아오다.)
② 到完山聞王師啓行追討嶺下諸賊慨激有感
완산에 이르렀는데, 왕사가 출발하여 따라가 고개 아래의 뭇 적을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느낌이 일어
③ 積雨日見溝渠沆溢憶洪水時事
비가 오랫동안 내려 도랑이 차 넘쳐 홍수 때 일을 생각하다.
④ 過黃龍江追哭李宣傳學承
황룡강을 지나다 선전관 이학승을 추모하다.
⑤ 望錦城山(是時招討使閔種烈九朔守城平東搖)
금성산을 바라보며(이때 초토사 민종렬이 수성한지 아홉달에 동요가 평정되었다.)
동작나루를 건너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서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에 회시에서 떨어지고 “동요(東搖)”가 닥치게 되자 서울을 떠나 귀향한다는 내용이다(①). 갑오년 회시는 아마도 7월부터 시작된 갑오개혁 전후일듯 싶다. 완산에 이르러서는 왕사가 따라가 고개 아래의 뭇적을 토벌했다는 소식도 듣는다(②). 그런데 그 무렵에 비가 많이 왔던 모양이다. 도랑이 차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홍수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서이다(③). 이어서 장성 황룡강을 지나다 선전관 이학승을 추모한다(④). 그리고 나주 금성산을 바라보며 민종렬 토포사의 일을 주석으로 기록한다(⑤).
황룡강의 선전관 이학승(④)과 금성산의 토포사 민종렬(⑤). 바로 관군측 인물들이다. 이학승은 경군장교(壯衛營 隊官)이다. 장성 황룡 전적지에 그의 비가 전한다. 비문은 면암 최익현(1833~1906) 찬. 1897년에 세운다. 비문에는 순의지지가 장성부 서쪽 10리 신현(長城府 西十里 莘峴)으로 나온다. 박농산이 이곳을 지나면 추모한 것은 1894년이니 면암찬 비석은 없었던 때이지만, 이미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관군 이학승의 죽음-“殉義”는 유생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에는 “東賊猖獗于湖南” “時賊徒數萬” “斬賊百餘” 등 “동적”, “적도”로 표기하고 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뒤, 1998년 황룡 동학전적지 국가 사적(제406호) 지정 때에 이 관군 장교 이학승순의비가 동학당시 현장 유적으로서 중요한 평가 자료가 된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온 관군(경군)측 유물이지만, 당시의 황룡 전적지 현장 역사를 증빙해주는 자료 구실을 한 것이다.
過黃龍江追哭李宣傳學承(과황룡강추곡이선전학승) 황룡강을 지나다 선전관 이학승을 추모하다
將軍一死死猶生(장군일사사유생) 장군은 죽었으나 죽어서도 살아 있으니
忠義堂堂日月幷(충의당당일월병) 충성과 의리는 당당하여 해와 달 같도다.
黃龍江水何時盡(황룡강수하시진) 황룡강의 물은 어느 때나 마를까
長使靈魂垂大名(장사영혼수대명) 길이 영혼으로 하여금 큰 이름 드리우네.
그 시상(詩想)을 보자. 관군측 장교로써 한번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써 오히려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살아있음과도 같다는 것. 그래서 그 충의(忠義)는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했기에 해와 달 같음에 다름 아니다. 황룡강 강물이 다 마른다 한들 이를 잊을수 있을까. 영혼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어지면서 그 큰 이름 역사에 드리울 것이다.
유생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의 시대인식이리라. 반면, 동학농민군측의 입장에서 반추해 보면 이학승의 죽음은 동학농민군측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황룡전적지는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무찌르며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를 마련한 황룡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894년 4월 23일 동학농민군은 이학승이 이끄는 200여 명의 관군과 결전하여 대포 2문과 총 100여 점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전주화약으로 이어진다. 집강소 설치 등 동학농민군의 혁명정책을 실현하게 되는 계기가 된 현장인 셈이다.
이제 황룡강을 뒤로 하고 그 강줄기를 따라 나주에 이른다. 멀리 금성산이 바라다 보인다. 천년 목사골 나주의 진산(鎭山). 언제 보아도 저 산 묏부리는 높직하고 우뚝하다. 사람이 범접하기 어렵다. 그런 탓일까. 거령(巨靈)의 신령스러운 도끼(神斧)로 세상을 호도하는 “음퇴-동학”을 깨뜨렸다. 거령(巨靈)은 화산(華山)을 쪼갠 하신(河神)의 이름으로 옛날에 산 하나가 하수(河水)를 막고 있어서 하수가 빙 돌아서 흐르자 거령이 이 산을 둘로 쪼개어 하수를 곧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文選 張衡 西京賦>) 제목 주석의 “아홉달(九朔)”과 “평동요(平東搖)”가 대비된다. 그만큼 민종렬로 대변되는 관군-수성군-왕권에 대한 신뢰를 말함이리라. 황룡강 이학승 추모시에서 충의-일월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까. 결국에는 명령을 내려 동학군을 내치고 천년 목사골의 기강을 바로잡게 된다. 그러니 동방에서는 명산, 영산으로 이름을 앞 다투는 산이 바로 이산 금성산이라.
望錦城山(망금성산) 금성산을 바라보며
(是時招討使閔種烈九朔守城平東搖) (이때 초토사 민종렬이 수성한지 아홉달에 “동요(동학농민혁명)”가 평정되었다.)
錦岳崢嶸出世間(금악쟁영출세간) 높고 높은 금성산은 세간을 벗어 났으니
巨靈神斧破陰頹(거령신부파음퇴) 거령*의 신령스러운 도끼로 음퇴를 깨뜨렸네.
遂令千古扶紀綱 (수영천고부기상) 그리하여 천년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니
爭說東方有此山(쟁설동방유차산) 동방에 이 산이 있다고 다투어 말하네.
동학농민군의 황룡전투 승첩과 전주화약, 그리고 전라도 50여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혁명정책을 실현함에도 불구하고 나주는 끝내 입성하지 못하고 만다. 1895년 금성토평비가 세워진다. 송사 기우만(1846∼1916) 찬. 내용은 동학농민군이 일어나면서 나주에까지 농민군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이 농민군을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종렬이 여러 군교(軍校)와 향리들을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방어, 격퇴한 사정을 기록한 것이다. 명문 한줄이 대변해 준다. “홀연히 금악(錦嶽)만이 우리 남쪽의 기강(紀綱)을 지켰네.”
또 반추한다. “남쪽의 기강을 잡았다”는 유생측의 기록. 그것은 나주가 관군, 경군, 일본군 등 동학농민군 토벌의 총 본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좌선봉장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과 미나미(南小四郞)이 지휘하는 일본군 후비보병독립 제19연대, 그리고 일본군의 전투를 직접 돕는 교도중대, 영병과 민포군 등. 나주는 일본군의 군마에 짓밟혔으며 경군과 민포군의 약탈로 폐허가 되어갔다. 또 초토영이 만든 감옥에는 수많은 농민군 지도자들로 넘쳐 났고, 부지기수 처형된다.
*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 의정부에 올린 보고서(첩정, 1894년 11월 29일), 양호도순무사에게 올린 문서(湖南招討使書目, 1894년 1월 29일), 군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湖南招討使書目, 1895년 1월 2일), 전라도에서 유생들이 서명을 하여 민종렬에게 올린 문서(單子, 1894년 12월 25일),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각 읍에 내린 문서(甘結, 1895년 1월 29일) 등의 문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진도 동학농민혁명 국제 학술대회와 동학학술답사(2016.10.19.~23)를 주관하시는 박맹수교수님의 학은에 감사드리고, “자생”을 나서는(2016.10.19.) 나주 윤여정학형의 건승을 바라면서 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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