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62 - 도시의 역사기록과 문화현장을 찾자

향토학인 2016. 10. 15. 04:23

인지의 즐거움 062

금당문화59 문화논단


도시의 역사기록과 문화현장을 찾자.

 

                                                                       김희태(향토사연구위원)

 

향토학, 향토문화.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기저에는 ‘향촌’, ‘촌락’, ‘시골’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구밖 과수원 길’, ‘군불지피는 어머님’을 연상하곤 한다. 지금 현재와 비교해 보면 어느 지역을 말할까. ‘광주’라는 도시, ‘남구’라는 도시화 지역과는 먼 얘기일까. 그렇지는 않다. ‘광주’건, ‘남구’건, ‘봉선동’이건, 그 옛날에는 향촌이었고,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때 그때 사정에 맞는 생활을 했을터이고, 기록을 남겼고, 어느 곳이던 문화현장이었다. 시대의 변화 탓에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 들이 그 기록이나 현장, 생활사 자료들을 없애거나 무시해 버린채 오늘날에 이르러 버린 것은 아닐까?

 

‘봉선동’ 사례로 보자. 봉선동(鳳仙洞)은 1동과 2동으로 나뉘어 있다. 신흥 아파트지구로 인구가 늘어나자 1995년에 “봉선동”이 두 개의 동으로 분동이 된 것이다. 그러면 “봉선동” 동 이름은 언제부터일까? 1955년에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효지면에 속했던 “봉선리”가 “봉선동”이라는 명칭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봉선리”가 “봉선동”으로 행정단위 명칭만 “리(里)”에서 “동(洞)”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봉선”의 이름 유래가 또 궁금하다. “조봉(鳥鳳, 朝鳳)”과 “이선(伊仙, 移仙)”에서 한글자씩 따서 “봉선(鳳仙)”이 되는데 1914년 4월 1일의 일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2015년 봉선동2동 마을지 편찬 모임이 구성되었다. 그 연혁편 자료를 찾으면서 중요한 고문서를 확인하였다. 1771년 이선촌(移善村), 1780년 조봉촌(鳥鳳村)이 표기된 호적문서. 봉선동의 전신 “조봉”과 “이선”이 쓰인 조선후기의 공문서를 확인 한 것이다. 그것도 광주목, 지금으로 치자면 광주시청이라는 지방관서에서 정식 발급한 공문서인 호적문서를 통해서였다. 지금까지는 1789년의 <호구총수>라는 지리지를 통하여 봉선동의 전신인 “이선”과 “조봉”이 처음 기록으로 소개되어 왔다. 그런데 <호구총수> 보다 20여년 앞선 문서 실물이 전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봉선동은 물론 남구, 나아가 광주의 향토학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라 하겠다.

 

상산김씨가의 호적문서 가운데 1771년(영조 47, 乾隆 36) 광주목에서 발급한 유학 김광로의 준호구(准戶口)에 거주지가 서면 옹정 이선촌(西面 甕井 移善村)으로 나온다. 봉선동 행정지명이 유래한 “이선촌”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다. 당시 “移善”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선촌 11통 1호에 거주하던 김광로는 22세(경오생)였다.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봉선동의 또 하나의 유래가 된 “조봉촌”은  1780년(정조 4, 乾隆 45) 광주목에서 발급한 유학 김재박의 준호구에 거주지가 서면 옹정 조봉촌(西面 甕井 朝鳳村)으로 나온다. 조봉촌 10통 1호에 살던 김재박은 31세(경오생)였다.

 

그런데 1771년의 이선촌 김광로와 1780년의 조봉촌 김재박은 같은 사람인데 개명한 것이다. 1771년 문서의 김광로는 1774년 호적문서에서 김정로, 1777년 문서에서는 김재박으로 개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상산김씨가는 이선촌과 조봉촌을 중심으로 거주, 활동한 것이다.

 

봉선동의 전신이라 할 “이선촌”과 “조봉촌” 기록은 조선 후기 왕명(정조)으로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에서도 확인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선촌, 조봉촌 호적문서의 주인공인 김재박(金在博)선생은 봉선동 출신으로 최초로 과거시험 급제를 한 선비라는 점이다. 1798년. 당시 호남 인재를 대상으로 왕명으로 광주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은 다섯과목 가운데 세과목을 응시하는데, 당시 시(詩) 분야의 시험문제가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이 때 김재박이 제출한 “하여면앙정” 시권(試券)도 전한다. 1872년 광주 지도(奎 10497)에도 도천면(陶川面) “조봉(朝鳳)”과 “이선(伊仙)”이 보인다.

 

대도시 광주의 한 중심이 되다 싶이 한 봉선동.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향토사 자료를 찾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봉선동” 지명 유래가 된 “조봉촌”과 “이선촌”에 대한 250여년전의 기록을 찾게 되었다. 그것도 오늘날의 광주시청이라 할 당시 광주목에서 발급한 정식 공문서. 이제 그들이 살았던 그 생활사 현장을 찾아야 한다. “도시”라 하여, 변했다 하여 예전 자료마저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주 향토학의 역사기록과 문화현장을 찾고 가꾸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자.

 

출전 : 김희태, 도시의 역사 기록과 문화현장을 찾자, 금당문화59호 문화논단, 광주광역시남구문화원, 2016.10.10. 04~05

* 인지의 즐거움 133  참조

 

 

 

봉선동 지명 유래가 된 조봉촌최초 기록, 1780년 광주목 발급 준호구(准戶口) 첫부분(상)과 전경(하)1771년 공문서의 앞 부분 이선촌기록(중)

 

 

1872년 광주 지도, 도천면 조봉, 이선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