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61 - 회령진성과 천관산, 1989

향토학인 2016. 8. 29. 00:47

인지의 즐거움061

 

회령진성과 천관산

 

김희태

 

 

 ‘인생과 학문을 두터이 하자.’

 

 

조상님네들의 손때 향기론 풍물과 삶속에 깊숙이 투영된 유산을 찾고 익히자는 뜻에서 동호인들이 모인 광주민학회의 9월 답사 출발과 함께 박선홍 회장이 하신 말씀이다.

 

올 가을엔 창립 3주년 행사가 성황리에 있었고 도전·국전·서예대전 등 각종 공모전에서 이름을 낸 회원들(김종열, 심재하, 곽영주, 조정숙)도 많아 풍성하기 그지 없단다.

 

<하멜표류기>와 강진 전라 병영

 

이번 답사는 장흥의 회령진성과 천관산이다. 지난해 11월 13일에 천관사와 존재 위백규 선생 생가가 있는 관산 방촌일대를 답사했던 터라 낯익은 길이다.

 

마치 고향인 탓에 ‘안내’라는 대임이 맡겨져 걱정스러웠지만 장흥문화원(원장 강수의)과 장흥문화동호인회(회장 윤수옥)에서 자세한 답사자료를 내주어 가벼운 마음이다.

 

구월 스무나흗날, ‘천관산 등정’의 설레임을 안고 의기 서린 무등산을 뒤로 한 채 남녘으로 달렸다. 정기 그득한 월출산이 저만치 보인다. 바위문화 조사를 했던 인연이 있어 더욱 정겨운 산이다.

 

영암의 덕진에 이르렀다. 덕진,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구림의 상대표와 이웃한 곳이다. 통일신라 때 당나라로 장사배와 유학생이 넘나들던 포구로, 유학을 한 뒤 문명을 떨친 이들(최치원·김가기·최승우)도 이중환(1690~1769)의 <택리지>에 보인다. 고려 건국기에 후백제의 견(진)훤과 왕건이 이곳에서 대접전을 벌이기도 한다. 역시 민학회 답다. 휴식을 위해 멈췄지만 이처럼 뜻 깊은 지역이니······. ‘덕진’이란 여인의 정성이 모아져 이곳의 큰(德) 나루(津)에 다리가 놓였다는 전설을 뒤로 한 채 많은 돈을 묻었다는 돈밭재(金田峙)를 굽이돌아 장흥으로 향했다.

 

강진의 병영을 지난다. 조선시대에 전라병마절도사영이 있던 지역으로 장흥과는 인연이 깊다. 전라병영은 원래 광주[古內廂]에 설치(1397년)되었다가 1417년(태종 17)에 이곳으로 옮겨온다. 이 일에 힘이 되었던 초대 병마절도사가 장흥출신 마천목(1358~1431)이다.

 

호남 최대의 육군기지인 병영은 을묘왜변(달량진사변, 1555년) 때는 병사가 순절하며 정유재란(1597년)이 지난 뒤 장흥으로 옮긴다. 양란 이후 피폐된 사회현실에서 병영의 이동은 양쪽 주민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세금이나 군역 때문에 서로의 이해가 엇갈려 논란 끝에 다시 현 위치로 옮긴다. 5년만인 1604(선조 37)의 일이다.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네덜란드 사람 헨드릭 하멜 일행과 그들이 남긴 <하멜표류기>도 이곳 전라병영과 인연이 깊다. 그들은 제주도에 표류(1653)한 뒤 억류생활 14년(1653.8.16~1666.9.14) 가운데 절반쯤(1656.3~1662.2)을 병영에서 지내며 1666년(현종9) 9월 탈출시까지 남원(5명), 순천(5명), 여수 좌수영(12명)에 배속되었다. 이로 보아도 <하멜표류기>는 대부분이 전라도 기록인 셈이다.

 

그들은 오두막 집을 짓고, 장터를 돌면서 서양 춤과 노래를 부르며, 병사로부터 친절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친한 조선사람이 찾아와 종일토록 술과 음식을 먹었다’는 대목도 있다. 이 같은 자유스런 분위기가 이 지역사람들에게 서구문물을 낯설지만은 않게 만들었을 터이다.

 

이보다 앞서 고흥출신 유몽인(1559~1623)이 명나라에 다녀와서 <어우야담>을 통해 명나라에 번지고 있는 서구의 종교와 풍속을 소개한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을 쓴 뒤 순천부사로 부임(1616년)하여 <승평지>를 쓰는 등 실학적 활동을 한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와 하멜 일행에 의한 서구문물의 소개가 호남실학의 한 발판이 됐음직하다.

 

이와 함께 하멜이 탈출한 지 10년만인 1675년(숙종8), 노봉 민정중(1628~1692)의 장흥유배도 주목되는 일이다. 그는 이미 북경에 다녀와 <연행일기>(1669.10.28~1673.2.23)를 썼기 때문이다. 노봉은 장흥에서 5년간을 지내면서 이 고장 선비들에게 많은 학문을 전수한다. 이 때의 학문활동으로 제자인 만수재 이민기(1646~1704) 등의 주도에 따라 장흥의 연곡서원에 배향(1698년)된다. 이 서원에는 노봉의 동생인 둔촌 민유중(1630~1687)이 추배(1716년)되며 1762(영조28) 사액되기에 이른다.

 

하멜 일행이 30리 남짓 거리인 전라병영에서 7년간 생활했던 점이나 청나라(북경)사정에 밝았던 노봉의 장흥 유배와 학문 활동이 비슷한 시기로써 어쩜 장흥 지역에도 일찍부터 실학적 분위기를 낳게 했을 법도 하다.

 

‘어살(漁箭)’이 있어 ‘살안’이라 했다는 마을(현재의 사안리)과 밀양박씨 사우인 세덕사를 지나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의 동상이 있는 갈림길에 들어섰다.

 

존재 위백규-.

호남실학의 4대가(신경준·황윤석·하백원) 또는 3걸(황윤석·하백원)로 일컬어진다. 그는 관산 방촌에서 태어나 일생을 학문에 전념한다. 국가와 사회의 폐습에 대한 고발서인 <정현신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인 <환영지>, 향토지인 <지제지>등 90여권의 실학의 저술을 한다. 특히 향촌 자율 개선운동과 민생안전 운동에 남달리 헌신했다.

 

민학회원들은 지난해에 방촌의 존재선생 생가를 답사한 터라 그때 보았던 고문서·문집·목판·친필·유품 등을 기억해 내면서 이미 실학적 분위기가 성숙해 있던 장흥지역에서 존재선생같은 뛰어난 실학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이 지역의 실학적 토양과 지식인의 학문활동에 힘입어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실학이 집대성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동학농민혁명 전쟁 최후의 격전지로서 100여명의 관군과 수백명의 동학농민군이 접전 끝에 순절한 장흥읍성 남문 밖의 ‘석대들’을 지나, 시주승을 학대한 시아버지와 잘 공양한 며느리의 전설이 깃든 며느리바위가 손짓하는 곳에서 일행이 합류했다. 장흥문화동호인회의 양기수, 김상찬, 백순덕씨들이다. 장흥문화원에서 간행한 <장흥문화>11호가 돌려졌다. 장흥문화의 실태와 성격, 지방화시대의 향토문화 등의 특집과 향토사의 조사·연구·자료소개 등 장흥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도움이 될만하다. 민학답사에 걸맞는 선물이다. 숙독하는 것이 만든 이들에 대한 보답일게다.

 

文林義鄕, 장흥

장흥-.

고려 인종 임금(재위 1122~1146) 때 왕비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長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이후 800여년 동안 부사(府使)고을로서 한반도 서남부의 중심지가 된다. 관산 중심의 장흥부(烏次→烏兒→定安→長興府→懷州牧으로 바뀜) 외에도 장동·장평면 일대의 장택현(季水→季川→長澤), 장흥읍과 부산·용산·안양 일부 지역의 수령현(古馬彌知→馬邑→遂寧), 안양 남부와 1914년 보성으로 편입된 회천·웅치면 지역의 회령현(馬斯良→代勞→會寧) 등이 있었다. 지금의 행정 체계와 달랐다. 이들 군현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다가 보성이나 영암에 영속되기도 하는데 장흥부가 되면서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으로 철야현으로 피난 간(1379년) 뒤 조선 건국기에 현재의 중심지인 장흥읍 건산 일원의 중령성에 치소를 정하면서 중심지가 바뀐다. 이 무렵 나머지 현들도 없어진다. 대대적인 주민이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탐진강(예양강), 북동부의 보성강 상류와 득량만, 제암산·사자산·억불산·천관산 등 산 좋고 물 맑아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곳곳에 선조들의 문화유산이 즐비한 곳.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나 실학자 존재 위백규 선생같은 문객들이 있는가 하면 을묘왜변(1555년)이나 임진 정유재란을 맞아 수 많은 충의열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기에 문림의향(文林義鄕)으로 불린다.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길따라 가는 민학회 답사. 길목 길목마다 선현들의 땀과 얼이 짙게 배어있다.

 

우선 특징적인 것은 곳곳에 널려있는 고인돌(지석묘). 청동기 시대 대표적 묘제로 동북아시아 중에서 한반도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남지역에 2만기쯤 있다고 하는데 최근 조사(1988년, <장흥군의 문화유적>)에 따르면 장흥지역에는 210여군데에 2,200기쯤이 있다. 도내에서 가장 많은 수이다. 특히 억불산 주위에 600여기, 천관산·남해안 지역에 1,500여기가 몰려 있다. 지난해 점심을 먹었던 관산 방촌의 고인돌군은 전남지방에서 몇 안되는 밀집지역이다.

 

미륵댕이(안양 기산)의 미륵사 석불(전남 문화재자료 171호), 전국 10여개소의 조선 기와막 가운데 가장 전통성이 잘 남아 있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91호로 지정된 안양 모령의 제와장(製瓦匠) 한형준(韓亨俊, 60세), 용산 덕암의 매향비(埋香碑)와 침향포(沈香浦), 학성(鶴城, 또는 활성)으로 불리우는 용산 계곡의 포곡식(包谷式) 산성, 황금불상이 솟아 올랐다는 부용산, ‘장태장군’으로 잘 알려진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이방언 장군의 출생지인 용산 묵촌, 장제원(長堤院)이 있었던 지역이라 ‘장쟁잇 고랑’으로 불리운다는 녹원리,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원형대로 남아 있는 ‘사기점골’(沙店谷, 용산 월송리, 전남 기념물 30호)을 지나 솔칫재를 넘으니 천관산의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천관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는 영기(靈氣)에 쌓인 산. 천풍(天風)·지제(支提)·불두(佛頭)·우두산(牛頭山) 따위로도 불리우며 89암자가 있는 곳. 이에 관한 기록도 많다.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1205~1248)의 <천관산기>(<동문선> 소재), <동국여지승람>, <지제산 사적기>(1659년, 천관사), <지제지>(존재 위백규) 등. 이미 천관사를 답사한 적이 있는지라 낯익은 산이다.

 

왕방울 눈을 치켜뜨고 일행을 반기는 장승 앞에 섰다.

“흙먼지 날리던 시절의 모습이 더 정겨웠지요. 장승이 일종의 이정표였다면 벅수는 성문 등지에서 수호신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분류합니다. 이곳은 고려시대 장흥부(회주목) 치소가 있던 지역으로 서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벅수기능을 하고 있는데 여원 연합군의 일본정원에 안전항해를 위해 세웠다고도 전합니다. ‘법수골’이란 지명도 전하지요.”

모처럼(?) 참석한 강현구 선생의 설명이다.

 

존재 선생의 생가, 교육 도장인 장천재, 존재선생 신실이 있는 다산사, 논 가운데 있는, 천관산의 산자락을 이용한 회주고성, 옥룡사지 석불. 홍시를 주워 먹던 지난해 답사를 생각하던 중 회진(會鎭)에 이르렀다. 천관산을 감고 돌아 멀리 만리성을 보면서 시장기가 들 무렵이었다.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장흥사람들

會寧鎭城-

원래 회령진성과 관련해 장흥 주포와 소마포가 두군데 지명이 기록에 나온다. 주포는 현 장흥 회진면 회령진성 소재지이다. 소마포는 현 보성 회천면 소재, 당시는 장흥 영역이었는데 1914년 보성군으로 이속된 지역. 1406년부터 주포(현 장흥 회진)에는 병선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현 장흥 회진이 수군 군사 기능을 했던 것. 1422년 회령포(소마포, 현 보성 회천)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고려시대 회령현이 있던 지역이라 이름이 된 듯하다. 1425년 현재의 위치인 주포로 옮긴다.  1490년(성종 21) 진성을 쌓는다. 이곳은 남해연안의 중요 수군기지로 전라 좌·우수영의 관할권을 가르는 지점이다. 특히 이곳 민초들의 힘으로 명량대첩을 가능케한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장군은 광양-구례-옥과-낙안-보성을 지나는 동안 군기와 병선을 마련하지 못하지만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하여 병기와 전열을 재정비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출로를 봉쇄하고 호남지역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셈이었다. 장흥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후원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는 특정 개인 위주로 정리 되어 자칫 영웅주의로 흐르기 쉽지요. 임진·정유재란만 하더라도 의병장이나 관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실제 전투에 임하면서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민초들의 피와 땀도 가치있는 것이지만 소홀히 해왔지요. ‘병졸 없는 장수는 없다’는 말처럼 지역 주민의 활동에 대해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땅을 지켜준 우리의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회령진의 최후 만호였다는 엄흥묵(嚴興默,1836~1910)의 묘비(1913년 세움) 곁에서 박회장님의 말씀이시다.

 

회령진성은 마을의 배산을 이용한 부정형성으로 600여m쯤이 남아있다. 지도나 기록(회령진지)에는 객사·동헌·내아·비장청·군기고·선창고 따위가 나타나지만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복원정화계획을 세웠다고도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양기수 선생의 자상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에게 정보금 안총무의 군침 도는 맛깔을 생각게 해주는 말이다.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곽인송 회원이시다. 완도에서 출발한 겸능호가 미끄러지듯 포구에 닿고 있을 때다.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자 문제가 생겼다. 천관산 등정 때문이다. ‘등정파’와 ‘우회파’의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두 번째의 장흥 답사에서도 천관산 주위만 맴돌았을 뿐이라는 등정파의 넋두리 속에 또 다른 유적지로 출발했다. 남녀노소가 참여한 민학회의 별난(?) 모습이었다.

 

지난해에 보았지만 복습(?)을 하자는 이강재 운영위원의 제의에 따라 용산 매향비[암각] 앞에 섰다. 역시 작년에 소개했던 김상찬 회원이 설명한다.

 

“매향이란 향목을 갯물과 산간수가 만나는 곳에 일정기간 묻었다가 한방 약재나 불교의식용으로 쓰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매향 의식에 참여한 사람·시기·장소 등을 바위나 비석에 새겨둔다는 것이지요. 또 처음에는 순수 불교행사였지만 조선 초기에 오면서 말단 향촌집단의 민간신앙으로 바뀝니다. 미륵신앙과 연결된 일종의 ‘구세주’ 형태로 설명되기도 하며 전남에서는 7~8군데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가 여말선초의 혼란기(왜구침입)등입니다. 장흥 매향비는 1413년으로 제일 늦은 시기이죠.”

 

 기행가사의 효시, 백광홍의 <관서별곡>

 

 

국도 2호선(목포~부산)을 따라가다 구름치(雲峙)의 기봉 백광홍(1522~1556)선생의 노래비[歌碑] 앞에 섰다.

 

기봉은 사자산 아래인 안양 기산에서 태어나 서른살 나던 1552년(명종 7)에 문과에 급제한 뒤 평안도 평사를 지냈으며 35세의 짧은 생애를 산다. 그러나 시에 능했고, 특히 한글로 쓴 <관서별곡(關西別曲)>은 유명하다. 이는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는데 1555년 평안 평사로 있을 때 지은 명작으로 주된 내용은 소명등정(召命登程), 관서편력(關西遍歷), 사친애군(事親愛君) 등이다. 기봉은 불우헌 정극인(1410~1481)과 면앙정 송순(1493~1583)을 잇는 중심인물로서 송강 정철(1536~1593)을 비롯한 후대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7년 11월 1일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회장 김동욱)에서 묘소가 있는 이곳에 노래비를 세웠다. 장흥의 문학동호인들이 그의 <관서별곡>에서 이름을 따서 문학동인 별곡을 결성해 작품집까지 낸 바 있다.

 

별신제·산제·천제를 매년 정월 보름이면 행하는 범개(虎溪)마을, 최상채 박사의 묘소가 있는 노루목(獐項), 기록에 전하는 장흥지역의 20여 향소부곡(鄕所部曲)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하는 거개(居開), 이순신장군의 종사관이었던 반곡 정경달(1542~1602)을 모신 반계사, 용이 피를 흘리고 지났다는 보림사로 통해는 ‘피재(血峙)’입구를 지나 용화사에 길목에 다달았다.

 

마침 김중채 부회장의 외가가 이곳이란다. “어렸을 적 이곳엔 주막이 있었는데...” 하시면서 피로회복제를 듬뿍 들고 온 남승호씨를 소개한다.

 

“최근 민선으로 장평농협조합장이 되신 분인데 ‘民學會’의 답사에 ‘民選’ 조합장이 반겨주니 기쁜일입니다.”

 

1953년 불심있는 여신도에 의해 처음 불려지게 되었다는 용화사(龍華寺), ‘구시방죽(槽岩堤’을 지나면 초라한 모습의 보호각이 있다. 그러나 그곳의 부처님만은 장엄하다. 어딘지 이국인(인도?)의 상호이면서도 백제계의 미소를 머금은 듯 싶다. 1747년 <장흥읍지>(정묘지)에 나오는 불자사(佛子寺)란 절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점이나 약사여래불이라는 것은 이미 성춘경 전문위원께서 <장흥군의 불교미술>에서 밝힌 적이 있다. ‘뛰어난 불상을 멋들어지게 보호할 방법은 없을까’하는 것은 일행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장택현의 터자리를 보면서 고산사로 들어갔다. 저녁 예불소리가 산사에 울리는 것을 보니 하루 해도 다 가는가 싶다. 이곳의 부처님은 같은 석조이면서도 어딘지 중국인의 모습니다. 높직하게 솟아오른 육계, 화순 운주사지에서 볼 수 있는 합장형의 수인, 통견의 법의 자락, 분명히 표출된 삼도 등 특징이 있다. 김정념(金正念)스님의 이곳 부처님의 영험에 대한 얘기를 끝으로 답사는 막을 내렸다.

 

장흥의 여러 유적지를 돌면서 모처럼 답사다운(?) 답사였다는 말들이 나왔다. 양기수 선생의 신들린(?) 설명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작년 장흥 답사 때 월출산 조사보고서가 나오면 2차로 천관산을 조사하겠다는 민학회의 계획을 장흥사람들은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그땐 꼭 ‘등정’을 하기로 하지요.”

 

끝까지 장흥인임을 내세우는 장흥문화동호인 회원들의 고별인사다.

 

광주로 오는 길. ‘酒’유소에도 들르고 주류분과위원회도 결성되었다. 답사 전후가 모두 신명나는 하루였다. 남녀노소가 모였으니 인생은 두터워졌고 서로 묻고[問] 배웠으니[學] 학문도 두터워졌다. 출발시 박회장이 하신 말씀이 이제야 깨쳐진다. 의기 서린 무등산이 눈앞에 있다.(1989년 9월 24일 답사)

 

* 김희태(전남도청 문화예술과), 회령진성과 천관산, <금호문화> 1989년 10월호, 금호문화재단

* 광주민학회, <民學의 즐거움>-광주 민학회 답사기 모음집, 1992. 217~227쪽

 

장흥 관산 방촌리 석장승
장흥 장동 용화사 석조불상

천관산과 회령진성 지도(1872년, 규장각 소장 회령진지도)

회령진성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