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60 - 근현대의 주막, 그 경관과 변천

향토학인 2016. 7. 20. 02:28

인지의 즐거움 060

 

근현대의 주막, 그 경관과 변천

 

김희태

 

 

1896년 황해도 치하포 포구 주막

 

예천군 73, 문경군 138, 충주군 30, 안악군 43, 광주군 144, 장흥군 110.

경상도와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전국 몇 개 지역의 수치이다. 뭘까. 주막(酒幕)의 개수이다. 주막의 이름과 당시 속한 행정지명(군, 면, 리)까지 적은 책.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1911년으로 보이는 필사본 54책의 방대한 분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古2703). 주막 지명만이 아니다. 마을, 산, 강, 들, 고개, 계곡, 나루, 다리, 유적 따위 행정지명과 자연지명을 망라하고 있다. 1911년께 자료이니 말 그대로 근대의 시점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의 끝자리이기도 하다. 이 많던 근대 주막은 어떤 모습이었고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변해 갔을까. 현대의 주막은, 전통-근대의 주막을 잇고 있을까? 아니 이어갈 방도는 있을까?

 

“일기가 불순하여 여관을 겸하고 있는 치하포구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화보(李化甫)의 여점(旅店). 이때 행색이 수상한 인물들 일행이 들어 왔다. 먼저 온 ‘그’ 사람이 잠시 말을 건네 보고서 뒤에 온 자가 왜놈임을 확신하였다. 이 자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이 왜인을 처치함으로써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 씻고자 하였다. ‘그’는 몇가지 계책으로 방 안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 놓고 그자의 행동을 살폈다. 다행히 그 자는 먼저 온 ‘그’ 사람의 행동에 별 다른 주의를 주지 않고 문기둥에 기대어 서서 여관 종업원이 밥값 계산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자를 발길로 차서 한 길이나 되는 댓돌 밑으로 떨어뜨리고 쫓아가 목을 힘껏 밟았다. 뜻 밖의 소란에 네 개나 되는 각 방문이 열리면서 손님들이 모두 그 장면을 보았다.”

 

조선말기 1896년 3월 8일(음력 1월 25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포구 주막, 여점(旅店)의 저녁 경관이다. 평안남도 용강군을 거쳐 치하포에 머무른 일행. 한 방에 몇 사람씩 머무른다. 한길이나 댓돌이 있을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그리고 9일 새벽 사건이 일어나자 여관에 들었던 사람이 일제히 구경을 하는데 네 개의 방문이 열린다. 최소한 4개소의 공간이 있었던 셈이다. 숙박을 겸하고 있었던 포구 주막. 사건을 일으킨 ‘그’는 백범 김구(1876~1949, 당시 이름 김창수). 스물 한살 청년. 살해당한 일본인은 스치다(土田讓亮). <백범일지>와 심문조서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다.

 

1903년 러시아학자, 1909년 일본 경찰이 본 주막

 

외부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근대 주막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음은 1903년 풍경. 러시아 학자 세로세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코레야 1903년 가을>의 기록이다.

 

“우리는 초승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도시를 배회했다. 거리에 곳곳, 주로 간이 음식점이나 선술집 색주가들이 역겨운 '술'(보드카)와 함께 몸을 파는 빈민굴 같은 곳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그런 주점 몇군데에 가 보았다. 어디든 상점 뒤쪽에서는 젊고 건강한 여자들이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며 서 있었다. 그들이 있는 가건물은 거리 쪽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고, 구석에만 돗자리로 가려진 헛간 같은 작은 방들이 있었다. ‘저런 곳에서 밤을 보내고 들여오는 술을 마시면 보통 4달러는 냅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색주가들이 남자들한테 술은 팔아도 몸은 팔지 않습니다.’"

 

또 하나 1909년 12월의 경관. 일본인 이마무라도모(今村鞆)의 저서, <조선풍속집>. 제국의 경찰이 본 조선 풍속이다. 조선의 숙박업소를 다룬 글 가운데 주막 항목.

 

“주막은 원래 술파는 상점의 명칭이고, 막(幕)이라는 글자는 작은 집을 의미한다. 도회지의 주막은 음식점을 전문으로 하지만 시골에서는 숙박을 겸하고 있다. 중심거리, 시가지, 도읍, 선착장, 시장 소재지 등은 물론 산간벽지에 있는 읍이라도 주막이 없는 곳이 없다. 여기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계급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 영업 방법은 보통 손님에게 주로 술과 밥을 파는 것이다. 술은 탁주, 드물게는 소주, 약주를 양조하기도하고 음식물은 밥, 반찬, 고기 등이다. 한 상 차려내는 가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저렴하게는 3,4전부터 가장 비싸게는 20전 정도이다. 숙박은 침구를 별도로 제공하지 않고 오직 기름 밴 목침 한 개를 줄 뿐이다. 숙박료는 받지 않고 술과 음식 값만 받는데, 방이 있으면 음식을 먹지 않고 무료로 숙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과거에 주막은 부세나 요역을 면제받는 대신에 공문서류 등의 전체(傳遞)를 하는 관습이 있던 곳이다.”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여점(주막)은 전통적인 주막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숙박과 음식을 겸하고 있다. 1903년과 러시아 학자가 본 주막은 ‘술’을 전문으로 하는 곳을 안내인에게 요청하여 찾아 간 것. 일종의 관광이다. 그 시기 모든 주막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1909년의 일본인 기록은 ‘숙박’에 관한 시설의 하나로서 주막을 살펴 본 것이다. 그러면 근대에 주막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특산명물 참빗을 팔아 주막 경비로 쓰다

 

1906년 5월 19일(양 7.10)부터 8월 21일까지 강진에서 길을 나서 여행길의 경관과 풍물, 만난 사람과 사정을 <원유일록(遠遊日錄)>으로 남긴 이가 있다. 시도 함께. 경회 김영근(1865~1934). 근대기 큰 선비다. 그 길을 따라 주막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친구 위대언과 아들 효주를 먼저 출발시켜 참빗을 샀다.(5.19) 도갑사나 회사정을 들러 여러 선비들을 만나고 본인도 참빗을 산다.(5.25) 당시 영암 참빗은 만주까지 알려진 특산품. 어느 날은 밤에 여관집에서 잤는데 벼룩, 모기, 빈대 때문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5.25) 영암의 덕진포에 이르러 점포에서 점심을 먹고 초방축점(初防築店)에서는 일행과 갈리기도 한다.(5.26) 주막의 이름이 나오는 것. 영산포(榮山浦)의 작은 다릿목(小橋項)에 이르니 일본인들이 관(館)을 설립하고 물품을 팔고 있는데 아주 벅적거려 십 년 전의 풍경은 볼 수 없었다.(5.27) 나주읍에 들어갔는데 일본인의 전(廛)을 벌린 자가 더욱 많았다.(5.28) 대교점(大橋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다(6.24) 노자가 떨어져버려 머리빗으로 식대를 내려고 했으나 점(店)을 지키는 사람이 들어주지 않는다. 아들 일행은 마을로 들어가 붓과 빗을 판다.(7.4) 특산품 참빗을 팔아 주막 경비로 쓰게 된다. 그 착잡한 심정을 시로 남긴다.

 

주머니가 비어서 점인의 집에 기숙을 하고

  (囊空寄宿店人廬 낭공기숙점인여)

자식이 마을을 찾아가 붓과 빗을 판다.

  (兒子尋村賣筆梳 아자심촌매필소)

반나절을 여창에서 수심하여 앉았으니

  (半日旅窓愁獨坐 반일여창수독좌)

천지간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알리오.

  (誰知天地有無余 수지천지유무여)

 

현대에 들어서 주막의 몇가지 사례를 보자. 먼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밥과 술을 파는 길거리 주막. 1960년대 답사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현장은 장흥 사인정 주막의 1971년 사진을 보면 될 것 같다. 1960년대 신안 흑산도 예리항의 파시 경관은 술과 음식, 색과 숙박이 함께 한 풍경이다.

 

“주막은 서너 그루 노송 그늘에 의지하여 호젓하였다. 빈 소달구지를 끈 황소가 툇마루 끝에 누워서 실눈으로 여물을 새기고 있었다. 달구지꾼은 몇 잔째인지 놋잔에 넘실대는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키곤 했다. 소금 안주를 술에 젖은 엄지 끝에 꾹 찍어서 핥고, 그리고 또 한 잔 단숨에 들이키곤 한다. 달구지꾼의 취안은 여물을 새기던 소의 실눈을 차츰 닮아가고 있었다. 한 무릎을 세워 술 두루미 앞에 앉은 주모도 드뭇한 길손이 들 때마다 대작을 해온 탓인지 얼굴이 불그레하였다. 서로 이렇다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닌데 주막머리 툇마루에는 푸짐한 이야기가 오가는 듯하다. 주모는 말 대신 술국자만 느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주막에서 한숨 들인 다음에는 길이 더 노곤해졌다. 아까 새끼꼬리에 달린 조기를 휘저으며 주막을 외면하고 가던 장꾼은 어디만큼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주막은 가물가물한데 소달구지가 따라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달구지꾼은 아직도 늑장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동행 없는 봄길이 나른하여 포플러 가로수를 헤며 간다.”(예용해 1929∼1995, ‘이바구 저바구’, <예용해전집>, 대원사, 2011)

 

만남과 교류공간 주막, ‘추억’을 ‘문화화’하자

 

주막은 원래 술과 음식, 숙박의 기능을 함께 했었다. 당연히 만남과 교류의 공간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한계년사>에 “1907년 2월 27일(음 1.15) 황제에게 축하를 드릴 때로 거사 날짜를 다시 정했다. 이에 모집한 의로운 선비들이 차례차례 도착하여 각 주막과 집에 나뉘어 묵고 있는 사람들이 60~70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막은 의병의 본부이기도 했던 것.

 

이 같은 주막은 전통-근대-현대로 이어 오면서 분화되어 간다. 전문화 되었다 할까. 술은 술대로, 음식은 음식대로, 숙박은 숙박대로 길을 간다. 현대의 사례를 몇 가지 예시해 본다.

 

전통-근대의 사례로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을 들 수 있다. 조선 말기의 전통주막을 복원하여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5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몇년전부터 삼강주막 막걸리축제도 하고 있다. 전통-근대의 현장 복원과 계승인 셈이다.

 

현대 주막의 경우로는 목포 오거리 사례이다. 소통과 교류의 장이었던 오거리 선술집. 덕인주점, 동천주점, 대안주점 등. “항구도시 목포의 추억 1번지, 오거리”로 박물관의 전시자료로 활용되면서 ‘추억’을 ‘문화화’ 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기획 특별전.(2013.12.3~2014.2.23)

 

또 하나, 전주의 ‘가맥’을 들 수 있다. 전주 지역의 명물로 유명한 일명 ‘가게 맥주’를 2015년부터는 ‘가맥 축제’로 ‘문화화’ 했다. 이제 소통과 교류, 추억의 주막, 그 ‘문화화’를 위해 지혜를 모아 가야하지 않을까?

 

* 출전 : <대동문화> 95호(2016년 7∙8월호) 특집 <주막>, 40~43쪽

* <대동문화> 95호, 42쪽 사진1 설명은 “옛 주막 건물. 충남 서산시 지곡면 장현2리(사진 국립민속박물관, 2002.05.18 촬영)”으로 바로 잡는다.

 

 

<대동문화>95호

1971년 8월의 장흥 사인정주막. 멀리 보이는 작은 집이 주막집이다. 장흥읍 송암리와 강진군 군동면의 경계지점으로, 강진 작천 발원의 강줄기가 탐진강(예양강) 본류와 만나는 지점으로 유량이 많았으나 직강공사로 메워졌다. 원경이지만 아주 귀한 옛 주막 사진이다. 바로 보이는 큰 건물은 물방앗간으로 홍수에 잠긴 모습.(사진 강수의,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 제보 양기수)

1911년 <조선지지자료>의 장흥군 부서면(府西面)의 주막 기록 부분. 모두 6개의 주막이 기록되어 있는데, 송암리 앞에 “사인정주막”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은 조선시대 대로-신작로-국도(2호선)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후기-근대의 역사를 이어온 주막 전통을 알 수 있다. 1911년 기록에 장흥군에는 110개소의 주막이 나온다.

 

 전남 광주군 효우동면(현 남구 효덕동 일원) 주막 기록. 광주군에는 144개소의 주막이 있었다.(<조선지지자료>, 1911)

경북 문경군 화장면 주막 기록. 문경군에는 138개소의 주막이 있었다.(<조선지지자료>, 1911)

 

조선후기 광주(廣州)지도의 주막. 큰 길과 고개, 강줄기를 따라 세곳의 주막이 보인다.(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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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1872년) 곡성현 지도의 주점. 죽곡면 사창(社倉) 좌우로 주점 2곳이 보인다.(규장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