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48
봉선동, 1914년 조봉과 이선을 합한 이름
김희태
광주 남구 봉선동(鳳仙洞)은 1동과 2동으로 나뉘어 있다. 신흥 아파트지구로 인구가 늘어나자 1995년에 “봉선동”이 두 개의 동으로 분동이 된 것이다. 그러면 “봉선동” 동 이름은 언제부터일까? 1955년에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효지면에 속했던 “봉선리”가 “봉선동”이라는 명칭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봉선리”가 “봉선동”으로 행정단위 명칭만 “리(里)”에서 “동(洞)”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봉선”의 이름 유래가 또 궁금하다. “조봉(鳥鳳, 朝鳳)”과 “이선(伊仙, 移仙)”에서 한글자씩 따서 “봉선(鳳仙)”이 되는데 1914년 4월 1일의 일이다. 조선시대 이후 문헌과 자료를 통해 봉선동의 내력을 살펴 보자.
1771년 이선촌(移善村), 1780년 조봉촌(鳥鳳村) 이 표기된 호적문서 최초 확인
이번 봉선2동 마을지(<봉다리>) 조사, 편찬 과정에서 1771년 이선촌(移善村), 1780년 조봉촌(鳥鳳村)이 표기된 고문서를 확인하였다. 그것도 광주목, 지금으로 치자면 광주시청이라는 지방관서에서 정식 발급한 고문서인 호적문서를 통해서였다. 지금까지는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라는 역사지명 지리지를 통하여 봉선동의 앞 지명인 '조봉(鳥鳳)과 '이선(移仙)'이 처음 기록으로 소개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 확인한 광주목 호적문서는 <호구총수> 보다 20여년 앞선 것이다. 봉선동은 물론 남구, 나아가 광주의 향토학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라 하겠다.
이 문서는 원래 조선시대 후기 옹정면 이선촌과 조봉촌(지금의 봉선동)에 살았던 상산김씨 집안에 전래된 문서이다. 후대로 오면서 종손가는 봉선동을 떠나 하남을 거쳐 용봉동에 살고 있다. 이 집안에 전해 오는 문서는 호적문서 32점, 시권 11점, 백패교지 1점, 소지류 6점 등이다.(김용호선생 소장, 2015.11.19. 주인택 광주민속박물관장,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 김형준 학예사 1차 조사. 2015.12~2016.1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한국학연구센터 김경옥 교수, 박선미·고정서 연구원 2차 조사)
상산김씨가의 호적문서 가운데 1771년(영조 47, 乾隆 36) 광주목에서 발급한 유학 김광로의 준호구(准戶口,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에 거주지가 서면 옹정 이선촌(西面 甕井 移善村)으로 나온다. 봉선동 행정지명이 유래한 “이선촌”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다. 당시 “移善”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선촌 11통 1호에 거주하던 김광로는 22세(경오생)였다.
봉선동의 또 하나의 유래가 된 “조봉촌”은 1780년(정조 4, 乾隆 45) 광주목에서 발급한 유학 김재박의 준호구에 거주지가 서면 옹정 조봉촌(西面 甕井 朝鳳村)으로 나온다. 조봉촌 10통 1호에 거주하던 김재박은 31세(경오생)였다.
그런데 1771년의 이선촌 김광로와 1780년의 조봉촌 김재박은 같은 사람인데 개명한 것이다. 1771년 문서의 김광로는 1774년 호적문서에서 김정로, 1777년 문서에서는 김재박으로 개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상산김씨가는 이선촌과 조봉촌을 중심으로 거주, 활동한 것이다.
봉선동 지명 유래가 된 이선촌 최초 기록, 1771년 광주목 발급 준호구(准戶口, 현 주민등록등본)
호적문서 - 호구단자, 준호구
호적을 만들 때 호주는 가족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2통을 관아에 제출한다. 호구단자(戶口單子)라 부른다. 호주가 관(官)에 제출한 호구단자는 이전의 호적과 대조한 뒤 1통은 호적대장을 다시 만들기 위해 관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1통은 관리가 확인하였음을 표기하여 다시 호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것을 준호구(準戶口)라 칭한다.
준호구는 호주에게 보관되어 개인 신분을 증명하거나, 타인과 소송을 할 때 증빙문서로 사용하거나, 혹은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건으로 이용하였다.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차이점은 문서의 서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두 문서 모두 주소, 호주의 직역ㆍ성명ㆍ나이ㆍ본관, 호주의 4조(四祖)의 직역과 성명, 호주 부인의 성씨ㆍ나이ㆍ본관, 호주 부인의 4조의 직역과 성명, 솔거자녀(率去子女)의 성명과 나이, 솔거노비의 이름과 생년간지(나이) 등이 기재되었다.
다만 호구단자는 호주의 주소가 먼저 기재되고 호주의 인적사항이 나열된 반면, 준호구는 등급(謄給)하는 연ㆍ월ㆍ일과 등급하는 관부, 의거한 장적 등이 문서 초반에 기재되며, 발급자의 수결(手決), 정정(訂正)의 유무표시와 답인(踏印:관인을 찍음) 등이 있다. 준호구 기재에는 반드시 중국의 연호를 썼고, 의거한 장적에서 노비의 인적사항까지 연서(連書)하게 되어 있다.
봉선동 지명 유래가 된 조봉촌 최초 기록, 1780년 광주목 발급 준호구(准戶口)
1789년 국가 편찬 <호구총수>의 이선촌(移仙村)과 조봉촌(鳥鳳村)
봉선동의 전신이라 할 “이선촌”과 “조봉촌” 기록은 조선 후기 왕명(정조)으로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소장번호 奎1602)되어 있는데, 전국의 면별 마을 이름과 호구수를 집대성한 지리지이다.
<호구총수> 광주 기록 가운데 일부. 첫줄에 서면(西面) 옹정리(瓮井里)와 이선촌(移仙村), 둘째줄에 조봉촌(鳥鳳村)이 보인다. ‘봉선동(鳳仙洞)’의 지명 유래가 된 마을 아름이다. 1914년에 조봉촌과 이선촌이 합해지면서 두 마을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서 ‘봉선리’라 하였다가 지금의 봉선동이 된다. 앞 부분의 ‘옹정리’는 뒤에 ‘옹정면’의 면이름이 된다. 옹정은 독처럼 생긴 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독+샘>독아지샘>도가지새암으로 되었는데, ‘독 瓮, 샘 井’을 취하여 ‘瓮井’이라 한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 ‘방축평(防築坪)’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79호 363명(남 151, 여 212)의 기록이 있다.
<호구총수>(1789년). 이선촌, 조봉촌, 불로촌이 보인다.
“옹정”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속담 하나. 옛날에 이곳에 살던 김씨 집 마당으로 병아리 한 마리가 떨어 졌다. 솔개가 병아리를 채서 하늘로 날아 가다가 그만 떨어뜨린 것이다. 주인 김씨는 이 병아리를 주어다 길러서 나중에는 수 천 마리의 닭이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지방의 속담에 매우 적은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을 “옹정 뺑아리(병아리) 같다”고 말한다. 조금씩 의미가 다르게 전하기도 한다.
조봉촌의 김재박, 1798년 과거시험 1차에 합격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선촌, 조봉촌 호적문서의 주인공인 김재박(金在博)선생은 봉선동 출신으로 최초로 과거시험 급제를 한 선비라는 점이다. 1798년에 정조임금은 당시 과거시험 1차 시험을 전라도 인재 등용을 목적으로 광주에서 치루게 하면서 시험문제를 직접 내고 채점도 직접 한다.
국왕이 직접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는 문서를 어고방(御考榜)이라 한다. 광주민속박물관에 1798년 광주목 도과의 합격자 명부 어고방이 소장되어 있다. 원래 대촌의 수촌 고정봉선생에게 사급된 것이다. 이 문서는 길이가 28.2미터에 이르는데 2015년 “1798년 광주의 과거시험” 기획전(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10.8~11.22)에서 전시한 바 있다.
과거시험은 다섯과목 가운데 세과목을 응시하는데, 당시 시(詩) 분야의 시험문제가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면앙정에서 가마를 메다.” 또는 “면앙정을 위하여 가마를 메다.”이다. 앞의 뜻은 공간(면앙정 정자), 뒤의 풀이는 사람(면앙정 송순)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1579년 담양 면앙정에서 송순(1597~1583)선생이 여든 일곱 살 때 과거합격 60주년을 맞은 회방연(回榜宴)을 갖는다. 제자들인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과 담양, 창평, 광주 등 인근 고을의 수령들, 그리고 수많은 축하객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선생님은 위해 가마(竹輿)를 메자”고 하자 송순선생을 가마에 태우고 행진을 한다. 그로부터 200년 뒤 정조 임금은 그 당시 호남선비들의 기개와 풍류를 도과(道科)의 과거시험문제로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험문제 “하여면앙정”에 답을 써낸 이가 바로 김재박이고, 그때 제출한 답안지, 시권(試券)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국왕 정조가 채점을 해서 “어고(御考)”라는 제첨이 붙어 있다. 봉선동 역사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유물이라 하겠다.
1798년 광주 과거시험 합격자 명부, 어고방(御考榜), 광주민속박물관 소장. 끝에서 세 번째에 김재박이 보인다. 과거시험 당시 봉선동의 전신 조봉촌에 거주했다. 봉선동의 역사인물인 셈이다.
1798년 광주목 과거시험 시(詩) 과목 어고 시권(御考 試券)(부분). 제출자는 광주 조봉촌 거주 김재박. 시제(試題)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 뒷면에 “御考” 제첨이 보인다. 아래 시진은 시권을 접은 상태. 직역,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부친 직역 성명을 쓴다. 이부분은 접어서 봉해 버려 응시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도록 하여 채점한다. 거주지가 “光州”로 표기되어 있다. “三天”은 일련번호로 일종의 수험번호이다.
1872년 광주 지도의 도천면 “조봉(朝鳳)”과 “이선(伊仙)”
고지도를 통해서도 봉선동의 옛 땅이름(지명)을 살펴볼 수 있다. 1872년 광주 지도에 있는 “조봉(朝鳳)”과 “이선(伊仙)”이다. 1789년 <호구총수> 기록에서는 “鳥鳳”과 “移仙”이었는데, 1872년 고지도에서는 “朝鳳”과 “伊仙”으로 표기가 바뀐다. 같은 발음을 지닌 다른 한자로 표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조봉(鳥鳳, 朝鳳)과 이선(移仙, 伊仙, 移善)은 한자의 뜻 보다는 발음상 유사점을 따라 불리운 땅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지도상의 원형 지명은 면 이름, 네모 안의 지명은 마을 이름이다. 조봉, 이선, 염주(念珠), 월산(月山) 따위가 도천면(陶川面)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에 향교, 오른쪽에는 군분면(軍盆面)이 보인다.
872년 광주지도(규장각 소장) 도천면 조봉, 이선 부근도
이 지도는 회화식 채색 고지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1871년(고종 8)에 ‘열읍지도등상령(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년(고종 9)에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도에는 군현별로 진보(鎭堡)와 같은 국방시설, 산천을 비롯한 자연요소, 읍치 등의 관청건물과 소속 동리와 같은 행정적 요소, 창고·시장·역원(驛院)·도로 등의 사회경제적 요소, 제단·누정(樓亭)·서원·고적과 같은 문화적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호구총수>가 군현별 마을지명까지 나오는 기록인데, 이들 기록을 도상(圖上)으로 옮겨 채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조선시대 왕실도서관이라 할 규장각[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후기지방지도 : 전라도편>(민창문화사, 1996)로 영인본이 나왔다. 전라좌도 광주지도(奎 10497) 크기는 91cmx65cm이다.
이상에서 봉선동의 유래와 변천, 역사인물에 대해서 기록이나 고지도 등 문헌자료를 통해서 살펴 보았다. 조선시대의 이선과 조봉은 “鳥鳳”, “朝鳳”, “移仙”, “伊仙”, “移善” 등 기록에 따라 표기가 조금씩 다름도 알 수 있다. 1914년 들어 조봉과 이선, 불로, 유안, 운룡, 용정마을이 “봉선리”로 합해진다. “봉선”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조봉의 “봉”과 이선의 “선”, 한 글자씩 딴 합성 지명이다. 그만큼 봉선동에서는 예부터 “조봉”과 “이선”이 중심이었던 셈이다. 이후에 “봉선동”이 되고 다시 “봉선1동”과 “봉선2동”으로 분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봉선동 행정지명의 변천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봉선동 행정지명 변천 과정
1771 | 1780 | 1789 | 1872 | 1912 | 1914. 4.1 |
1935. 4.1 |
1955. 7.1 |
1957.11.1 | 1970.6.29 | 1990.11.1 | 1995.3.1 |
光州牧 西面 (瓮井面) 瓮井里 |
光州郡 陶泉面 瓮井里2) |
광주군 孝泉面 鳳仙里 (鳥鳳+ 伊仙) |
광주군 孝池面(孝泉+池漢) 봉선리 |
광주시 봉선동 |
광주시 남부출장소 鳳珠洞 (鳳仙+ 珠月) |
광주시 남부출장소 봉선동 (방림2동 관할) |
광주직할시 서구 봉선동 |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1동, 2동 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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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옹정 移善村 |
옹정면 移仙村 |
도천면 伊仙里 |
도천면 伊仙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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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면 龍井村 |
도천면 龍井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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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옹정 朝鳳村 |
옹정면 鳥鳳村 |
도천면 朝鳳里 |
도천면 朝鳳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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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면 不老村 |
도천면 不老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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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면 新基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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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動坊面 雲龍里 | 不動坊面 雲龍里 | ||||||||||
부동방면 柳岸里 | 부동방면 柳岸里 | ||||||||||
부동방면 芳林(일부) | 부동방면 芳林(일부) |
도움받은 자료
<호구총수>(1789년)
전라좌도 광주지도(1872, 奎 10497)
상산김씨가 소장 고문서(광주 용봉동, 김용호)
<조선지지자료>(191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
조선총독부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7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982
민창문화사, <조선후기지방지도 : 전라도편>, 1996
김정호, <지방연혁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윤여정 엮음, <대한민국 행정지명>1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광주광역시 남구문화원, <광주 남구 마을(동)지>-향토자료모음집Ⅳ-, 2002·2014(개정판)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1798년 광주의 과거시험>, 2015
광주광역시립박물관·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 <광주 이장동 장흥고씨 고문서>, 2015.
광주광역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 <역사를 배우면 문화에 노닐다>, 광주광역시남구문화원, 2015.12
봉선2동주민센터 누리집
* 봉선2동 마을지 <봉다리(逢多里)> 연혁 자료로 정리(2016.02.) 제공. 봉선마을지 편집위원(공모, 2015.9~2016.3). 일부만 실림.
-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2동 주민자치위원회, 『<봉다리(逢多里)-십시일반 나눔마을 이야기-』, 2016.04. 08~11쪽
* 2024년 2월 1일 <jin>님이 댓글을 주셨다.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인터넷' '스마트폰' 시대라는 세상 적응을 위하여 시작한 블로그(지금은 티스토리)인데, 누군가 읽어 준다는 것., 보고 있다는 것, 더구나 댓글로 제안 겸 비판을 해준다는 것, 학인으로서는 정말 반가운일이다. 더더욱 이 글을 쓴 것이 2006년인데 8년이 지나서도 요즘 바로 쓴 글을 보고 대화를 나눈 것 같이 느껴지니, '인터텟'시대라는게 정말 실감이 난다. 댓글로 올린 글을 요약하자면, "옹정면 불로촌은(지금의 봉선동 쌍룡아파트 건너편 지역) 원래 우리말 이름이 '부처울' 이고 佛老로 표기했는데 不老로 훈역-동음 한자 차용- 의미 변화의 과정을 거친 걸로 추정되며, '부처의 울타리 와 '늙지 않는다'는 전혀 디른 것 아닐까"라는 내용이다. 윗글에서는 자료에는 나오는 '불로'만 언급했지만, 앞으로 '불로' 등 광주의 옛 지명의 유래와 변천에 대해서도 자료와 구전을 통해 모으고 정리해 가야 할 것이다. <jin>님께 거듭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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