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37 - 1798년 광주목 도과, 전라도의 인재명단 어고방

향토학인 2016. 5. 27. 02:40

인지의 즐거움 037

 

1798년 광주목 도과, 전라도의 인재명단 어고방

 

김희태

 

“이번에는 장원일거여”

“그럼, 제봉선생의 뒤를 이어야제”

1798년 5월 25일 복수마을 앞.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

배웅하는 이도 있고

멀리서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아낙도 있다.

지금의 광주 남구 이장동.

당시는 음력을 썼으니 4월 10일.

날씨는 벌써 초여름.

여러 덕담이 오간다.

주변을 돌아 보며 정중히 예를 갖추는 한 사내.

이윽고 길을 떠난다.

지산, 향등, 임정을 지난다.

금당산도 멀리 보인다.

수촌 들녘과 양과정 벌판은 초여름 진록.

못자리를 다듬는 농부들의 손길도 바쁘다.

4월 13일(음력) 광산관(光山館)에서 치러 질

과거 시험 1차, 도과(道科)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수촌 고정봉(水村 高廷鳳, 1743∼1822) 일행이다.

 

과거를 보러 떠나는 날 동네 경관을 구성(서사)해 본 것.

 

 

광주민속박물관에 어고방(御考榜)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고문서가 있다. 임금이 채점하여 과거합격자를 발표한 방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서를 보고 놀랄 수 밖에. 길이만 무려 28.5미터. 고정봉에게 내린 것인데 지금은 박물관에 있다.

 

당시 시험은 다섯 과목 가운데 세 과목을 보는데 시(詩)과목의 시험문제(試題)가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면앙정에서 가마를 메다.” 1579년 담양 면앙정에서의 일이다. 송순(1597~1583)이 여든 일곱 살 때 과거합격 60주년을 맞은 것이다. 회방연(回榜宴). 제자들인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과 담양, 창평, 광주 등 인근 고을의 수령들, 그리고 수많은 축하객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위해 가마(竹輿)를 매자”고 하자 송순선생을 가마에 태우고 행진을 한다. 그로부터 200년 뒤 정조 임금은 그 당시 호남선비들의 기개와 풍류를 도과(道科)의 과거시험 문제로 낸 것이다.

 

정조임금이 지역인재 선발을 내건 것이라 당연히 전라도 각지에서 유생이 몰려온다. 다섯과목의 시험 중 세과목을 치르게 된다. 광주목 객사 광산관은 선비들이 넘쳐난다. 시험이 끝나면 시지(試紙)를 모두 거두어 간다. 일정분량씩 띠지로 묶어 잘 간추려 궁궐로 가져간다. 당시는 대부분 정조임금이 직접 채점을 했다고 한다. 채점을 하고 다시 돌려줄 시권에 “어고(御考)”라 별지를 붙여준다. 최종합격자 발표문인 방목도 임금이 채점해 내린다 해 “어고방”이라 한 것이다. 6월에 발표를 한다.

 

상위 점수 2인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권을 준다. 2차 시험 없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3차 시험인 전시(殿試)를 바로 치르게 하는 것. 다음 2인에게는 관직을 내려준다. 경기전과 조경묘의 참봉, 전주에 있는 왕실 관련 유적 관리 책임자, 그 다음 2인에게도 일정한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합격 점수에는 미치지 못하나 상위 점수를 받은 65인에게 붓, 먹, 종이, 책을 내려 준다. 점수에 따라 차등 있게. 성명, 점수, 본관, 부친, 현조, 상품 종별 등을 개별로 기록한다. 그것이 “어고방”이다. 전라도의 각 고을을 망라하여 공부 좀 한다는 선비들이 다 모여들었으니 1798년 당시 전라도의 인재명단이라 할 것이다.

 

이 “어고방”의 첫마디에 “고정봉”이 보인다. 제봉 고경명의 후손. 광주 이장동 복수마을 출신이다. 어고 시권(御考試券)을 비롯하여 고문서가 전하고 있다. 교령류(홍패, 교첩, 교지 등) 74건, 시권 25건, 호적문서 11건 등 모두 110건이다. 그리고 호패 2점, 간찰첩 1점, 성책문서 3점(근대, 看坪記·門契冊·位土台帳), 전적류도 9책(간본 5책, 필사본 4책)이 전한다.

 

<표> 1798년 광주목 과거시험 합격자 예우

구분 예우 인원 성명
합격 문과 전시(최종시험) 응시 자격을 줌
급분(給分) 14푼을 인정함
2명 高廷鳳 任興源
참봉(종9품)벼슬을 줌
급분 12푼을 인정함
2명 朴宗民 鄭冑煥
문과 회시(2차 시험) 응시자격을 줌
급분 10푼을 인정함
2푼을 더 가산해 줌
1명 柳東煥
급분 8푼을 인정함 6명 金在博吳相淳 朴定源 林煥遠 朴宗學 李大圭 金在博
급분 6푼을 인정함 5명 柳翔之 奇學敬 鄭潤吉 盧翼遠 楊宗楷
급분 4푼을 인정함 13명 李昌祐 南熤 高廷說 朴道欽 鄭在勉 金相徽 李一成 盧文達 朴孝德 李得一 鄭敎煥 尹致觀 邊相璨
급분 2푼을 인정함
1푼을 더 가산해 줌
24명 崔澐之 閔致根 金在鉉 申斗權 朴重源 鄭鳴東 林炳遠 鄭潤行 李永緖 奇商履 金百休 南極曄 李如檏 朴聖潛 崔鼎奎 李志文 曹翊鉉 尹㥠 李以鏶 李宜協 魏伯純 金頤祖 朴聖濂 李尙藎
차상
(次上)
<오륜행실도> 1건, 후지 5권, 붓 5자루, 먹 5홀을 하사함 3명 李成曄 尹致彥 金履廉
<사기영선> 1건, 후지 4권, 붓 4자루, 먹 4홀을 하사함 8명 金致福 盧稷 趙泓曄 柳相喬 金致儀 楊得熙 申輔權 申宗權
<주서백선> 1건, 후지 3권, 붓 3자루, 먹 3홀을 하사함 5명 李性傳 朴明植 鄭義燦 李載變 韓啓斗

 

광주민속박물관 소장 “어고방”.

광주 이장동 출신 고정봉 급제 관련 문서이지만 전라도 인재명단이 실려 있다. 시(詩) 시험문제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은 담양의 면앙정, 송순, 전라도 인물들과 관련이 있고, 부(賦) 시제 “장군수(將軍樹)”는 전주와 관련이 있다. 광주 자료인듯 싶지만 “전남”, “전라도”를 아우르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느 한 켠에 28.5미터 되는 이 문서를 디자인하여 내걸고 하나씩 해설한다면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 인물과 성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고 아시아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문서들을 포함하여 다종 다양한 전통 문화와 역사 자료를 모으고 가꾸고 알려야 한다. 지역학으로 엮어야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방연구원에 연구센터가 있다. 서울학, 부산학, 인천학, 울산학, 제주학, 충북학, 충남학, 전북학, 대구학 등. 아쉽게도 광주, 전남은 뭔가 부족하다. 광주학이든, 전남학이든, 호남학이든, 남도학이든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 <금당문화> 제52호 문화논단, 광주광역시남구문화원, 2014.12.24. 04~05쪽 글을 보완.

 

 

 

 

광주민속박물관 전시(2015.10.08~11.22)

 

 

전시 현장에서. 2015.11.22(딸과 함께, 김우진, 전남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