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38 - 역사 속의 행정편제와 땅이름의 유래-영암, 목포, 해남, 진도, 완도-

향토학인 2024. 1. 31. 02:15

인지의 즐거움338

 

역사 속의 행정편제와 땅이름의 유래

-영암, 목포, 해남, 진도, 완도-

 

김희태

 

사람들은 늘 머무르기도 하고 옮겨 가기도 한다. 머무르는 곳에 마을이 생기고 좀 더 커지면 읍면이 되고 시군이 된다. 더 나아가 시도 단위. 옮겨 가서 정착하는 곳도 마찬가지이다. 산과 강과 들이 어울어져야 머물러 살 수 있다. 자연을 벗 삼아, 생활의 방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거기에 바다가 살이의 기반이 된 지역도 있다. 그곳이 목포시, 영암군, 해남군, 진도군, 완도군이다. 이 이름들은 언제부터 썼을까. 그전에는 무어라 불렀을까. 지금은 시장·군수, ··동장이라 하는데 전에도 그랬을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 살았던 이들의 내력은 찾을 수 있을까.

 

영암, 고려의 낭주안남도호부, 남해신당

 

월나(月奈)’라는 땅이름이 있다. ‘월출(月出)’월생(月生)’으로도 나온다. 월출산의 옛 이름이다. 그 마루에 올라서면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남해의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월나는 그대로 행정지명이 된다. 오늘날 영암군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월나군(月奈郡). 백제 때의 지명으로 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온다. 지금의 영암읍과 군서면 지역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금정면 지역의 아로곡현, 미암과 학산 지역의 고미현, 나주 반남면 지역의 반나부리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월나군은 영암군으로 바뀐다. 서기 757년이니 영암지명의 오랜 연원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승격하여 대군으로 성장한다. 군명으로 낭주(朗州)와 낭산(郎山)을 쓰기도 한다.

 

월출이나 월생은 달[]과 관련하여 지명을 설명하기도 한다. 달이 떠오르는 월출산. 한편, ‘()은 산()을 뜻하는 우리말 ()’의 차자 표기로 보기도 한다. ‘월나달나로 읽어야 하며, 그 뜻은 ()()이 나와 있는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나온 것이며, 이것이 ’, ‘로 표현되어 월출(月出)’, ‘월생(月生)’이 된 것 이라는 점.

 

영암(靈巖)’, 땅이름은 글자 그대로 신령함이 묻어난다. 월출산 구정봉 아래 동석(動石)에 대한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을 보자.

 

층암(層巖) 위에 서 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남도 바닷길과 영암. 몇 가지 드려다 보자. 멀리 완도의 청해진. 강진, 해남, 영암, 장흥에 나누어 속해 오다가 1896년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같은 완도군이 설치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 바닷길과 관련해서 완도는 우뚝 드러난 지역이다. 그 가운데 청해진과 장보고. 동아시아 제해권을 주무르던 기지였다. 그 청해진 군대가 바닷길을 타고 뭍으로 들어와 영암을 지나 경주로 간다. 삼국사기에 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장변·정년·낙금·장건영·이순행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여 무주 철야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해남 별진역, 영암 영보역, 나주 오림역을 거쳤을 것이다. 영암은 그 중간 기지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고대부터 남해의 바다 신에게 제사를 올려 모셨던 남해당(南海堂)이 영암 시종면에 있다. 원래 고려~조선 시대에는 나주 땅이었는데 1906년에 영암 땅이 된 지역이다. 현 영암 지역의 바닷길과 관련한 입지 특성을 말해 준다. 남도에서 통일신라 때 국제터는 영암 월출산과 완도 청해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남해포, 지리산, 무등산, 금성산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남쪽 45리 지점에 있고, 제의식에서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1098(고려 현종 19)에 비로소 남해신을 제의식에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3대 해신당제의 하나가 남해당이다. 영암의 남해신당터는 남한 유일의 제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월출산 구정봉의 설화도 바닷길과 관련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구정봉(九井峯)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 송나라의 지리지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절강성의 화개산은 멀리서 보면 화개 같은데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내려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기록에서 구정봉 전설과 비슷하다. 더욱이 월출산의 다른 명칭이 외화개산(外花蓋山)이라는 기록도 있어 영산강 포구를 통해 문물이 교류되던 시절에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생겨났을 법하다.

 

영암 지역에 있던 고려시대 고을 곤미현(昆湄縣) 관련해서도 살필 필요가 있다. 곤미현은 백제 때 고미현(古彌縣)이라 했는데 고려 때도 옛 지명을 썼던 것 같다. 이 고미현의 서원(西院)에서 963(광종 14)에 동종을 주조한다. 60센티 가량의 종이다. 종을 만들 때 관계된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주지라 할 원주와 장로, 상좌, 그리고 주종 작가라 할 대백사와 백사 등의 직임과 인명이 나온다. 특히 연기에 표기된 연호 준풍(峻豊)은 주목된다. 고려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던 광종 재임 중에 사용하였던 고려 독자연호라는 점이다. 960~963년 사이이다. 준풍연호의 서원종은 우리나라 종 가운데 자국의 연호가 사용된 유일한 예이다. 지금은 일본 히로시마켄(廣島縣) 다케하라시(竹原市)의 죠우렌지(照蓮寺)에 있다. 언제 어떻게 건너간 것인지 살펴야 한다. 분명 바닷길을 통해 갔을 것이다. 그에 대해 밝혀야 할 책무가 우리에겐 있다.

 

목포, 강길과 바닷길 물목의 포구

 

영암에서 월출산을 감고 돌아 물길을 따라가면 목포로 연결된다. 바다로 가는 길목의 포구 목포(木浦). 지금은 목포시가 되어 전남의 중추 도시이지만 예전에는 어떤 행정 편제가 설치되었을까. ‘목포현’, ‘목포군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렇게 불렸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에 목포에는 따로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다. 행적적으로는 무안군 지역이었다. 무안군은 백제시대에는 물아혜(勿阿兮)군이라 했는데 신라 때 무안으로 고쳐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 목포(木浦)는 언제부터 불렀을까. 목포는 조선초기 1397(태조 6)에 현 만호동에 목포진(木浦鎭)이 설치됨으로써 목포(木浦)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432(세종 12)에는 무안현 대굴포, 현재의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 있던 수군처치사영이 현 목포시 이로동 하당으로 옮긴다. 만호동의 목포진은 병영이고 하당의 처치사영은 수군 본부, 곧 전라수영이다. 병영과 수영의 목포 병존, 영산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 대양의 들목 목포의 입지를 잘 말해 준다. 1440(세종 22) 전라수군처치사영은 해남의 황원곶, 현재의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겨간다.

 

목포 땅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이다. 목포의 형국이 마치 병목처럼 생겼다 하여 목개라 불리다가 한자로 목포’, 바다와 강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포구라 하여 목포’, 유달산에 나무가 많아서 항구에도 나무장사가 많았다 하여 목포’, 유달산의 형국이 목형(木形)이므로 목포’, 남해신당이 있는 남해포(南海浦)남애포>나매포>나무포로 되면서 한자로 목포라 했다는 것이다. 어떻든 물길로 이어지는 길목의 포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해포-목포는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나주 목포무안 목포에 대한 것이다. 무안 목포는 당연히 현재의 목포이다. 그러면 나주 목포는 어떤 유서가 있는가. 고려 건국기에 왕건군과 견훤군이 영산강 일대에서 대접전을 벌인다. 물론 서남해 바닷길을 장악하기 위한 쟁패의 연장선상이다. 고려사태조가나주의 포구에 이르니,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을 늘어놓았는데, 목포(木浦)부터 덕진포(德眞浦)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았고 수륙 종횡으로 얽혀 있어서 그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의 수군을 격파하는 내용의 앞부분이다. 이 승리를 기반으로 왕건은 고려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다. ‘무안 목포와는 다른 영산강 내해의 나주 목포이다.

 

목포는 1555(명종 10) 을묘왜란기의 기록에서도 물길의 길목임이 나타난다. 당시 진도에 유배를 와 있던 소재 노수신은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진도를 떠나 내륙으로 피난을 간다. 유배 중인 문관도 전쟁 통에는 살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던 것. 진도를 출발해 해남 황원면을 거쳐 목포를 지난다. 영산강을 따라 무안, 함평, 광주로 나다니다 다시 돌아간다. 오가는 길에 만난 사람과 들른 곳마다 기록하고 시를 남겨 을묘피구록(乙卯避寇錄)이라 한다.

 

목포(木浦)’라는 시도 남긴다. 그중 한 구절 말만 한 외론 성이 한쪽 산언덕에 붙어 있는데. 거대한 항만이 빙 두르며 한구석을 활짝 열었네. 지친 군졸 수십 명은 다 두려워 벌벌 떨고 있고, 부서진 배 두세 척은 절반쯤 바다에 갈앉았구려[孤城如斗着偏丘 巨港爲環闢一隅 數十罷兵摠恇怖 二三摧艑半沈濡]” 언덕배기에 있는 목포 수군진성, 고하도가 앞을 가린 거대한 항만, 전쟁이 두려워 떠는 군졸, 부서져 가라앉은 배. 전쟁의 참상을 말해 준다.

 

임진정유왜란기에는 고하도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삼도수군통제사영이 된다. 해남과 진도의 울돌목[鳴梁]에서 세기의 대해전 명량대첩을 거둔 뒤 수군을 정비하는 길이다. 해남은 전라수군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목포에 있던 전라수군처치사영이 1440년 해남 황원곶으로 옮긴 뒤 1479년에 또 하나의 수영을 여수(당시 순천)에 설치하면서 전라좌·우수영은 조선의 해양영토를 지키는 주력이 된다.

 

해남, 죽산현과 황원현, 진도와 합해 해진군

 

해남의 고을 편제는 조선 초기까지 세 곳이 있었다. 거기에 진도와 해남이 합해져 해진군이 된 적도 있었다. 바다와 관계되어 복잡하다. 왜구의 피해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색금(塞琴)현이 있다. 침명(浸溟)으로 고쳤다가 다시 해남(海南)으로 고친다. 일명 착빈(捉濱) 또는 투빈(投濱)이라는 땅이름도 썼다. 현재의 해남군 해남읍 일원인데 원래는 현산면과 화산면 일원이 관할 구역이었다. 1409(태종 9)에 해남현, 죽산현, 진도현이 합해져 해진군이라 하면서 녹산역의 옛터인 해남읍 금연리에 읍치를 둔다. 다시 1412(태종 12)에 삼산면으로 옮겼다가 1437(세종 19)에 진도와 분리되어 해남현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자리 잡는다. 예전에 읍치가 있던 현산은 고현(古縣)으로 불리우게 된다.

 

해남현의 백제 때 지명 색금(塞琴)사이 구미에서 변한 말로 보기도 한다. 사이구미가 새그미, 샛그미, 색금이가 되었다가 색금으로 되어 소리 나는 대로 색금(塞琴)’이라 한 것인듯 싶다. 두 구미 사이 바닷가에 있는 고을의 뜻이다. ‘침명(浸溟)’바다를 적신다’, 별호인 착빈(捉濱)’물결을 잡는다로 풀이할 수 있어 바닷가와 연관성이 있다.

 

또 하나의 고을은 죽산(竹山)현이다. 마산면과 계곡면 일원이 관할 지역이다. 백제 때 고서이(古西伊)라 하다 통일신라 때 고안(固安)으로 고쳤다. 동안(同安)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들어 죽산으로 고쳤다. 1409년에 해남, 진도와 합해져 해진군이 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다.

 

다음은 황원현이다. 백제 때는 황술(黃述)이라 하다가 통일신라 때 황원(黃原)으로 고쳐 조선초기까지 그대로 쓴다. 지금의 화원면, 황산면, 문내면 일대이다. 치소는 현재 해남군 문내면 고평리, 고당리 일원으로 보고 있다. 황술(黃述)이라는 땅이름에서 황은 황토 또는 넓다의 의미이고, 술은 수리로 평야나 들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남은 행정편제상 세 고을이 있지만 기록상 몇 곳이 더 보인다. 우선은 진산(珍山)이다. “진산고성은 해남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터만 남아 있다.”는 기록과 성씨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진산 고성은 고려시대 청자 제작 산지가 밀집 분포된 산이면 일원에 있다. 진산은 향이라는 기록도 있어 청자 제작과 관련이 있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송양현이 있다. 지금의 송지면과 현산면 일대에 있었는데 영암군의 속현이었다. 옥천(玉泉)현은 해남현의 동쪽 15리에 있었다. 본래 영암군 냉천부곡(冷泉部曲)이었는데 이었지만 고려 때 옥천현이 되었다. 1448(세종 30]에 해남현에 내속되었다. 현재의 해남군 옥천면 영춘리 일원이다.

 

해남에서 바닷길과 관련하여 살펴볼 마을이 있다. 황조(皇朝)마을이다.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에 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구원군 도독으로 왔던 진린(陳璘) 장군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다. 진린은 군선 500척을 이끌고 고금도, 녹도 등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왜적을 방어하였다. 황조마을 이름은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1644~?)가 명이 멸망하자 진린의 유지에 따라 중국 광주로부터 관왕묘가 있는 강진 고금도에 이주하여 거소를 구석리라 한데서부터 비롯된다. 그 뒤 진영소의 아들인 진석권과 진윤권은 해남의 현 위치로 옮겨 살면서 명의 유민이란 뜻으로 황조동이라 하였다. 1679(숙종 5) 진린을 모시는 단을 만들어 제향하다가 1871(고종 8)에 별묘를 건립하였다.

 

진도, 고려말 왜구침탈로 떠나 87년 만에 귀환

 

해남은 진도와 합해 해진군이라 한 적이 있었음을 살폈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해남과 합해지게 되었을까. 진도에는 원래 세 곳의 고을이 있었다. 진도와 가흥, 임회이다.

 

진도는 옥주(沃州)라고도 한다. 지금의 진도읍과 고군면 일원이 관할 지역이었다. 고군면에는 석성 유적도 남아 있다. 원래 백제 때는 인진도(因珍島)라 하다 통일신라 때 진도(珍島)로 고친다. 고려사에는 백제 때 진도라는 기록도 있다. 넓은 들을 가진 섬이라는 뜻의 잉진도(仍珍島)가 인진도로 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도는 고려시대 말기에 큰 변화를 겪는다. 왜구의 침탈로 1350년에 섬을 비우고 내륙으로 임시 치소를 정해 옮기게 된다. 섬을 비우게 된 것이다. 옮겨 간 곳은 지금의 영암 시종면인데 명산면(命山面)으로 부른다. 명산면은 시종면 월악리, 내동리, 태간리, 만수리 일원으로 이 지역을 통틀어 진사리(珍四里)’라고 불렀다. 진도에 속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진도현은 뒤에 진도 가까이 해남 삼촌면으로 간다. 삼촌면은 지금의 해남 삼산면 원진리, 봉학리, 송정리, 충리, 신흥리 일대였다. 1409년에 해남과 합해져 해진(海珍)군이 된다. 1437년 해진군이 해남과 분리되어 진도군이 되고 현재의 진도읍으로 돌아간다. 고려말기 진도를 떠난 지 87년의 객지살이를 한 뒤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섬을 떠나기 전의 원래 자리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지금의 진도읍 자리로 간다. 그래서 옛 치소 지역은 고군면(古郡面)이 된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진도 명산면이다. 지금의 영암 시종면, 1350년에 진도 치소가 옮겨 간 곳이다. 진도 본부는 해남을 거쳐 진도로 돌아왔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조선왕조 전 기간을 진도 명산면으로 편제된 것이다. 영암군에 속한 땅이지만 세금이나 부역은 진도군에 냈던 것이다. 이처럼 당해 지역을 건너뛰어 경계를 넘어 있는 행정구역을 월경처(越境處)라 한다. 영암 시종의 진사리, 진도 명산은 1906년에 이르러서야 영암군에 속하게 된다.

 

이 밖에도 월경처는 더 있었다. 지금의 해남 옥천면과 송지면, 북평면 지역은 영암군의 월경처였다. 예를 들어 해남의 미황사는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에 속했다는 것이다. 1692(숙종 18)에 세운 미황사 사적비의 비제가 전라도 영암군 달마산 미황사 사적비명인 것은 이 같은 행정편제가 반영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해남 미황사는 기록상으로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평 지역에 있는 이진진과 달량진도 영암에 속했다. 이들 지역 역시 조선 전 기간을 월경처로 편제되었다가 1906년에 해남군으로 편입 된다.

 

진도의 또 다른 고을로 가흥(嘉興)이 있다. 백제 때 도산(徒山)이라 하다 통일신라 때 뇌산(牢山)으로 고쳤다. 가흥은 고려시대부터 쓴 역사 지명이다. 현재의 군내면 일원이다. 도산을 추산(抽山) 또는 원산(猿山)이라고도 했다. 도산의 도()의 훈이 무리인데 의 표기가 아닌가 싶다. 뢰산의 뢰()무리로 보아 의 표기로 보고 있고 원산의 원()(원숭이)’, ‘>으로 넓다는 의미로 보아 바다()’와 연계된다고 볼 수 있다. 바다와 관련된 땅이름이다.

 

그리고 임회(臨淮)현이 있다. 백제 때 매구리(買仇里)라 하다 통일신라 때 첨탐(瞻耽)으로 고치고, 고려시대에 임회라 했다. 현재의 임회면 일원이다. 매구리의 ()’의 우리말로 추정된다. ‘구리고을>>의 한자표기라 보임으로 매구리물골의 한자표기인듯 싶다. ‘임회는 물가, 바닷가를 의미하는 한자이므로 매구리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섬에 있는 고을들의 땅이름은 바다와 물과 관계가 깊다.

 

완도, 강진·영암·해남·장흥의 섬을 합해 완도군 신설

 

완도는 189623일에 완도군이라는 독립된 고을 격이 부여된다. 신설된 완도군은 영암군, 강진군, 해남군, 장흥군에 속한 섬 210개를 편입하여 10개면을 관할한다. 유인도 75개 무인도 135개이다. 고려, 조선시기에는 위 네 곳의 군·현에 나누어져 속했다는 것이다. 완도 본 섬은 강진현에 속했다.

 

완도(莞島)의 유래는 왕도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통일신라 때 828(흥덕왕 3) 청해진(靑海鎭)이 설치되고 왕권에 버금가는 지휘력이 있었고 실제로 민애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기 때문에 그 배경 세력으로서 완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청해진의 주요 시설은 완도읍 장좌리 일대에 있다. 한편, 바닷가 섬지역이어서 갈풀-왕골의 의미가 완도(莞島)로 연결되었다고도 본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1522(중종 17)에는 달량진을 합하여 가리포진(加里浦鎭)을 설치한다. 달량진은 해남 북평면 남창에 있는데 당시 영암군에 속했다. 가리포진은 강진 마도진, 영암 어란포진, 진도 금갑도진, 강진 신지도진을 관할했다. 어란포진은 지금의 해남 북평면, 신지도진은 완도 신지도에 있었다. 가리포(加里浦) 땅이름은 가리는 +로서 의 다른 표기이므로 갈포로 읽을 수도 있겠다.

 

남도 바닷길을 따라 역사 속의 행정편제를 살피면서 땅이름의 유래도 알아 보았다. 바닷길을 통한 교류관계도 알아보았다.

 

영암과 해남, 진도는 백제시대 이래 3~4개소의 독립된 고을이 편제되어 있었다. 영암에는 영암[낭주]과 곤미현, 아로곡현, 해남에는 해남현과 황원현, 죽산현, 진도에는 진도군과 임회현, 가흥현이 있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로 변화를 맞는다.

 

진도는 영암 시종으로 임시로 옮기지만 87년 동안 객지살이를 한다. 다시 돌아가기는 하지만 영암 시종의 진사리는 진도 명산면이 되어 부세나 부역을 진도군으로 한다. 1906년에 영암에 속하게 된다. 해남의 옥천면과 북평면 지역도 영암군의 월경처이다가 1906년에 해남으로 편입된다.

 

목포는 독립된 고을로 편제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초기에 병영과 수영이 설치되면서 강길과 바닷길 길목의 포구로서 큰 구실을 한다완도는 강진, 영암, 완도, 해남에 나누어 관할되다가 1896년에서야 완도군이 설치되지만 통일신라 때의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권을 주무르는 본부격이었다.

 

남도의 바닷길, 그 길 따라 어울어진 고을들은 해양영토를 지키고 가꾸는 중심 공간이었다.

 

대동여지도 목포와 영산강 부근도(규장각 소장, 10333)

바닷길과 강길이 만나는 물목의 포구가 목포이다. 무안 땅에 '나주 삼향'과 영암 땅에 '진도 명산'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월경처(越境處)이다. 특히 진도 명산은 고려말기 1350년 왜구의 침탈로 섬을 비워두고 바닷길로 이어지는 지금의 영암 시종으로 읍치를 옮겼다. 진도 본부는 해남을 거쳐 87년만인 1437년에 지금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주민들은 영암에 남아 조선조 전 기간을 진도군 명산면으로 세금을 진도군에 냈다. 영암 시종면 월악리, 내동리, 태간리, 만수리 일원으로 진사리(珍四里)’라고 부른다. 1906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영암군에 속하게 된다. 영암의 옛 진도 명산면 지역에 가면 지금도 노랫가락이나 쇠가락이 진도와 비슷하다는 을 느낀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공유하면서 사람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노수신(1515~1590)소재선생문집에 실린 시 목포(木浦)’(한국고전번역DB)진도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노수신은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해남을 거쳐 목포를 지나 피난길에 오른다. 1555513일부터 719일 사이, 들르는 곳마다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47수의 시의 시로 남겨 <을묘피구록(乙卯避寇錄)>이라 했다. 전쟁통의 피난길에도 바닷길을 통한 이동로를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