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35 - 1401년 좌명공신녹권, 마천목사당 마루밑에서 발견

향토학인 2016. 5. 26. 16:48

인지의 즐거움 035

 

1401년 좌명공신녹권, 마천목사당 마루밑에서 발견

 

김희태

 

한국전쟁기에 사라졌다는 좌명공신녹권, 원본 발견

 

한국전쟁기에 사라진 걸로 알려진 1401년 사급된 마천목 좌명공신녹권. 1990년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2003년 전라남도 조사에 의해 확인되었고 가치가 평가되었다. 2006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지정되기에 이른다.

 

2003년 8월 초에 마천목장군의 묘소에 대한 문화재 지정 검토 자문을 요청해 현지방문을 한 바 있다. 김학근 곡성문화원장님, 장흥마씨종회 마용화회장님, 종손 마원숙님, 곡성군청 이정주주무관 등과 현지를 둘러 보면서 사당(충정사, 충정묘)과 재각(영모재)도 들렀다. 여러 가지 말을 나누던 중에 교서와 녹권,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사진자료는 책자(<조선사료집진> 제2집[조선총독부, 1937], <조선전기 고문서집성>[정구복 외, 국사편찬위원회, 1997] 등)에 있지만 실물은 한국전쟁기에 유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신녹권은 1990년에 실물을 확인했다는 말을 듣고는 몇 번이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장흥마씨종가에서 마천목의 영당인 충정사 2차 중건과정에서 마루 바닥밑에서 책임자인 마길동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일본 강점기에 일인들이 영당에 보관된 문서류를 약탈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마루바닥에 숨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발견 이후 장흥마씨중앙종친회 총무 마상철씨가 보관하고 있었다 한다.

 

당시 <장흥마씨보첩>을 대출하여 복사한 뒤 우편으로 종손댁(마원숙)에 보냈는데 8월 23일이었다. 얼마 뒤 은행 사금고에 보관중이던 좌명공신녹권을 마형숙회장님의 배려로 실물을 배람하게 되었다. 실로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5.9미터에 이르는 고문서로서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사진촬영이 필요하였다. 마형숙회장님과 함께 동신대문화박물관으로 옮겨 스캔작업(이정호교수, 이수진실장 협조)을 하였다. 이 사진과 함께 정리를 하여 관련 전문가(목포대 고석규교수, 김경옥 연구교수, 담양대 최한선교수)의 자문을 거쳐 진본이고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하였다.

 

마천목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처음 관직에 제수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조선 태조 초에는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마천목은 정안군(이방원;태종)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태종 원년(1401)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받은 녹권이 바로 이것이다. 태종 14년(1414)에 장흥군(長興君)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 녹권은 표제어, 공신녹권을 사급(賜給)한 과정 및 연유, 공신녹권 사급에 관계한 사람들의 관명(官名) 및 수결(手決)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에는 사급 기관인 공신도감(功臣都鑑)을 명시하였고, 피사급자(被賜給者)인 마천목의 공신 호, 직함 및 성명, 본관 등을 표기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 평정 공신 47명, 4등급으로 토지 노비 등 내려

 

좌명공신은 회안군(懷安君) 이방간(芳幹)과 박포(朴苞) 등이 일으켰던 조선 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로 마천목은 뒤에 태종(1367~1422 ; 재위 1400∼1418)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따라,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稱下)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하였다. 이저(李佇) 등 9명은 1등 공신으로, 이래(李來) 등 3명은 2등 공신으로, 마천목 등 12명은 3등 공신으로, 조박(趙璞) 등 23명은 4등 공신으로 차등을 두어 공신 호를 내렸다. 1등은 ‘진충좌명공신(盡忠佐命功臣)’이라 하였고, 2등부터 4등은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이라 하였으며, ‘좌명(佐命)’으로 줄여 쓰기도 한다.

 

   - 진충좌명공신 일등 : 이저(李佇), 이거이(李居易), 하륜(河崙), 이무(李茂), 조영무(趙英茂), 이숙번(李叔蕃),

                                  민무구(閔無咎), 신극례(辛克禮), 민무질(閔無疾)(9)

   - 익대좌명공신 이등 : 이래(李來), 이화(李和), 이천우(李天祐)(3)

   - 익대좌명공신 삼등 : 성석린(成石璘), 이숙(李淑), 이지란(李之蘭), 황거정(黃居正), 윤저(尹柢), 김영렬(金英烈),

                                  윤곤(尹坤), 박은(朴訔), 박석명(朴錫命), 마천목(馬天牧), 조희민(趙希閔), 유기(柳沂)(12)

   - 익대좌명공신 사등 : 조박(趙璞), 조온(趙溫), 권근(權近), 이직(李稷), 유량(柳亮), 조경(趙卿), 김승주(金承霔),

                                 서익(徐益), 홍서(洪恕), 윤자당(尹子當), 이원(李原), 이승상(李升商), 김정경(金鼎卿),

                                 서유(徐愈), 이종무(李從茂), 이응(李膺), 심구령(沈龜齡), 연사종(延嗣宗), 한규(韓珪),

                                 김우(金宇), 문빈(文彬), 윤목(尹穆), 송거신(宋居信)(23)

 

좌명공신에게 내린 특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에 정리한 내용 외에도 처음입사하는 것을 허락하며 적장자는 녹봉을 끊임없이 물려받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에 ‘좌명○등공신’ 아무개의 자손임을 기록하며 비록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사면이 영세에 미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충정공 마천목은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녹권과 교서를 사급받았고 전(田) 80결(結), 노비 8구, 은품대(銀品帶) 1요(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옷의 겉감과 안감) 1단, 말(內廐馬, 丘馬 ; 司僕寺에서 기르는 궁중용 말) 1필, 구사(丘使,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내리는 관노비, 扈從 업무담당) 3명, 진배파령(眞拜把領, 임금이 공신에게 특별히 딸려준 군사) 6명을 하사받았다

 

<표> 좌명공신 특전

특전 포상
부모, 처 직자(直子) 조카, 사위
(직자 없을 때)
田(結) 노비(口) 白銀(兩) 銀帶(개) 表裏(段) 馬(필) 丘使(명) 眞拜把領(명)
일등 3등 올려 봉증 3등 올려 음직 제수 2등 올려 음직 제수 150 12 50 - 1 1 7 10
이등 2등 올려 봉증 2등 올려 음직 제수 1등 올려 음직 제수 100 10 25 - 1 1 5 8
삼등 1등 올려 봉증 1등 올려 음직 제수 음직 제수 80 8 25(2품이상) 1(3품이하) 1 1 3 6
사등 봉증(封贈) 음직(蔭職) 제수 - 60 6 (2품이상) 1(3품이하) 1 1 1 6

 

 

 

2004년 11월 26일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를 하였는데 국가지정문화재(보물)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하게 되었다. 문화재명칭은 소재지와 소장처를 고려하여 ‘곡성 충정사 소장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으로 하였다. 그리고 곡성군에 통보하여 지정신청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곡성군에서는 실태조사를 통하여 2005년 4월에 보물 지정신청서를 도에 제출하였고 5월에 전남도에서 문화재청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문화재청(동산문화재과, 당시 김인규학예사)에서는 7월부터 실무검토와 전문가 조사 실시를 검토하였다.

 

한편, 2004년 11월 27일 도 문화재 지정내용과 함께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의 국가지정신청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문화재청 서병패 상근전문위원(고문서)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귀한 고문서의 발견 경위를 문의하면서 학계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취지를 말하였다. 실물 확인 이후 정리하고 있던 필자의 자료를 그대로 서병패위원에게 제공(2004.12.07)하였다. 도 문화재위원회 심의 자료, 원문 사진과 자료 사진(사당, 묘역 일대 사진 포함), 전래 경위, 원문 대교 자료 따위이다. 중앙 학술지에 소개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연구논문 ‘조선초기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의 서지적 고찰’은 <서지학보> 29집(한국서지학회, 2005. 27~58쪽)에 실렸다.

 

2006년 마침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되다.

 

2005년 12월 15일 문화재청에서 관계 전문가(최승희서울대 명예교수,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 서병패 문화재청 전문위원/손명희 문화재청 학예사) 조사를 곡성 현지에서 실시하였다. 당시 눈이 무척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2006년 2월 9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위원회에서 보물 지정가치가 있다고 검토되어 관보(제6200호, 2006. 2.24. 금요일자)에 지정예고(문화재청 공고 제2006-33호, 30일간)를 하였다. 4월에 최종 심의를 하여 4월 28일자로 보물로 지정고시(관보 제6244호, 2006. 4.28. 금요일자, 문화재청 고시 제2006-40호)되었다. 당시 관보에 실린 지정사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녹권은 조선 태종 1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 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 上將軍) 마천목(馬天牧)에게 발급한 것으로 필사본이다. 좌명공신은 조선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로 마천목은 후에 태종(1367-1422)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稱下)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하였는데 이 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이다. 조선 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신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은 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공신도감 구성원은 물론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를 파악할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초기에 지정된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국보 232호)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을 상기하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보물 지정 이후 문화재청의 권유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위탁보관하게 되었다. 우선 2006년 5월 30일부터 2년간 기한으로 하였다. 2006년 5월에는 녹권 보존처리 2007년 국고보조사업비(5천만원)를 곡성군에서 전남도를 경유하여 문화재청에 신청하였다. 6월 18일에는 곡성군향토사연구회(회장 김학근)와 장흥마씨중앙종회 주관으로 곡성 충정묘에서 국가보물 지정 고유제를 올렸다. 기념타올과 서병패선생의 논문도 인쇄(1천부)하여 배부하였다고 한다.

 

2007년 11월 20일에는 문화재청 등록 문화재보존처리전문업체인 정재문화재연구소(총괄책임 박지선, 책임연구원 조은혜)와 계약을 체결하여 보존복원처리를 하였다. 3차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1차 2007.12.12. 자문위원 최승희, 서병패, 신승운 / 2차 2008.7.7. 최승희, 서병패, 신승운, 송일기 / 3차 2008.10.29. 최승희, 서병패, 신승운)를 거쳐 2008년 11월 19일에 마쳤다.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영인본은 장흥마씨중앙종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2008년 8월 1일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2009년 4월 10일 국보지정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문가(최승희, 전경목교수, 서병패 전문위원 등) 조사를 실시하여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에서 검토 한바 있다. 종중에서는 마상문선생 등이 참여하였다.

 

아직은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 교서 등 마천목 관련 다른 유물들의 전래 여부, 기존 국가지정문화재 공신녹권류의 재평가(국보이던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의 보물 제1657호 변경지정)등과 함께 검토될 여지가 있다. 2013년에는 또 다른 좌명공신녹권이 확인되었다는 보도(<한국일보> 2013.03.12일자)도 있었고 학계에서도 간략히 언급되바 있다. 비교 검토도 필요한 일이다.

 

2011년 2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이층 제왕기록실에서 작은전시라는 기획전을 하였다.

 

2016년 4월 24일 강진 전라병영성에서 충정공 마천목 전라병영 초대병사 재임 600년 숭모제가 열렸다. 처음 곡성 묘소를 찾아 보면서 공신녹권 발견되었다는 제보를 해 주셨던 마용화 회장님을 다시 뵈었다. 93세 노익장은 여전하셨다. 반가움 속에서 발견의 과정과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경위, 내용과 가치 등에서 설명을 하였다. 강영석 선생(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 마상섭, 마삼섭 이사님의 도움에 힘입어 <충정공 마천목 좌명공신녹권> 책자도 간행하였다. 외우 마동욱 작가는 사진기록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다. 뒤에 마용화 회장은 규장각에 소장된 <마씨문적> 가운데 '곡성현 입안(谷城縣立案)' 사본을 보내 오셨다. 3미터에 가까운 고문서이다. 마천목 장군 후손대로 내려 오면서 토지가 소유권이 바뀌게 되는데, 그것을 다시 찾는 과정의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찾아지고 연구되길 기대한다.

 

 

1401년 좌명공신녹권 원본 사진(앞 부분) 6.25 한국전쟁기에 사라진 걸로 알려 졌는데 1990년 곡성 마천목 사당 마루밑에서 원본 발견. 2003년 전라남도에서 전문가들이조사하여 가치를 평가하였고 2006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존처리도 하여 지금은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서울 경복궁 소재)에서 위탁관리하고 있다.

 

마천목은 고려말기-조선초기의 명장으로 장흥부 회령현(현 보성군 회천면, 당시는 장흥부에 속함)에서 태어나 곡성으로 이주하였고 무관으로 입신 양명한다. 좌명공신녹권 3등에 책록된다. 곡성에는 마천목 장군의 효도에 얽힌 '도깨비살' 전설이 전한다.  조선후기 1872년 곡성현 지도(규장각소장)에 섬진강 두가천을 가로 지르는 어살을 그리고 ‘두가 어살(漁箭)은 본조(조선) 마천목이 도깨비를 시켜서 쌓은 곳이다.(豆可 漁箭 本朝馬天牧 役鬼所築)’라는 기록이 보인다.

 

마천목 전라병영 초대병사 재임 600년 숭모제. 2016.04.24 (사진 마동욱 작가)

 

숭모제 현장 좌명공신녹권 설명(사진 : 강진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