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34 - 1567년, 문·무과 합격 동기 모임, 광주 희경루 방회도

향토학인 2016. 5. 26. 13:14

인지의 즐거움 034

 

1567년, 문·무과 합격 동기 모임, 정자공 임복(林復)

-국가 보물 제1879호 광주 희경루 방회도(喜慶樓 榜會圖)-

 

김희태

 

“작년 관해정 왔을 때 비문 정자공과 관련된 자료가 국가 보물인가 지정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았으면 하네요. 문중 모임에서 그 말을 했더니 아주 좋아하시데요.”

 

임인철 나주임씨화수회장님의 전화였다. 2016년 3월 20일 아침. 순간, 어떤 내용을 말했을까 기억이 아리송했다. 찾아보겠다는 말씀은 드렸지만 자신이 없었다. 뭐였을까? 찾아 보니 관해정(觀海亭)을 갔던 것은 2015년 9월 24일 오후. 여섯 달이 채 안되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몽촌 임타(夢村 林㙐, 1593~1664) 선생이 소요 자적한 관해정. 문화재 지정 문의가 있다 해 현장을 가 본 것. 오랜 동료였던 정영덕위원장의 연락도 있었고. 임타선생의 할아버지가 정자공((諱復). 여기까지 찾고 기억해 냈을 때 또 다시 임회장님의 전화

 

“정자공의 과거시험 합격자들 기념 모임인가하는 그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했는데, 그에 대한 자료를 문중회보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렇다. 정자공 풍암 임복(楓巖 林復, 1521~1576)선생. 자는 희인(希仁). 정자공의 휘함(諱啣)이 들어간 방회도(榜會圖)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던 것.

 

방회도란 과거시험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 모인 장소는 광주의 희경루(喜慶樓). 하여 “희경루 방회도”라 부른다. 서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원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였는데 2015년 9월 2일 보물 제1879호로 승격 지정. 한마디로, 1546년(명종 1)의 증광시(增廣試)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이 1567년(선조 즉위)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榜會)를 갖고 제작한 기년작(紀年作) 계회도(契會圖)이다. 비단에 그린 채색화로 크기는 세로 98.5㎝, 가로76.8㎝.

 

그러니까 무안 관해정을 찾은 것(9.24)은 정자공 방회도가 보물로 지정(9.2)된지 달포가 조금 덜되었고, 그날 방문 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승격 지정된 것을 말씀 드렸던 것. 어르신들은 기억하고 계셨는데 정작 소개를 했던 당사자는 가물거렸으니.... 이제 정자공의 희경루 방회도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전라도관찰사의 주관 아래 광주목사, 정자공 등 문관 3인, 무관 2인

 

먼저, 정자공에 대한 기록과 함께 참여한 인사이다. 정자공을 포함하면 희경루 방회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5인이다. 방회도는 제목, 그림, 좌목(명단), 발문 등 네 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좌목은 보통 직품이나 나이순으로 기록한다. 무관으로 보이는 두명은 나이를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문과, 무과순으로 하고 나이를 따라 적은 것 같다.

 

1) 通政大夫 行 光州牧使 崔應龍 見叔 本全州

   (통정대부 행 광주목사 최응룡 견숙 본 전주)

    父 奉訓郞 行 定州敎授 以漢

   (부 봉훈랑 행 정주교수 이한)

2) 資憲大夫 兼 全羅道觀察使 姜暹 明仲 本晉州

   (자헌대부 겸 전라도관찰사 강섬 명중 본 진주)

    父 贈 資憲大夫 刑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從仕郞 公望

   (부 증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종사랑 공망)

3) 前承文院 副正字 林復 希仁 本羅州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 희인 본 나주)

    父 通政大夫 戶曹叅議 鵬

   (부 통정대부 호조참의 붕)

4) 禦侮將軍 全羅道兵馬虞侯 劉克恭 敬叔 本忠州

   (어모장군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경숙 본 충주)

    父 忠順衛 錫文

   (부 충순위 석문)

5) 通訓大夫 前 行 樂安郡守 南效容 恭叔 本宜寧

   (통훈대부 전 행 낙안군수 남효용 공숙 본 의령)

    父 忠順衛 禦侮將軍 世光

   (부 충순위 어모장군 세광)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정자공(林復선생),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전 낙안군수 남효용 다섯 사람이다. 이들 가운데 최응룡(1514~1580)은 1546년 증광 문과에서 장원(갑과 1등), 정자공(임복, 1521~1576)은 을과(乙科) 6등, 강섬(1516~?)은 병과 2등을 하였다. 방회 모임 당시에는 최응룡은 54세, 정자공은 47세, 강섬은 52세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유극공과 남효용은 문과 방목에는 보이진 않는다. 발문을 보면 “동년(同年)”이라 하여 참석자들이 같은 해 과거 급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1567년에 있었던 무과 급제자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해 치뤄진 문과와 무과의 과거 급제 동기들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모임의 주관자는 전라도관찰사 강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모임 당일에는 오지 못했지만, 광주 가까이에 동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발문을 통해 영광 윤홍중(尹弘中, 1518~1572)과 광양 육대춘이 지방관으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자공은 좌목에 기록된 5인 가운데 세 번째로 표기되어 있다. 그 내용이다.

 

前 承文院 副正字 林復 希仁 本 羅州

父 通政大夫 戶曹叅議 鵬

 

첫줄에 관청, 관직, 휘함, 자(字), 본관, 다음 줄에 부친의 품계, 관직, 휘함이 순이다.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 자는 희인이고 본관은 나주. 부친은 통정대부 호조 참의 붕(鵬)”의 내용이다. 승문원이란 조선 시대에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은 관청이다. 괴원(槐院)이라고도 했다.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이었음으로 당대에 문장가들이 근무했을 것은 자명한 일. 정자공의 문장가로서의 위상을 알 수 있겠다. 모두 문관으로 임용했고 다른 관원임 겸임도 하였다. 시기에 따라 직제와 정원이 조금씩 따르지만 <경국대전>에 따르면 책임자는 도제조(정1품 : 의정이 겸임)로 3인이었다. 그리고 정자는 2인, 부정자는 2인이었다. 승문원은 원래 한양(서울) 북부 양덕방(陽德坊 : 지금의 종로구 桂洞)에 있었으나 세종 때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정자공은 1540년(중종 35) 사마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는데, 승문원 부정자, 정자 등을 지낸다. 희경루 방회도는 승문원 부정자의 관직을 기록하고 있다. 

 

부친의 품계인 통정대부는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이고 호조는 조선 시대 육조의 하나로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田糧)과 식량, 재화(財貨), 경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중앙 관청이다. 지관(地官)으로도 부른다. 참의는 정삼품 벼슬이다. 임붕(1486~?)선생은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세기의 흔치 않은 채색화 계회도, 앉은 자리와 복장까지 묘사

 

다음으로 그림에 대한 내용이다. <희경루 방회도>는 1567년(명종 22)에 있었던 희경루에서의 방회 장면을 그린 계회도(契會圖)이다. 이 방회도는 1546년(명종1) 증광시의 동기생들이 광주 누정(樓亭)인 희경루에서 20여년만인 1567년에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여, 그 감회를 간직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면은 위로부터 표제(標題), 계회장면, 좌목(座目, 명단), 그리고 발문(跋文)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구성 부분은 붉은 색 선으로 경계가 그어져 있다. 표제는 전서체로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적었고, 좌목에는 품계와 관직, 이름, 자, 본관, 부친의 관직과 이름 따위가 일정한 간격으로 쓰여 있으며 이에 의하면 참석자는 모두 다섯명이다.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정자공(林復),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전 낙안군수 남효용 등.

 

광주목사 최응룡으로 추정되는 ‘완산후인(完山後人)’이 쓴 발문에서는 1546년(명종1) 과거에 함께 합격한 동기생들이 각자의 근무지를 따라 흩어진 뒤 만나지 못한지 20여년이 되었음을 회고하면서, 그 동안의 그리움과 만남에 대한 감회를 적어, 관계에 함께 첫 발을 들여놓은 동료들 간의 친밀한 공감대가 엿보인다. 나아가 최응룡을 비롯한 다섯 사람의 앉는 위치마저도 서술하여 이 발문이 방회가 행해졌던 현장의 모습에 근거하여 서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방형의 화면에는 왼쪽에 희경루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희경루의 담장을 비롯한 주위경관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층으로 축조된 희경루 안에는 이 모임의 주인공들과 여러 명의 기녀들이 자리한 가운데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다.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신분에 따라 관모(冠帽)를 달리하고 있으며, 기녀들은 당시의 유행대로 고발(高髮)을 하고 있다.

 

한편 희경루는 축대를 쌓은 대위에 1층은 기둥을 세우고, 2층에 누를 올린 것으로 그림 속 누정의 아래층에는 하인들이 쉬고 있으며, 누정의 왼쪽에는 피리를 부는 악공들이 무리지어 있다. 축대 아래쪽에는 나장과 같은 군졸들이 도열해 있다. 희경루의 동쪽 공간에는 민가가 인접해 있으며, 그 앞의 넓은 터에 활터가 있는데, 주변의 경관 역시 사실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자 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은 배경을 이루는 산의 양감이나 질감묘사, 누정 왼쪽의 나무표현 등 먹의 흑백대비가 강조되어 있는 등 16세기 중·후반기에 유행했던 절파화풍(浙派畵風)이 잘 나타나있다. 또한 연회장면은 위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부감투시(正面俯瞰透視)와 원근법이 사용되어 부각되고, 담장을 비롯한 다른 주변 경물들은 대각선에서 사선방향으로 비스듬히 바라보는 평행사선투시(平行斜線透視)가 이중투시로 적용되어 두 가지 시점이 각기 독립적으로 한 화면에 표현되어 있다.

 

광주목에서 제작된 <희경루 방회도> 1567년의 기년작 계회도록 연회 장면과 인물 묘사, 희경루 주변 경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형식에 있어서도 표제, 그림, 좌목, 발문 등을 충실히 갖추고 있고, 고치거나 덧대 쓴 흔적이 없다. 그리고 인물을 묘사한 필치는 매우 생기 있고 활달하며 자신감이 넘친다. 또한 비슷한 자세의 인물을 같은 모양으로 판에 박은 듯 반복해서 그리는 투식적인 면이 적다. 희경루 건물 묘사에서도 보이는 대로 그린 듯한 꾸밈없는 필치를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희경루 방회도>는 제작시기, 양식적인 특징, 회화적 가치 면에서 가치가 크다. 또한 내용상 16세기의 방회도는 <희경루 방회도> 외에 신묘 생진시(辛卯生進試, 1531년)의 동방들이 1542년에 만나 제작한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를 제외하면 알려진 예가 극히 적으므로 사료적 가치도 있다.

 

발문도 옮겨 둔다.

우리들 동방은 병오년(1546, 명종 1) 봄의 경사스러움을 함께 한 뒤 조정에서, 혹은 조정 밖에서, 혹은 세상을 떠나거나 사정으로 인해 헤어져 만나지 못했다. 어느 한곳에서도 동료로서 맺어짐을 늘 잊지 않고 생각해왔다. 우연히 백척의 높은 누각에서 고회를 가지게 되니 북쪽에 위치하여 좌우에 가아(佳兒)를 둔 사람이 광주목사 최응룡이고 동쪽에 앉아 있으며 이 모임을 주관한 사람이 관찰사 강섬이다. 그 오른쪽에 열을 지어 각각 기녀들을 앉혀 놓은 사람들은 임복과 유극공, 남효용 등이다. 오호라,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과거에 등재하여 형제 관계를 맺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인생의 영고성쇄(榮枯盛衰)를 겪으며 별처럼 흩어진지가 20여년이 되었는데, 먼 남쪽의 더운 곳에 모여서 다시 지난 일을 흥하게 하니 다행한 일이다. 친밀한 교유가 빛을 발하지만 관작을 드러내지 않아 이때의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니 또한 다행 중 다행이다. 윤영광 홍중과 육광양 대춘이 또한 가까운 읍의 수령으로 있는데 병이 들어 함께 하지 못하니 이 어찌 다행 가운데하나의 흠이 아니겠는가. 융경원년(1567년, 명종 22) 정묘 6월 16일 완산후인이 제하다.(吾同年 自丙午春同慶之後 或內 或外 或散 或化參商 一隅徒結夢想去久矣 偶作高會相百尺危樓 位北而左右佳兒者光牧也 在東而綱紀一會者方伯也 列於右而各挂雲者林希仁 劉敬叔 南恭叔也 呼 以東西南北之人 偶同科第 作爲兄弟幸也昇沈星散(二十)載之餘聚於炎荒復擧往事幸也 爛熳忘形不掦爵秩 聳時人觀聽又幸之幸也 尹靈光弘中 陸光陽大春亦守 近邑而病不與焉 玆豈非幸中之一欠乎 隆慶元年 丁卯 六月 旣望 完山後人 題)(윤진영 논문 전재)

 

광주의 희경루는 이 모임이 있기 110여년전, 1451년께 지은 일종의 관영 누각이다. 광주목은 1430년(세종 12)에 고을 사람이 목사를 때린 사건이 있어 무진군으로 강등된다. 계수관도 장흥도호부로 바뀌게 된다. 20년이 지난 1451년(문종원년) 고을민들의 상소에 따라 다시 광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이때에 마침 루(樓)가 낙성되니 부로(父老)들이 “喜慶”으로서 누의 이름을 지어 이 날의 기쁨을 기념하고자 청하였고 태수(안철석)가 승낙함으로서 “喜慶樓”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전말은 신숙주(1417~1475)선생의 ‘희경루기’에 자세하다. 희경루 자리는 충장로 광주우체국 부근으로 보고 있다. 연전에 희경루 복원논의가 있어 광주공원을 자리로 잡았지만 진행은 멈추어 있다.

 

이상에서 무안 관해루 방문을 계기로 정자공이 참여한 광주목 희경루 방회도에 대해 살펴 보았다. 당시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간 글은 남겨지지 않았을까 우선 찾아 보고 싶다. 그리고 문과 과거시험은 보통 33인을 선발*1)하기 때문에 이들과 동방 무과 출신까지 포함하여 활동과 교류, 저술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소개할 필요가 있다.

 

주석

1) 1546년 명종 1년 병오증광시는 전시(전시)가 4월 24일(경술)에 사정전(思政殿)에서 명종 친림 하에 치러졌다. 출방(出榜)은 그 다음날 이루어졌는데 모두 33인이다. 崔應龍(본관 전주, 거주 선산), 金德龍(안동, 京), 梁應鮐(남원, ○○), 朴民獻(함양, 경), 柳從善(진주, 경), 李希溫(전주, 경), 盧禛(풍천, 함양), 林復(나주, 京), 辛崙(靈山, 영산), 睦詹(泗川, 양주), 金克一(의성, 안동), 姜暹(진주, 경), 高景虛(제주, ○○), 金忠甲(안동, 경), 楊士俊(청주, 경), 黃祐(紆州, ○○), 申義忠(평산, 경), 周怡(상주, ○○), 李希儉(전주, ○○), 趙善奎(풍양, ○○), 李友閔(연안, 경), 申濩(영천, ○○), 鄭思良(진주, 경), 李彦忠(星州, 경), 朴全(무안, ○○), 朴偉(밀양, ○○), 尹弘中(해남, 해남), 陸大春(옥천, ○○), 李重慶(廣州, 경), 李克恭(공주, 영천), 李光軫(여주, 밀양), 郭趕(현풍, 현풍), 安士雄(廣州, 경)이다. 무과는 임경서(任慶瑞) 등 28인이다.

 

 

도움받은 자료

 - 광주광역시, <희경루 중건 기본계획>, 2010

 -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1798년 광주의 과거시험>, 2015

 - 송준호 송만오 편저, <조선시대 문과백서(상)>-태조~인조-, 삼우반, 2008

 

 - 윤진영,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喜慶樓榜會圖’ 고찰, <東岳美術史學>3, 동악미술사학회, 2002. 145~162쪽

 - 천득염·김민주, 광주목 희경루의 복원 연구, <건축역사연구> 19-6, 한국건축역사학회, 2010. 23~38쪽

 - 김영국, 광주목 희경루와 그 제영, <한국언어문학>93, 한국언어문학회, 2015. 157~180쪽

 

 - 문화재청(http://www.cha.go.kr)/문화유산정보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 <가정19년경자식2월23일생원진사방목(嘉靖十九年庚子式二月二十三日生員進士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貴6024-221])(http://rinks.aks.ac.kr)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 2016년 3월 21일(사진), 29일(원고) 나주임씨화수회장님께 제공.

 

 

 

 보물 제1879호 희경루 방회도(喜慶樓 榜會圖)

1546년(명종 1)의 증광시(增廣試)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정자공 임복,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전 낙안군수 남효용) 이 1567년(선조 즉위)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榜會)를 갖고 제작한 기년작(紀年作) 계회도(契會圖). 좌목의 다섯번째 줄에 정자공 임복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1798년 광주의 과거시험, 2015. 43쪽)

 

 

 

 

희경루 방회도 참여인사. 이 그림 하단에 적은 발문에 앉은 자리도 언급하고 있는데 관복의 인물 가운데 오른쪽이 모임을 주관한 전라도 관찰사 강섬(52세), 가운데가 광주목사 최응룡(54세), 왼쪽 세명 가운데 앞쪽부터 정자공 임복(47세), 남효용, 유극공이다. 위쪽 세 사람은 현직 관원이라 관모를 썼고, 정자공과 남효용은 전직이라 평량자(平凉子)를 썼다.

 

 

희경루 방회도 좌목의 정자공 임복 기록

 

문과방목(1546년)의 정자공 임복 기록

 

사마시 방목(1540년)의 정자공 임복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