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11
곡성 하한리 백자 요장의 역사적 배경
김희태
곡성군 관내 도자 유적은 25개소가 조사되었다. 시기별로 보면 고려전기 3개소, 고려 후기 1개소, 조선전기 11개소, 조선 중기 5개소, 조선 후기 1개소(중복), 근대 6개소이다. 오늘날의 면 지역별로 보면 곡성읍 1개소, 삼기면 1개소, 오곡면 7개소, 죽곡면 11개소, 겸면 3개소, 옥과면 1개소이다. 지금의 곡성군 오곡면과 죽곡면, 겸면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곡성 하한리 근대요장 지역은 죽곡면에 소재한다. 오곡면과 죽곡면은 조선시대까지 곡성현 지역이었고, 겸면 지역은 옥과현 지역으로 행정편제가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1454) 곡성현조와 옥과현조에 자기소와 도기소 기록이 있다. 이 자기소와 도기소 기록이 있던 시기에는 곡성현은 남원도호부 계수관 관할이었고, 옥과현은 장흥도호부 계수관 관할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옥과현에 외공장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 도기소, 자기소 기록 이후,『신증동국여지승람』(초간 1481, 신증 1530) 곡성현 토산조에 자기(磁器), 『동국여지지』(1656) 토산조에 자기, 『여지도서』(1759) 물산조에 자기가 나온다. 그리고 『곡성읍지』(1793년, 1899년) 물산조에 자기(磁器) 기록이 나온다.
1930년대에 일본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는 우리나라 700여곳의 가마터와 도편에 대한 조사를 한 바 있는데, 1933년 6월 하한리 근대 요장을 방문하여 15일 이상 체류하였다.「조선의 가마(朝鮮の窯)」(1956)에서는 도자기 제작에 참여한 내용을 기록하는데 요장의 위치, 주변환경(窯場), 5칸 가마의 구조, 작업장의 환경과 배치, 자기 제작과정, 태토와 유약에 대한 분석, 생산된 그릇의 판매와 구성원들의 생활 등으로 절을 나누어 하한리 요장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작업장 등을 그림으로도 소개하였다.
「조선 현재의 요업(朝鮮現在の窯業)」(1958)에서는 하한리 요장과 이웃한 유봉리에서 20일 가량 체류하면서 가마의 제작, 구조, 생산품, 원료, 소성방법 등을 기록하였다. 이 글에 “50년 전 광주군(廣州郡) 분원의 가마가 없어졌을 때 이주하여 부락을 만들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광주(廣州) 분원은 1880년대에 민영화와 기술 인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1930년대 방문한 기록임으로 1880년대에 유봉리 도요장이 설립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어 광주 분원 기술인들의 이동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 유봉리 도요장과 바로 이웃한 하한리 근대 요장도 서로 연계되면서 형성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1937년 5월 3일과 5일에 하한리 요장을 두 번 방문하고 생산품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치수를 계측하였고, 술잔과 대접, 접시, 사발 등 몇 백 개를 주문한 기록을『전라기행(全羅紀行)』(『工藝』82., 1938)에 남긴 바 있다. 사진 촬영은 조선은행 행원인 도이 하마이치(土井濱一)가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지속적인 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던 곡성의 입지환경과 기술 등 곡성 지역 도자문화의 전통은 광주 분원의 인력과 연계되면서 하한리 근대요장의 형성 배경에도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환경과 물자, 기술 등은 연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곡성 하한리 근대 요장은 문헌 기록과 근대기의 조사 자료를 통하여 연계성이 확인된다. 그리고 학술지표조사를 통하여 요지, 토취장, 작업장, 폐기장, 거주지 등 요장(窯場) 유적 전 공간의 구성과 배치를 알 수 있다.
곡성 죽곡면 하한리 하한마을 마을 주민들은 3곳의 가마터를 위치를 기억하고 있으며 작업장 1곳과 토취장 2곳을 알고 있었다. 실제 그릇을 잘 만들었던 전문 작업인이나 운영자의 인명도 4명을 기억하고 있고, 1950년대까지도 이어져 왔음을 증언하였다. 白〇〇[1854~1934], 金〇〇[1899~1969], 黃〇〇[1909~1985], 鄭〇〇[1919~1990])이다.
특히, 하한리 요장 운영자였던 “白○○(1854∼1934)”은 1915년의 「지적원부」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호적대장(제적부)」에는 본적 지번과 별행으로 “사점(沙店) 1통 5호(壹統 五戶)”라는 기록이 있다. 이 ‘沙店’을 “白〇〇”의 직업[신분]과 관련된 내용을 연결시켜 이해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1923년 7월 1일 시행된 「조선호적령」(조선총독부령 제154호) 제11조에 호적에 기재하여야 할 사항 13개 항목 가운데 2항 호주의 본적, 13항 기타 호주 또는 가족의 신분에 관한 사항이 있다. “白〇〇”의 호적[제적부]에 기재된 호주의 본적은 “全羅南道 谷城郡 竹谷面 下汗里 〇〇〇番地”이다. 이 본적란과 줄을 달리하여 “沙店 壹統五戶”가 기록하고 있어 “沙店”은 「조선호적령」 제11조 13항의 신분과 관련한 사항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학술발표회 토론(장기훈)에서는 “호적대장의 기록은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나 통반제(統班制)에 따른 단순한 주소표기일 수 있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므로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근대요장을 형성한 기술 장인들의 정착이 1880년대라 함으로 지적원부(1915년)의 기록이 30여년 뒤로서 바로 이어진 세대들로 볼 수 있다. 1895~6년에 구제도는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의 호적문서는 직역(職役)을 표기하였지만, 1896년 9월에 칙령으로 반포된 ‘호구조사 규칙(戶口調査規則)’과 ‘세칙(細則)’에 따른 「호적표」는 직업(職業) 항목이 있다. 앞으로 하한리 주민들의 호적표 등이 찾아 진다면 더 세부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표기는 일종의 ‘관습법’ 성격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1912년 4월 1일 시행된 「조선민사령」(조선총독부제령 제7호) “제10조 조선인 상호간의 법률행위에 대하여는 법령 중 공공질서에 관한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관습에 의한다. 제11조 ①제1조의 법률 중 능력, 친족 및 상속에 관한 규정은 조선인에게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②조선인에 관한 전항의 사항에 대하여는 관습에 의한다.”는 조항이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대전회통(大典會通)』(1865, 고종 2) 공장조(工匠條)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옹원 사기장인의 아들은 다른 일에 취역시킬 수 없고 그 업을 세전해야 한다.(司饔院沙器匠子枝, 毋定他役, 世傳其業)”고 한 직업 계승 내용을 준용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같은 「호적대장(제적부)」의 “사점”을 “白○○”의 직업(신분)과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면, 1880년대 정착한 장인들의 바로 다음 세대로서 상호 연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곡성 하한리 근대 요장은 기록이나 자료로서도 입증이 되고 주민의 면담을 통하여 현대기까지의 요업의 연속성도 확인된다.
곡성의 요업발달 배경에는 지리입지 요인도 중요하다. 특히 하한리와 바로 인접한 섬진강 수계는 운송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같은 물자의 유통은 장시(場市)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곡성에는 읍내장, 석곡장, 삼기장이 있었다.(『동국문헌비고』, (『임원경제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倪圭志」 卷3)에 장시와 함께 전국의 37개 자기 생산지 가운데 하나로 곡성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곡성의 요장들은 일찍이 섬진강 수계를 따라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점은 근대 곡성 하한리 도자기의 판로를 섬진강 하류인“구례, 순천, 해동[하동]”이라고 기록한『관립공업전습소보고』(1909)나“대개 조선의 가마는 교통이 편리한 곳은 일본상품에 눌려 판로를 잃어버렸지만,여기는 비교적 도로에 가까운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판로를 유지하고 있다.”라고 서술한 아사카와 노리다카(浅川伯教)의 저작(「朝鮮の窯 - 谷城の窯について」, 1956)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장시와 자기 생산지, 교통 등은 학술발표회 토론(장기훈)문에서 재인용하였다.
곡성 하한리 근대 요장은 곡성지역의 도자문화사의 역사적 흐름이 그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 후기~일제강점기~현대기의 지방 백자 요장의 구조와 운영방법을 밝힐 수 있는 유적인데, 그 조성과 운영 등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다양하게 전래되고, 지적공부 등 공공문서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사료된다.
참고문헌
김희태, 2021.10.22.,「곡성 하한리 백자 요장의 역사적 배경」, 『곡성 하한리 백자 요장의 현황과 성격-2021년 국제학술대회 -』, 곡성군·민족문화유산연구원, 곡성 레저문화센터. ; 『곡성 하한리 백자 요장 연구』.
조선후기 하한리 부근도(곡성현 지도, 1872년,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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