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왼손잽이 호맹이 구하셨는가요? <해산 강현구선생 회고>

향토학인 2014. 11. 30. 15:47

해산 강현구선생 회고

 

왼손잽이 호맹이 구하셨는가요?

 

김희태

 

 

“왼손잽이 호맹이 구하셨는가요?”

“그 문자보고 친구들과 한참 웃었네. 너는 지금도 그라고 다니냐. ‘호맹이’. 오랜만에 들어 본다. 근디 먼 말이다냐? 그라데.”

 

늘상 이런 식이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을 듯한 말 한마디를 문자에 담아 날리곤 한다. ‘왼손’, ‘호맹이’, ‘구했는지 여부’. 퍼즐 맞추기 같다. 그런데 밑도 있고 끝도 있고 퍼즐도 아니다. 우리들의 일상용어다.

 

‘강현구형님’.

 

‘강선생님’, ‘놀부성’ 등 호칭이 있지만 난 항상 ‘형님’이다.

그날. 2013년 8월 6일. 오후 3시께. 함평 엄다면 엄다리 옛 시장통 성냥간(대장간) 앞에서 ‘형님’께 보낸 글이다. 영암 군서면 월곡리에 있는 ‘범바위(전설을 말하지만 사실 고인돌이었다)’ 조사 확인 차 갔다가 함평으로 이동한 길이었다. 나중에 스마트폰을 보니 문자를 보낸 시간은 15시 18분.

 

엄다 성냥간 대장쟁이(장이) 어른이 어렸을 적부터 60여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그 자리에서 대장간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유석종 장인. 여든 한 살. 며칠 전, 무형문화재 신청 이야기가 있었다는 함평군청 문화재담당자의 말을 듣고, ‘한번 가보겠다’ 하여 간 곳이다. 미리 연락을 했건만, 문만 열린 채 풀무질하는 사람도 망치질하는 쟁이(장인) 어른도 안 보이고 풀무의 불마저 꺼져 있었다. ‘한번 봐 달라’고 중간 연락 역할을 했던 군청 직원마저 보이지 않는다.

 

모루·정·앞메·옆메·집게·대갈마치·숫돌·숯·선풍기와 만들어 놓은 여러 연장들 훑어보고, 여기 저기 돌아보다가 예전 ‘현구형님’ 하시던 말이 생각나서 문자를 보낸 것이다. 그때 사정인즉 이렇다. 평생 봉직의 교직에서 퇴직을 하면 ‘손발품’을 할 요량 겸, ‘소일거리’를 하고자 화순 무등산 언저리에 자갈 밭 한 뙤기를 샀더란다. 주변에서는 말리기도 했지만 명예퇴직을 한 뒤 형수님과 함께 가셔서 밭일을 했다는 것. 이따금 어머님도 모시고 갔고. 농업노동과는 거리가 먼 평생이었으니 힘은 들었지만, 그건 요즘 말마따나 ‘힐링’도 되더라는 것. 그리고 생활사를 찾아 일생을 쏘다닌 민속 공부의 연장이고, 숲과 나무·생태 조사와 보존에 힘을 다해 온 자연과의 일체도 추구하고자 했던 것.

 

그런데 형수님이 왼손잽이(사전표기로는 ‘왼손잡이’, ‘바른손잡이’이다)라서 보통 시중에서 흔히 구하는 호미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거의가 ‘바른손잽이용’만 유통되었으니. 그래서 언젠가 철물점에를 갔는데 ‘왼손잽이 호맹이’는 성냥간에 주문을 해야 구할 수 있다는 것. 이미 오래전부터 성냥간은 거의가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고. “전남지역에서도 비아, 옥과, 엄다 정도가 겨우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면서 어느 자리에선가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기술도 보존해야 할 터인데” 하는 말씀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나온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막연하게 “제가 한번 구해 볼게요” 했던 것. 예의 선하디 선한 표정으로 “바쁜 자네가 그것까지 신경쓰려한가. 말만으로도 고맙네, 희태.” 이런 전후 사정으로 ‘왼손잽이 호맹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함평 엄다 성냥간(엄다리 46번지). 한참 만에 노부부가 어딘가 다녀 오신 듯 성냥간으로 들어섰다. 아들인 듯한 건장한 청년과 함께. 병원 정기 검진차 다녀 오시는 길이라 하셨다. 인사를 드린 뒤 우선 ‘왼손잽이 호맹이’를 구하고자 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간다. 병원에 다녀오시고 나이는 드셨지만 목소리는 ‘찌렁찌렁했’다. 성냥간 대장쟁이 일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한편으로 달라지는 세태에 진한 아쉬움도 배어 있었다.

 

“거. 저… ‘왼닥잽이 호맹이’ 맹글어 논거 있스먼, 한자리 사고 싶은디.”

“아니여. 지금은 업서. 맹글어야 되. 찾는 이들이 거의 업스니 안해 놔.”

“그란디 호맹이 하나에는 얼마다요?”

“하나에 2천원. 그라고 받은지 오래 되았어.”

“오메메. 2천원밖에 안해라우. 너무 싼디. 고생하싱 거세 비하믄.”

“중국제가 밀려 왔다가도 값이 안맞아 내거시 더 잘 팔렸어. 눈으로 본 것, 말로 듣는 것은 다 맹글어 부렀어. 주문이 많고 단골손님이 넘쳤제. 지금은 누가 배울라고 안해”

“그라믄 ‘왼닥잽이 호맹이’ 두 개 맹글어 주쑈. 주문이요. 그라고 선불로 드리요.”

 

5천원을 드리니 굳이 안 받겠다고 사양을 거듭하신다. 호맹이 두 자루 값에다 특별 주문 비용까지. “이번에 안 받으면 다음에 필요할 때 또 그냥 주실 거예요. 이건 받아야 맞습니다.” “그라믄 담에 찾아 갈 때 줘.” “아니요, 저는 선불로 드려야 되겄는디요.”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하다가 주머니에 넣어 드릴 즈음, ‘현구형님’께서 전화를 했다.

 

“지금 전남대병원 감사로 있는 친구 방에 있는데. 자네 문자보고 친구들과 한참을 웃었네. 언제적 이야기인데 아직 안 잊어 묵고 있었는가. 고맙네. 일정이 으짠가.”

“여그 성냥간 어른 면담 뒤 바로 광주로 갈 거니 시간은 있습니다. 한번 뵙지요. 식사는 어쩐가요. 전대병원 앞으로 갈까요?”

“아니여. 전대병원 일은 끝났고. 자네한테 꼭 줄 거도 있으니 매곡동 우리 집(대성사랑으로 104동 504호) 부근에서 만나드라고.”

“알았습니다. 그리 가서 전화 할게요.”

 

‘왼손잽이 호맹이’ 주문 사건이 있을 줄 알았는지, 주문을 마치고 선불을 지불한 뒤에야 군청 직원이 나타난다. 대장쟁이 어른의 생애, 기술 전수과정과 활동, 제작 도구, 제작 방법, 공방, 제작하는 농기구와 연장들에 대해 간략히 여쭙고, 무형문화재 제도에 대해서 설명한 뒤 군청에서 도와서 함께 준비토록 하고 광주로 향했다. 성냥간 어른은 ‘양날 호맹이’ 한 자루와 ‘과도’ 하나를 넣어 주신다.

 

나주 금성관을 거쳐 광주로 향하는 길에 약간은 의아한 게 꼬리를 물었다. ‘웬 병원이실까?’ ‘그냥 친구 만나러 부러 병원근무자에게까지 가지는 않으실 분인디?’ 또 한 가지. ‘갑자기 무엇을 꼭 주실 것이 있다고 하실까?’ 그 전화 말끝에 ‘이것만은 자네가 봐야 하네. 필요한 사람에게 있어야 하거든.’ 하시던 말씀이 되뇌어 진다.

 

여섯시가 조금 넘어 매곡동에 도착했다. 연락을 드리니 “차는 어디 있는가” 하시면서 박스를 두 개 들고 내려오신다. 차에 싣는다. 차에서부터 식당에서까지 야그는 계속된다. 그 식당은 ‘모타부러 향토학인’들이 ‘형님’을 모시고 가끔 들리던 광주공고 곁 선술집형 횟집이다. 해뜰날 포장마차(매곡동 44번지, 설죽로 315번길)

 

“가세. 식사하러.”

“근디 머시다요? 책 같기도 한데.”

“응. 그것이 그랑께. <한국학보>여. 일지사에서 매달 나오는 학술지.”

“워메. <한국학보>는 잘 알지요. 그 귀한 책. 겁나 많은 것 같은디. 형님이 소장하시고 필요하면 저도 대출해 보믄 되는데, 느닷없이 책을…”

“1975년 창간되어 30년동안 120호까지 나오고 2005년 종간 됐제. 우리나라 국학연구에 있어 이정표를 세웠지. 근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을 잘 활용할 사람은 우리 김위원인 것 같애.”

“그래도. 갑자기 귀한 책을 주신께 좀… 근디 어쩌다 <한국학보>를 보게 되셨나요.”

“자네도 잘 알디 싶이, <한국학보>는 회원제가 아니제. 매달 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이제. 학술지 치고는 처음에 보급방식이 모험이었제. 광주 시내 있는 잘 가던 서점에를 갔었는데 처음에는 없었어. 그래서 주문을 했제. 그 학보의 이념은 ‘식민사관’ 극복이제.”

“나중에 들으니 광주에서도 <한국학보>를 주문하는 분이 있구나 하면서 일지사에서 매달 다섯 권씩을 보내 왔다 해. 내가 한권 사고, 다른 책은 두세 권이 정기적으로 사가고 한두 권은 팔리곤 했데. 그렇게 모은 것이여. 예닐곱 권 빠지고는 다 있을 거여.”

“너무 큰 선물 고맙습니다. 받기는 받는데, 필요하면 좋고 귀한 자료들은 한꺼번에 모아 활용할 방도를 찾아보아야지요.”

 

이렇게 ‘왼손잽이 호맹이’ 문자로 시작된 2013년 8월 6일. ‘현구형님’과의 ‘모타부러’는 항상 그렇듯 여러 가지 주제를 넘나들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식사를 할 무렵, 그리고 대화중에 간간히 섞여 있었던 토막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일종의 예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한국학보>를 나에게 주신 것 까지도.

 

“어이. 희태. 식사하자 해놓고 미안 하기는 한데. 한 보름전 부터 음식이 잘 안 받아.”

“사실 오늘 전대병원에는 검진하러 갔어. 전부터 정기 검진을 안해서 인자는 으짱가 보자고 체크해 본 것이제.”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의사)들 표정으로 봐서는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한데 말을 안해 주데.”

 

그날 오전 11시에는 광주시청 문화재위원회 참석했다가, 점심식사는 안하시고 약속이 있다고 먼저 나가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식사하기 어려우니 자리를 이동하신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전남대병원 검진차 가신 것도 같았다. 식사 뒤 헤어지면서 함평 성냥간 어른이 주신 ‘양날 호맹이’를 드렸다. ‘왼손잽이 호맹이’는 주문을 했노라고 말씀드리면서. “고맙네.” 하면서 받으셨지만, 그 손길이 왠지 힘이 없음을 느꼈다.

 

이상의 글이 8월 6일 ‘호맹이’ 문자를 보내고 오후에 만나서 <한국학보>를 받고 식사를 함께 하면서 나눈 이야기, 문자(screenshot), 메모(컬러노트), 녹음자료들을 풀고 엮어서 8월 19일에 다시 정리한 것이다. 19일 월요일 출근길에 ‘현구형님’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서. 병원에서도 치료가 어렵다는 정도여서 집으로 왔다는. ‘청천벽력’은 이를 두고 한말이리라. 수소문 끝에 연락이 되어 윤여정형과 함께 매곡동 자택으로 향했다. 8월 20일. 이미 기력이 많이 쇠하신 뒤였다. 들은 야그들을 엮어서 추론해 보니, ‘왼손잽이 호맹이’ 문자로 인하여 나하고 만난 날 의사의 입원권유가 있었고, 다음날 8월 7일 입원해 보름여를 치료했고, 다음 치료를 기약하고 집으로 오신 것.

 

그래서 그러셨구나. 가끔 향토학인들이나 어르신들 모실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하는데, 답이 없었던 것이. 8월 15일 학고 김정호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 한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현구형님’은 문자를 보내면 꼭 전화를 직접 주신다. 문자를 보낸게 되려 죄송할 지경이다. 그런데 몇 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는데, 그대로 지나친 것. ‘형님’은 입원실에서 말 그대로 ‘사투’를 하고 계셨을 텐데도…

 

그로부터 몇 차례의 소식이 전해지고, 한두 번은 찾아뵙기도 했다. ‘기(氣)’ 운동을 통한 효험으로 ‘지옥에서 천당으로 왔다’고 형수님께서 말씀 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으나, 끝내 더 좋은 길을 가셨다. 이제 더 넓은 세상에서, 이 세상을 거쳐 간 기고 난다는, 별처럼 많은 ‘레전드’들과 함께 모여 한마당 잔치를 벌이실 게다. 그리고 그 유장한 말솜씨로 걸쭉하게 진행하고 해설을 하실 것이다. 지상의 우리들을 굽어보시면서… 유향여정(遺香餘情)일지니…

 

* 2013년 8월 6일 ‘왼손잽이 호맹이’ 주문을 한 뒤로 9월 초에 맹글어 났다는 연락이 함평군 직원으로부터 왔다. 함평 성냥간을 한 번 들리겠노라고 했으나 차일 피일 하다가 들리지 못했다. 그 뒤로 함평군청 직원이 받아 놓았다고 연락이 와서 도청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11월 19일 저녁에 한번 찾아뵙자는 논의가 있어 찬반으로 갈렸지만, 몇몇(황호균·강명호·김희태)은 요한병원 앞 모였다. 그냥 병원 앞에만 있다가, 식사를 한 뒤 집으로 갔는데 다음날 새벽 귀천을 하셨다. 20일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도청에 가니 함평에서 보내온 ‘왼손잽이’ 호맹이 두자루가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아~~ ‘호맹이’. 한참을 지난 뒤 ‘호맹이’ 한자루는 광주민속박물관 주인택 학형에게 보냈다. ‘형님’의 뜻일 것 같기도 하다.

11월 20일. 또 하나의 기억으로… 1988년. ‘채얄(차일)’치고 한복 입고 올렸던 나의 혼인식. ‘현구형님’께서는 장흥까지 오셔서 축하 덕담을 해 주셨다.

 

* 9월 4일 전남대병원에서 진료를 하셨다. 병원에 가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병원진료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계표형과 영암 불교유적 조사 관련 자문 통화를 하게 되어서. 진료대기를 하고 있는 ‘현구형님’(형수님·이계표·강명호)을 복도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지금 뵙는 게 맞는가? 고민이 되어 오랫동안 서 있다가 이 선생께 전화를 하여 만나기는 했다. 병실로 입원하신 걸 보고 돌아 왔지만, 나중 들으니 바로 퇴원 하셨다 한다. 진료 대기 하면서 몇 마디 말씀을 주셨다. 분위기 전환 겸 나는 ‘왼손잽이 호맹이’ 야그를 꺼냈다.

 

“형님. 주문한 ‘왼닥잽이 호맹’이 맹글어 났다고 함평에서 연락 왔어요. 빨리 예전처럼 그 호맹이 들고 무등산 자락 밭에 가야지요.”

“맞어. 전번에 호맹이를 김위원이 주었다고 미국으로 전화 했어.”

 

형수님 말씀이다. 양날 호맹이를 드렸던 8월 6일 저녁에 집에 가셔서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자랑을 하셨던가 부다.

 

아아!! ‘호맹이’…

 

‘현구 형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온화하고 선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그래. 그래. 그래야제’ 하셨을 게다. 그때 우리 몇몇은 ‘현구 형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도 함께 했다. 결국, 관계된 사람들의 ‘보고픔’, ‘뵈어야 함’ 보다는 본인과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서로 하게 되었다.

 

 

* <불교문화연구> 제12집,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14. 303~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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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호맹이 구하셨는가요?

<해산 강현구선생 회고>

-불교문화연구 12집,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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