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85 - 향토학 백과사전을 만들자, 지산향토지리지 주민 워크샵, 2018.03.29

향토학인 2019. 7. 10. 21:58

인지의 즐거움185

향토학 백과사전을 만들자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제영조에 “산천은 도 안에서 제일이요(山川雄一道), 민재(民財)와 어진 사람 많다고 일컬어 왔네.(民物號多賢)”라는 구절이 있다. 성임(成任, 1421∼1484)의 시이다. 광주의 산천과 민물, 인재의 뛰어남을 읊었다. 이제 “지산”이 그 중심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향토사와 지리지, 면지와 동지(洞誌)

 

보통 군지(郡誌)와 시지(市誌) 또는 군사(郡史)와 시사(市史)는 들어본 말일 게다. 향토에 대한 기초적 정리 대상 공간이다. 그리고 면(面) 단위이면 면지(面誌), 동(洞) 단위이면 동지(洞誌)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산지리지(芝山地理誌)” 또는 “지산향토지리지(芝山鄕土地理誌)”라 하고 있다. 지산의 경우, “지산면(芝山面)”은 옛 이름이고, 이를 이은 “지산출장소”는 행정단위 명칭이지만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지산”을 공간의 개념으로는 쓰고 있다. “지산”의 명칭에는 역사지명이면서 공간 개념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지리지”이다. “地理志” 또는 “地理誌”로 표기한다. 먼저 지리(地理)는 여러 가지 복합된 의미가 있지만, ‘지표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이 가장 압축적일 것이다. ‘지리학’과 같은 용어로 보기도 한다. ‘지리’를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계통지리학과 지역지리학으로 구분하고, 계통지리학은 자연지리학과 인문지리학으로 나뉜다. 향토사를 집성한 향토지류는 인문지리학에 가깝다. ‘자연’ 그대로 보다는 ‘사람의 활동을 통해서 본’이라는 숨은 주어가 있는 셈이다.


다음은 ‘志’이다. 역사의 서술방식에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가 있다. 편년체는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이다. <고려사절요>가 대표적이다. 기전체는 역사적 인물의 개인 전기(傳記)를 이어 감으로써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기술 방법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제왕의 전기인 본기(本紀), 신하의 전기인 열전(列傳)을 중심으로 하여 연표(年表)ㆍ세계표(世系表)ㆍ인명표(人名表) 따위로 된 표(表), 관직ㆍ재정ㆍ지리ㆍ예(禮)ㆍ천문ㆍ역법 따위와 같은 사회의 주요 분야의 변천 과정을 기술한 지(志) 따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기전체의 한 구성 요소로서 ‘지(志)’를 들 수 있고, 지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지리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誌)’는 종합기록물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지리지(地理志)’와 ‘읍지(邑誌)’의 표기사례가 비교된다.


지리지로 잘 알려 진 것이 기전체 사서류의 ‘지(志)’로는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이 있다. 지리지가 독립적인 형태로 간행된 사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국력과 자원을 집대상한 인문지리서이다. 우리나라 각 도(道)의 고을별(부목군현)로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광산현을 보면,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성곽, 궁실,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고적, 명환, 인물, 효자 열녀, 제영 등 22개 항목이다. 오늘날의 군지(郡誌)나 시사(市史)와 유사하다. 이러한 전통이 향토지에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지산지리지>는 ‘지산이라는 공간과 지명을 대상으로 지산 사람들의 생활과 사회의 주요 분야의 변천과정을 기술한 인문지리서 성격의 종합 기록물’ 정도로 요약 될 수 있겠다.


“지산향토학” 백과사전을 만들자

 

일반적으로 향토지를 편찬할 때 보면, 쉽게 생각하다가 어려움에 부딪친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의외의 자료에 환호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이 ‘일회성’으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관심있는 사람들의 의기가 투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또 다시 잊혀지고 사장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몇가지 제언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우선은 지속적인 조사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시 기구로 자료수집과 정리가 필요하다. 지속성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더더욱 화급한 일이다. 정책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마지못해 하는 ‘시혜’ 차원이 아니라 생활사와 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실현 가능한 장기적인 조사계획도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행정단위별로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적인 특성에 따른 조사 연구 수집도 함께 해야 한다.


두번째는 교육문제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교육은 물론 초중고교에서도 자기 지역을 보고 듣고 느끼는 ‘산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화’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조사 연구 수집의 결과는 공유되어야하고 종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향토연구자들은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의 방법론과 협조가 이루어져여 하고, 그렇게 해서 간행된 자료는 어디에서든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찾은 외지의 관광객이나 방문자 들이 시내 서점에서 우리 지역에 대해 알고자 책을 찾았을 때 ‘향토코너’라도 있어 다양한 이 지역의 자료가 알려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향토자료가 개설된 코너가 있다는 서점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아무데서고 ‘국어사전’은 흔히 구해 볼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 지역의 자료를 모두 담은 ‘향토사전’ 하나쯤 만들어 전국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면 그처럼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각국어로 번역하여 내놓고, 또 ‘인터넷’에라도 올린다면 향토사가 세계화시대의 초석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지산향토학백과사전, 발동을 걸어 보자.


마지막으로 지산지리지를 분석하여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을 다각도로 찾아야 한다. 아직은 진행중이라 지산지리지를 일별하지 못했지만,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2022년이면 지산 정명 90주년이 된다. 3년 뒤다. 지금부터 준비하여 뭔가 대동공동체 행사와 지산사람들을 씨줄 날줄로 엮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싶다. 인문자원의 활용이다. “한양정도 600년”, “전라도 천년”등 처럼 “지산지리지에” 녹아들어 있는 “지산”만 특장을 살려 만천하에 자랑스럽게 내놓았으면 싶다. 오늘의 자리가 그 신호탄이 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 지산면(芝山面)은 1932년 11월 1일 광주군의 본촌면(本村)과 우치면(牛峙面)을 합하여 처음 부르게 된 이름이다. 본촌면은 1914년에 석제면(石堤面), 삼소지면(三所旨面), 갑마보면(甲馬保面, 尔亇保面) 세 개 면이 1914년에 합해져 생긴 면 이름이다. 우치면은 조선후기에 있던 면인데 1914년에 그대로 우치면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네 개 면이 1932년에 지산면이 된 것이다.


* 지산지리지 위크숍 특강 발제문(지산의 문화유산과 향토사 연구) 발췌, 대동문화재단 주최,

2018.03.29, 담양 성암국제수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