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 새로운 출발, 뜻깊은 만남, 목포대 사학과, 1999.11

향토학인 2018. 8. 3. 19:37

나의 이야기

(1999.11)

새로운 출발, 뜻깊은 만남, 목포대 사학과

 

김희태(83학번, 사학과, 전남도청문화재전문위원)

 

 

무안 청계, 도림캠퍼스 1회, 사학과 3회

 

대학시절의 생활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그 때 목포대는 국립 4년제로 승격한지 얼마되지 않아 서남부의 교육중심센터로 발돋움하고자 발을 내 딛는 시기였다. 83학번은 당시 “도림캠퍼스라”하던 청계 대학촌 1기생이다.

 

오늘의 목포대의 발전과정과 성장이 무안 청계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공사도 덜 끝난 1호관뿐이었고, 자재가 널려 있는 황량골짝, 비가 오면 진흙탕 길, 입구의 돌산, 돌아보면 마늘밭 천지 등등.. 17년이 지난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되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무안 청계에서의 대학생활은 새로운 만남, 뜻깊은 출발이었다.

 

1983년 2월 18일. 입학식을 한참 앞두고 광주생활을 정리한 뒤 청계에 얻은 자취방에 짐을 옮겨 온 날이다. 목포와는 두 번째 인연이다. 고교(철도고)를 졸업 한 뒤 직장(목포기관차사무소)에 근무한 것이 1976년 12월 18일. 그 뒤 광주로 옮겼다가 고교 졸업후 7년여만에 만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것도 역사학도로서.... 대학이나 학과 선택의 고민이 있었지만, 목포대 사학과 선택과 졸업은 나의 경력의 중요한 부분이다.

      

문화유산 답사와 1983년 9월 “여산사건”

 

사학과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전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만큼 공동체적인 유대관계가 강해지는 계기이기도 하다. 다른 과보다 늦게 출발했고 여학생이 많기는 하지만 교내의 체육대회 등에도 뒤지지 않은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만큼 ‘한마음’으로 뭉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분반활동도 다양하다. 한국사반, 동양사반, 향토조사반, 서양사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필자는 한국사반으로 활동했고, 대학시절 이해준교수님의 지도로 문헌정리작업, 현장조사, 기록 정리 방법론 등은 지금의 근무지까지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졸업 이후 1988년 1월에 전남도청에 문화재와 사료실 담당 전문요원으로 특별채용(6급)되어 1992년 8월에 5급으로 승진하여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경야독의 심정으로 사학 공부(조선대 석사, 전남대 박사수료)는 계속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 보자. 답사를 할 때마다 특기할 일 들이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1983년 9월의 ‘여산사건’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집단행동이다. 당시 답사는 안동문화권이었고, 필자는 1학년 때라 주동자급은 못되었지만, 학과의 발전과 실력향상을 위한 초기과정에서 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앞에서 분반활동과 다양한 답사 등을 예로 들었지만, 참여는 반강제적이었다. 다른 학과활동도 그랬다. 대학은 자율과 자유가 있는 곳이라지만, 당시 필자가 느끼기로는 사학과 학생들은 “조금은 얼어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젊고 유능한 교수님들의 넘치는 의욕과 열정적인 활동(이 덕분에 사학과로서는 최고라는 평을 들었다.), 이를 따르는(솔직히 말하자면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학생들, 그 사이에는 유대가 형성되면서도 알게 모르게 거리감도 쌓이고 있었던 모양인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단 승차 거부 등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얼마간 서먹서먹했지만, 발전을 위한 한 계기로 작용했고, 사학과에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다.

      

자료의 수집과 1984년 7월 “고물상사건”

 

나의 고향은 장흥이다. 중학 졸업 이후 객지생활이지만, 부모님과 남매간, 친구들이 있기에 항상 정겨웠다. 2학년 때인 1984년 7월, 집에 들렸다가 장흥읍 시장통에 있는 고물상에 갔다. 그 주인은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고물상의 운영은 엿장사들이 시골을 돌면서 헌책이며 잡동산이를 모아 오면 무게를 달아 수당으로 지급하곤 했다. 그

 

런 자료(그 집에서는 “고물”)들 가운데 장흥 용산면 어느 마을에서 할머니가 내놓는 헌책이 20여권 있어서 가져왔는데 “고물“로서 돈으로 치자면 얼마되지 않지만, 친구가 역사 공부한다는 말을 들어서 따로 처분하지 않고 놔두었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정성도 고마웠고 자료를 보니 간행되지 않은 필사본 문집이었다.

 

석달쯤 지나 다급한 친구의 전화가 자취방으로 걸려왔다. 경찰서에서 수사하고 있는데, 그 책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시골 할머니는 보지도 않고 먼지만 쌓여 있어 엿장수가 오니 비누 몇장과 바꿔 버렸는데,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명절 때 들렸다가 자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자기 어머니를 다그치자 엿장사가 몰래 훔쳐간 것으로 말하고는 신고해 버렸고, 장물로 처리되어 반납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으나, 지금도 반납 직전 급히 복사해 둔 필사본 문집 몇 권은 곁에 있다. 그런 일이 있고도 지금까지도 헌책이나 향토자료라면 우선 손에 넣고 보는 습성이 붙어 다닌다.

 

삼휴정과 인생의 동반자-커플 1호

 

청계는 막걸리가 유명한 곳으로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는 말따라 사학과 동료들간에 얽힌 전설(?)현장이 많다. “품바”를 각색하여 공연코자 몇 명이서 자취방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 고생을 했지만, 그럴수록 교내 테니스대회에 나가 준우승까지 했던 그 활기찬 시절의 기억도 새롭다. 지금은 신안 압해도로 옮겨갔지만, 당시 유달산 아래 있던 구도재생원에서 석류회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4년동안 써클활동(야학)을 한 것도 잊히지 않으리라.

 

학교안에는 삼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당시는 학교구역내의 일종의 섬이었다. 사유재산으로 남아 있었으니. 얼마전 동문회 모임이 있어 들렸더니, 학교에 기증되어 사학과에서 관리하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 역시 여러 가지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곳에 있는 비석은 사학과 학생들의 탁본 대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뒤에 아내가 된 당시 동기 여학생(박순천)과 가끔 들리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청계중학교에 이르는 산길이 말하자면 “데이트 코스”였던 셈이다. 나이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단체 생활속에서의 어려움도 있어 서로가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남모르게 만났었다. 졸업 후 1년이 채 못 되어 결혼 사실(1988.11.20)을 공식으로 알리기까지 그런 둘의 관계를 별반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한참 나이이던 아내에게는 마음고생을 많이 시킨 셈이다. 지금은 2남 1녀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두고두고 갚아 가리라.

 

83학번 사학과 3회이지만, “과커플 1호”라는 또 하나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이후 과 커플이 13쌍에 이르게 되었다 하니 일종의 원조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그 후배들은 “즈그들끼리”만의 인연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들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인가.

      

* 사진 : 1985년 경주 감은사를 찾은 사학과 답사. 지금은 퇴직하신 김종선교수님, 공주대로 옮기신 이해준교수님, 그리고 유원적․최성락․김영목 교수님이 함께 했다. 이분들 외에 배종무교수님(총장 역임)과 신상용․박혁순 교수님이 계셨다. 초창기 사학과를 반석에 올리신 분들이다. 앞줄 제일 왼쪽이 필자. 왼쪽 어깨에 손을 얹은 이가 뒷산을 오가면서 만났던 아내가 된 동기 여학생이다.[이 부분은 원고와 함께 제공하면서 쓴 설명인데 책에 실리지 않았고 되돌아 오지도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진을 찾아야 겠다. 우리 둘의 생애사이자 사학과의 역사이기 때문에....)

 

* <목포대학교50년사>1946-1996, 목포대학교, 2000.2.751쪽-754쪽.


교수님들을 모시고 신년 하례회, 윷놀이 등 야단법석을 한 뒤 인문관 옥상에서 기념촬영.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