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51 -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개선사지 석탑”

향토학인 2018. 5. 6. 18:38

인지의 즐거움151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개선사지 석탑”

 

김희태

 

“문화재 표석에 ‘개선사지 석탑’이라 새긴 것이 있어요. 개선사지 석등 근처 개선동마을 폐가에서 2005년 확인되었어요. ‘조선총독부’라 표기되어 있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요. 석등과 함께 석탑이 있었던 듯 합니다.”

 

담양군청의 윤재득학예사(문화재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함께 한 최인선교수(순천대)도 “개선사지 석등을 찾으려니 개선사지 석탑이라고 뜨더라”고 한다. 문화재현장에서 가끔은 뜻밖의 정보를 듣기고 한다. '석등일텐데.. 그래도 ‘石塔’ 글씨가 있으니 그런 얘기를 했겠지.‘ 개선사지석등 주변에 개선사지 석탑이 있었다는 것인데. 어찌된 것일까. 어디에 있었을까.

 

보물 제111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 주변지역 시굴조사 현장이다. 2018년 5월 4일 금요일 14:00. 오래전부터 논의가 있어 왔는데 드디어 이루어져 학술발굴을 실시한 것.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 593-2번지 일원 4,533㎡. 조사기간은 2018년 4월 26일~5월 8일(실 조사일수: 8일). 조사기관은 (재)대한문화재연구원(원장 이영철)

 

지금까지 두차례 조사가 있었다. 먼저, 2001년 조사는 석등 주변과 간이주차장 설치 예정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유구나 유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전남대학교박물관 조사. 그리고 2011년 지표조사. 석등 북쪽 경작지에서 기와·자기편 소수 확인. (재)불교문화재연구소 조사.

 

이번 조사가 학술조사로서 사실상 본격적인 첫 조사. 2001년 시굴조사 때 석등 앞 부분 동서로 얕게 트렌치 조사를 했는데 유구확인은 안된 것. 이번에는 7개소의 트렌치 조사를 했다. 축대와 석열, 건물지(기단, 적심), 수혈, 대지 조성층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통일신라~고려시대까지 고른 출토양상을 보인다. 연차적인 전면 발굴조사, 문화재 구역 확대, 사지의 문화재 지정 검토, 개선사 관련 자료의 수집과 해석 등 여러 논의가 있었다.

 

조선후기 읍지류와 고지도에서 “개선사(開仙寺)” 기록이 있고 그 이전 기록에서는 “개선사” 사명 기록은 잘 찾아지지 않았었다. 함께 참여한 진정환 연구관(국립광주박물관)이 혜거국사의 비에 개선사에서 출가한 기록이 있다 하였다. 다음 기록이다.

 

건화(乾化) 갑술년(신덕왕 3, 견훤 23, 914) 봄에 우두산(牛頭山) 개선사(開禪寺)에 가서 오심(悟心) 장로를 예방하고 불법에 귀의할 것을 청하여, 장로가 가상히 여기고 사랑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니 이때 나이가 16세였다.(乾化甲戌春 往牛頭山開禪寺 謁悟心」長老 請歸佛 長老嘉愛 爲之薙染 時 年十六)(「갈양사혜거국사비(葛陽寺惠居國師碑)」,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경기도 화성 현 용주사의 원래 절이던 갈양사에 있던 혜거국사(惠居國師, 899~974)의 비이다. 최량(崔亮)이 짓고 김후민(金厚民)이 써서 994년(고려 성종 13)에 세웠다. 비석은 없어지고 탁본문만 전한다.

 

‘開禪寺’로 표기되었고 ‘우두산(牛頭山)’에 대해서도 찾아 보아야 한다. 이 기록에 이어 “3년이 지나 금산사(金山寺) 의정(義靜) 율사의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라 하여 개선사(開禪寺)와 금산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일거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우두산 (牛頭山)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거창, 춘천, 함흥에 나온다. 또 다른 기록으로 권적(權適, 1094~1147)의 묘지명에 있는 “개선사(開善寺)”도 있다. 이곳 “개선사”와는 거리가 있을 듯하다.

 

석등 자체에 새겨진 명문 기록도 매우 중요하다. 868년과 891년 두 가지 기록이다. 황호균의「개선동 석등 명문고(開仙洞 石燈 銘文考)」(<불교문화연구> 제7집,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0)에 자세하다. 국역문을 인용한다.

 

함통(咸通) 기사

경문대왕님과 문의 황후님, 큰 공주님께서는 석등 2개를 불 밝히시길 원하셨다. 당나라 함통 9년(경문왕 8년, 868년) 무자해 음력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고자 전임 국자감경인 사간 김중용이 유량(등유)의 업조(경비)로 (사용할) 3백석을 보내 오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 건립했다.


 

용기(龍紀) 기사

용기 3년(사실은 대순 2년, 진성여왕 5년·891년) 신해해 음력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은 경조(서울에서 보내 준 조, 서울에 보내야 할 조) 1백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 두 사람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 대□에 있는 물가의 논 4결|く5배미며, 동쪽은 영행토이고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지택토이고 서쪽은 개울이다.>과 물로부터 멀리 떨어진 논 10결く8배미며, 동쪽은 영행토이고 서쪽과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지택토이다.>을 영구히 샀다.

 

현장 자문회의 토론을 마치고 봉선동 서재 다다를 무렵 '카톡'으로 사진이 왔다. 자세히 보니 앞면에 “寶物第百八十二號 開仙寺址石塔”, 뒷면에 “朝鮮總督府” 음각문이 뚜렷하다. 분명 “석탑”이다.

 

우선 지정 당시 기록을 찾아 보았다. 조선총독부 관보. 표석에 새겨졌다는 보물 182호와 같은 번호는 “개선사지석등”이다. 담양군 남면 학선리 593번지 소재. 소유자는 국유. 의외로 싱겁다.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석등”은 보물 제182호. 현지에서 확인된 “석탑” 표석도 보물 제182호. 어쩌면 “석등”을 “석탑”으로 오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석탑”이란 표석으로 “석등” 앞에 세웠다가 그 뒤로 언젠가 주변에 묻게 되었다가 사진으로 남은 것.

 

일제강점기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에 따라 문화재를 지정하기 시작했다. 보물은 처음에 153호까지 지정했다. 1934년 8월 27일. 제1호는 경성남대문(京城南大門). 그 이듬해 1935년 5월 24일 208호까지 53건을 지정했는데, 이때 “개선사지석등”도 보물 제182호로 포함된 것.

 

일본 강점 시절의 보물 등 문화재 지정 건은 제헌헌법 부칙 규정에 따라 그대로 승계된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보물” 용어가 “국보”로 바뀐다. “개선사지석등”도 국보 제182호. 지금의 보물중의 보물인 국보 개념과는 다른 용어. 이 당시는 북한 소재 문화재도 그대로 일제기의 지정번호가 유지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다시 번호를 부여 받은 것이 지금의 보물 제111호 개선사지석등. 1963년 1월 21일. 최근 문화재명칭부여기준에 따라 담양 개선사지 석등으로 변경.

 

이 곳 개선동은 백제시대 굴지현(屈支縣)에 속했다. 굴지현 권역은 지금의 창평면, 고서면, 남면 지역. 현 담양읍 일원이 중심이던 추자혜군(秋子兮郡), 금성면 중심의 율지현(栗支縣)과 함께 독립 고을로 있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굴지현은 기양현(祈陽縣)으로 고친다. 이 때 추자혜군은 추성군(秋城郡)으로, 율지현은 율원현(栗原縣)으로 고친다.

 

통일신라 당시 군현 편제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주(武州)가 상급 행정 단위이고 개선동이 속한 기양현은 무주 직할현이 된다. 추성군은 율원현을 거느린다. 그러므로 개선동 석등이 처음 세워질 무렵(9세기 중엽)에는 무주 기양현(祈陽縣)에 속했던 셈. 같은 담양권이지만 무주-기양현, 무주-추성군-율원현 편제였다.

 

고려 초기(940년)에 기양현은 창평현(昌平縣)으로 바꾼다. 추성군은 담양, 율원현은 원율이 된다. 이후 개선동은 전라도 창평현-창평현 내남면 개선동(1789년)-남원부 창평군 내남면(1895)-전라남도 창평군 내남면(1896)-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1914년)에 속한다.

 

1914년에는 창평군 내남면(內南面)과 외남면이 합해져 담양군 남면이 된다. 이 때 창평군 내남면의 개선동, 외지곡(外芝谷) 학미동(鶴尾洞)과 광주군(光州郡) 석제면(石堤面)의 덕의리(德義里) 각 일부가 합해져 담양군 남면 학선리(鶴仙里)가 된다. 그래서 개선사석등이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1935년에는 남면 학선리.


오래도록 논의만 있다가 올해 성사된 담양 개선사지 석등 주변 학술발굴조사 현장을 다녀온 소회이다. 앞에서 말한 연차적인 전면 발굴조사, 문화재 구역 확대, 사지의 문화재 지정 검토, 개선사 관련 자료의 수집과 해석을 하나씩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주변에 대한 학술지표조사나 관련 기록과 인물, 승려, 종파와 사상, 왕실과 관계, 지역 세력, 사격(寺格) 등에 대한 내용도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개선사지 석등 명문(황호균, <개선동 석등 명문고>, 불교문화연구, 제7집,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0. 125쪽)  


담양 개선사지 석등 주변 시굴조사 전경 제5Tr, 제7Tr

담양 개선사지 석등 주변 시굴조사 전경, 석등과 제5Tr


보물 표석 뒷면('조선총독부' 명문)(2005년 개선동 폐가에서 확인. 담양군청 윤재득 학예사 제공)

보물 표석 앞면 하부('개선사지 석탑' 명문)

보물 표석 앞면 상부('보물 제백팔십이호' 명문)



 

개선사지석등 보물 제182호 지정 고시 관보(조선총독부 관보 제2507호, 1935.5.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