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49 - 여수 진남관 중건과 전라좌수사 이제면, 책응도감 정성

향토학인 2018. 4. 5. 08:51

인지의 즐거움149

 

여수 진남관 중건과 전라좌수사 이제면, 책응도감 정성

여수 진남관 문헌 기록 자료(2)

 

김희태

 

진남관(鎭南館)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전라좌수영)의 객사이다. 원래 1599(선조 32)년에 지었다가 불에 타서 1717년~1718년 중건하였다. 조선시대 목조건물로는 최대 규모이다. 2001년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전라좌수영에 관한 기록은 정리되고 있지만, “진남관” 자체에 대한 기록은 많지가 않다. 이미 알려진 자료, 새로 찾은 자료를 잘 살펴 가면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몇가지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국보 304호 여수 진남관 보수정비사업 기술지도단회의(2018.2.22.(목))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하면서 찾은 자료를 두차례에 걸쳐 제공하고 다시 확인하였다. 일부는 알려진 자료이다. 일종의 “재해석”인 셈이다.

 

1717년 진남관 중건 당시 절도사는 이제면(李濟冕, 1652~1718)이다. 이제면은 1716년(숙종 42) 8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718년(숙종 44) 8월까지 재임하였다. 전라좌수사 선생안에 따르면 1718년(숙종 44) 8월에 후임 절도사 민제장(閔濟章)이 부임한 기록이 있어 이제면 절도사가 8월까지 재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면은 전라좌수사 재임 때 진남관을 중건하였다. 진남관에는 이제면 수사와 관련된 기록물 2건(현판)이 있다. 이제면이 글을 지은 <진남관중건지(鎭南館重建識> 현판과 당시 진남관 중건 참여 인명록(監董錄)을 기록한 현판으로 북편 창방에 걸려 있다.

 

<진남관중건지> 현판 내용은 <여수 진남관 국보신청 자료집>(전라남도·여수시, 2000), <진남관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01)에 소개되어 있다. 인명록은 <진남관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01)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1718년 진남관 중건 때 기록물 현판 1건이 더 있다. 지은이 인명을 알 수 없는 상량문이다. 이를 포함하여 1718년 진남관 중건 때의 자료에 대해서 자세한 정리를 따로 하고 있다..

 

<진남관 중건지> 끝에는 ‘숭정 기원후 구십일년 무술 중하 전의 이제면지(崇禎紀元後九十一年戊戌仲夏全義李濟冕識)’의 연기가 있어 1718년(숙종 44)년 5월에 중수기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숭정(崇禎)”은 중국 명(明)나라의 마지막 연호로서 명을 대신해 청(淸)나라가 들어 선 뒤에도 조선에서는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표기하고 “그 이후 OO년[後OO年 ] 또는 "O주갑OO간지[O周甲干支]”로 표기하였다. 보통 유가나 불가, 민가 등에서 사용하였다. 불가에서도 국왕이나 세자를 위해 축원하는 글에는 청나라 연호를 썼다.

 

진남관 중수기에 “숭정” 연호를 표기한 것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군사 시설이지만은 왕권을 대행하는 좌수사와 관련되는 관아 시설물에는 청나라 연호를 써야하는데, 명의 연호가 쓰여 있어서이다. 아마도 이 현판의 내용은 당대 기록물이기는 하지만 현판으로 게첨한 것은 후대에 하지 않았나 싶다. 중하(中夏, 仲夏)는 한 여름이란 의미로 5월을 말한다.

 

이 기문에 따르면 1664년 절도사 이도빈 개수, 1716년 화재, 1717년 봄 이제면 절도사 부임, 중건 계획, 1717년 가을 기와 마련, 겨울 나무 마련, 1718년 5월 완공 등을 알 수 있다. 전라좌수사 선생안에 1716년 8월 부임으로 나오는데 이 기문에서는 “정유년에 수사로 부임하여 이곳에 와 살펴 보니 불에 탄 곳이 보기에 참혹하여 즉시 중건을 도모하여(余於丁酉春 添按于玆 燼墟慘目 卽謀所以重建)”라는 기록이 있다. 1717년 봄에 부임했고 부임과 함께 바로 중건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 한편 <승정원일기>와 <숙종실록> 1718년 4월 5일조(계미)에는 전(前)의 일로 전라좌수사 이제면의 파직을 청하는 사헌부의 문서(達)에 따라 파직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찬 기록의 “4월 파직”, 진남관 중수기문의 “5월 찬문(仲夏識)”, 중수인명록의 “무술 유월(戊戌六月) 등 서로 중첩되는 측면이 있다. 이에 더하여 중수기문의 연호 “숭정(崇禎)”, 부임 연도 등 더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제면(李濟冕, 1652~1718)의 자는 여즙(汝楫), 진위장군(振威將軍) 행용양위부사용(行龍驤衛副司勇) 이만기(李萬期)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년)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무과 병과(丙科) 31위(41/65)로 입격하였다. 부장, 선전관, 인의(引儀), 감찰, 곡성현감(16905~1692.9 재임), 하동현감, 군기시 판관(1701년), 박천군수(1706년), 북도 우후91707년), 충주 영장91710년), 장흥부사(1712년, 통정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1716.8.~1718.8 재임, 절충장군) 등을 지냈다.

 

진남관에 있는 또 다른 현판은 무술년(1718년) 진남관 중건 인명록(監董錄)이다. “무술 6월”이라 하여 연호 표기 없이 간지만 쓰고 있는데 “이제면” 인명으로 보아 1718년 6월 중건 때 참여한 책임자들의 인명록이다. 이제면 좌수사의 <중수기문>으로 보아 1717년 여름부터 준비하여 1718년 5월 완공, 6월 감동록을 쓴 것으로 보인다. 목재의 마련에서 건립까지 1년여가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간지에 이어 좌수사를 수상국으로 표기하여 인명을 적고 이어서 차례로 우후와 군관을 행을 바꿔가면서 기록하였다. 우후는 권수봉이다, 군관은 정성 등 11인이다.

 

특히 “군관 정성 책응도감(軍官 鄭晟 責應都監)”, “김시좌 성조도감(金時佐 成造都監)”이라 하여 직임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책응도감은 진남관 중건 총 감독, 성조도감은 건물 도감으로 볼 수 있다. 하급 무관인 군관 신분으로 진남관을 중건한 기술책임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성(鄭晟)”이 주목된다, 하급 무관은 기록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인근 전라좌수영 동헌터 발굴(전남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에 “鄭晟”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진남관 중건 책응도감인 정성이 진남관 중건을 전후하여 동헌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남관 중건 인명록(감동록)

戊戌 六水月

相國 李濟冕

虞侯 權壽鳳

軍官 鄭 晟 責應都監

李明咸

李雲冕

金時佐 成造都監

李景仁

李斗鎭

李潤明

南益寬

愼榮植

金鳴善

洪禹圭





진남관 중건 인명록(監董錄)(2018.2.22) - “戊戌(1718년) 六月 水相國 李濟冕 .... 軍官 鄭晟 策應都監...”


전라좌수영 동헌터 발굴(전남문화재연구원) 와당 명문(여수시청 제공) - “(鄭)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