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43 - 통학열차와 나주역·광주역,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1929년

향토학인 2018. 3. 2. 22:02

인지의 즐거움143

 

통학열차와 나주역·광주역,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1929년

-역과 철도, 역사따라 풍물따라2-


김희태

 

철도와 역은 대규모 물산과 각지의 사람들의 이동에 큰 구실을 한다. ‘통학’과 ‘통근’은 또 하나의 사회 풍습이 되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근대기에도 도시로 몰리기 마련.

 

나주 등 전남권 중소도시에서는 광주로 오갔다. 이 가운데 역사적인 의미가 큰 곳이 나주역과 광주역이다. 1929년 11월 3일 전국 119개교 5만 4천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민족의 독립을 외치며 총 궐기했던 민족해방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나주역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출찰구를 벗어난 한·일 기차 통학생들의 충돌사건. 기차통학생이던 광주중 일본 학생 수명이 같은 통학생인 광주여고보 한국인 여학생들을 기차안에서 희롱하고 댕기머리를 잡아다니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를 본 여학생의 동생이 나주역에 도착하자 일본 학생을 불러세워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 것.

 

당시 일인 학생들이 ‘센징’ 운운하자 민족감정이 폭발해 한인 학생 30여명과 일인 학생 50여명이 난투극을 벌린다. 때마침 순찰하던 일인 경찰은 한인 학생을 오히려 힐문.

 

다음 날 31일에도 광주행 상학차(上學車)와 나주행 하학차에서 시비가 벌어졌고, 일인 차장은 한인 학생만 통학권을 압수하는 등 일인 학생을 두둔.

 

11월 1일 오후에는 하학차가 광주역을 출발하기 직전 일인 광주중 학생 30여명이 전날의 복수를 하겠다고 광주역으로 몰려 온 것. 한인 학생 20여명은 황급히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 목책을 사이에 두고 대치.

 

양측의 긴장은 11월 3일 폭발하고 만다. 일제의 소위 4대명절의 하나라는 명치절. 일요일인데도 소집된 광주고보생들은 일본 국가 제창시 침묵으로 저항하고 행사가 끝나자 수십명씩 거리로 뛰쳐 나간다. 편파보도를 한 신문사에 항의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고, 일인학생들은 광주역 쪽으로 도주하고.

 

다시 광주역 일대에서 한인 통학생, 광주고보 기숙사생, 광주농업학교생 등 한인 학생들과 일인 학생이 충돌한다. 손에는 야구배트와 농기구, 각목, 장작개비. 군중들이 몰려들고 광주경찰서에는 전 경찰력과 기마경찰대, 소방대까지 출동명령이 내려진다.

 

양측 2백여명의 학생 수는 대등했으나 사기는 한인 학생이 압도적 우위. 일인 학생들은 패주. 다시 학교에 돌아와 일제 타도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해 다시 시가지로. 전국으로 퍼져 119개교 5만 4천여명 참여하는 전국학생독립운동으로.

 

물론 통학열차에서의 한·일 학생 충돌 자체가 발화선이 되기 했지만. 이미 항일 민족감정이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3·1만세운동과 독서회 등의 의식의 성장, 일제의 경제 침탈 등.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로서 2000.12.29일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38호. 광주역은 대인동 현 소방서 부근이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야겠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38호. 2000.12.29일 지정.(사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