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40 - 2011년 9월의 <인지(仁智)의 즐거움따라001>, 그 이후

향토학인 2018. 1. 3. 09:57

인지의 즐거움140

 

2011년 9월의 <인지(仁智)의 즐거움따라001>, 그 이후

-<17세기 고전용어, ‘농악(農樂)’을 만나다> 후사(後史)-

김희태

 

2011년 9월 "인지의 즐거움따라"라는 제명으로 글을 올렸다. 그 첫번째 글이 "17세기 고전용어 '농악(農樂)'을 만나다". 장흥선비 남파 안유신(1580~1657)의 '流頭觀農樂' 시를 보고 풀어 본 것.

 

안유신의 시는 1996년 <장흥문집해제>(장흥문화원, 1997.12) 집필 때 확인했다. 당시 장흥문화원(원장 청헌 이상구님)에서 장흥 선인들의 문집을 모으고 해설하는 사업을 했는데, 해제를 정리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복제본 문집 한질을 받은 것이다. 네질인가 제본을 하여 문화원, 군청, 전남문화원연합회 등에 보관, 제공했다고 한다. 인쇄 실비만 편성되어 있어 어렵게 부탁을 해 왔지만, 지역의 자료를 정리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어 들었다. 동학 후배들이 편집(서남문화연구소 김경옥, 선영란)과 목차 입력 작업(목포대 사학과 석사과정 장선영, 안대희, 나선하) 일부를 도왔고. 불철주야 해제 작업을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2011년 9월 들어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을 글로 풀었다. 초고를 작성하고 다듬어 2011.09.08 페이스북에 올린다. 다시 손 보아 블로그에 올렸다. 2011년 9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농악' 용어의 출신이나 나이를 성큼 올려 놓은 새로운 자료" 등 여러 댓글이 달린다.

 

2011년 들어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쓰게된 동기랄까? 광주-무안 남악신도시 도청간 고속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 스마트폰 시대에 맞는 일감을 찾다가 ‘인지(仁智)의 즐거움 따라’ 연작을 생각하게 된 것. 1주일 한편 정도. 스마트폰의 메모기능은 1,500자 입력이 가능함으로 분량은 그 정도. 메모기능은 바로 이메일로 보낼 수 있고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등에 올릴 수 있는 점도 장점. 대상은 오래전부터 보고 모았던 글이나 용어 가운데 궁금증이 있던 것을 나름데로 풀어 가면서 생각날 때마다 정리하는 것. 일상사나 강의 때 많이 이야기 했지만 가급적 새로운 것으로. 스마트폰은 한자 입력 기능은 아직 없어 원문 입력은 컴퓨터에서 따로 하고, 원전 제시가 필요한 경우에는 이 또한 스마트폰 사진촬영 기능을 이용하고. 1번을 올리고 보니 1,000자 정도 된다. 문제는 시문 국역이다. 사료의 해독은 자주해 보았지만, 한시는 자주 해보지 않은 것이라. 그래도 지금의 내 수준에서 느낀대로 우리말로 옮겨 보는 것도 공부의 한 방법이리라. 그리고 느낌을 써 보는 것도. 이미 국역된 것은 출전을 밝혀 느낌을 적어보고...

 

 

출퇴근 시간 고속버스에서의 스마트폰을 통한 시간 활용.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시대 적응'이 현안이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짠한 자화상. 뒤에 '앱'의 종류도 진화되어 한자 입력('TS한글키보드'), 1,500자 이상의 장문 입력('컬러노트') 기능의 어프리케이션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DB 자료를 '화면 캡쳐'로 활용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처음 ‘인지(仁智)의 즐거움 따라’를 블로그의 한 주제로 하여 연작을 생각했는데, 뒤에 ‘인지(仁智)의 즐거움 '으로 줄인다. 출처는 『동문선』(제68권). 이 책 실린 정명국사 천인(1205∼1248)의 「천관산기」가운데 ‘우뚝 솟은 산을 구경하고 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듣고 그 정서를 기쁘게 하려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산수 사이에 붙이고 인지(仁智)의 즐거움을 따라서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道)에 이르려는 것이었다.[非唯目嵯峨耳潺湲 務快其情而已 盖寓意山水之間 從仁智之樂 將復其性而適其道也]’라는 글에서 차용하여 ‘산수(山水)-인지(仁智)-향토(鄕土)’로 연결하여 향토학, 인문학의 즐거움을 찾고 따라 가고자 함이다.

 

 

시문 국역이 걱정이라 했는데, 안유신의 '流頭觀農樂' 초역문을 적는다. 9월에 처음 올린 글에 쓴 것이다. 뭔가 막혀 있고 답답하다. 연결되지 않는다. 나중 글은 전남대 박명희선생에 다듬어 보내 준 역문이다. 2011년 10월 3일. 고전문학 한시 전공을 한 분답게 부드럽게 읽혀졌다.  流頭觀農樂 /  匆旗一建颺東風  擊鼓郊原舞綵童  邊事已平農事早  始覺吾君聖德鴻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김희태 초역)

 

 

기 하나 우뚝 세우고 동풍이 휘몰아 불 때

너른 들에 색옷 입고 북치며 뛰노는 아이들

변방은 이미 평안하고 농사는 철이 이르지만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인지 비로소 깨달았네.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박명희 감수)

 

우뚝 선 한 깃발에 동풍이 휘몰아 불 때

너른 들에 북 치며 색동옷 입고 너울너울

변방 일 이미 평안하고 농사철 빨라지니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을 비로소 깨달았네

 

  

그해 9월과 10월,  예의 자료를 공유한다. 민속이나 무형, 향토학을 공부하는 동학 제현들에게 전자우편으로 "인지의 즐거움따라1 - 17세기 고전용어, ‘농악(農樂)’을 만나다" 글을 보낸다. 많은 분들이 답글을 보내온다. '환호'하는 분도 있다. 인용해도 되냐는 질문도 있다. 실제 학술 논문에 인용한 학자도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살짝 출처없이 활용된 경우도 있었다. 일종의 '도용'이다. 만날 때마다 '자랑' 겸해 여기 저기 알리던 선배도 있다. 향토민속학자 해산 강현구형님. 여러 답글 가운데 일부와 학술지에 인용한 글을 보자.

 

 

농악에 대한 기록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장흥 사람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이란 시다. (초역문 시 인용) 위의 시는 안유신이 농악 공연을 보고서 남긴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본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보성에서 연행되었던 농악을 보고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두가 음력 6월 15일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시는 농사와 관련된 두레굿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이 시를 소개한 김희태선생도 ‘교원(郊原)’을 너른 들로 해석하고 농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심사를 거론한 바 있다. 이 시에 나오는 격고(擊鼓)과 채동(綵童)이란 말에서 신나게 북을 치는 모습과 색옷을 입고 춤을 추는 농악의 모습이 연상된다. 들판에 세워진 깃발이 동풍이 휘날리고, 색옷 입은 무동이 북을 치면 흥겹게 뛰노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경엽 글, <화순 한천농악>, 전라남도·국립민속박물관, 민속원, 2011. 19쪽~20쪽)

 

 

“앗, 선생님. 이렇게 메일을 받게 되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전통문화에 대한 용어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색된 것은 사실인데 적잖은 용어를 일제강점기 때 왜곡되거나 한자화 했다는 식으로 치부하는 게 마뜩치가 않더군요. 제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안동 지역 문집 중에 '車戰'이라는 제목의 한시가 있습니다. 대보름날 밤에 달 아래에서 젊은이들이 패를 나누어 노는 모습을 그린 시인데 그 이전에는 차전이 '동채싸움'을 최근에 한자로 부른 것이라 알고 있었거든요. 농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는 큰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래서 한문 공부 많이 시켜야 되고, 많이 해야 되나 봅니다.”(임형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선생님의 고견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농악이라는 명칭이 일제 이전에도 있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근데 그 분이 말한 것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를 보여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농악이라는 명칭 자체의 역사성에 대해서도 검토해보지 않았을 만큼 농악 연구가 일천합니다. 실제 연구자가 손에 꼽힐 정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고견 부탁드립니다.”(송기태박사,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글에는 초역문이 올라 있다. 또 한가지 조심스러운게 연행지역을 '보성'으로 언급한 점. 블로그에 처음 올린 글에 '보성선비 남파 안유신'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 듯하다. 그런데 '장흥'에서 생활하면서 '보성'도 넘나들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장흥 선비'인 셈이다. <장흥읍지 정묘지>(1747년) 부내방(府內坊) 남행(南行)조에 "안유신은 (안) 중묵의 아들로 호는 남파다. 경학에 밝고 행실(行實)이 착하여 추천으로 현령에 임명되었다. 유고집이 있다.(安由愼 重黙子 號南坡 以經行 薦除縣令 有遺集)"는 기록도 있어서이다.

  

 

처음 소개할 때부터 의문점이 있기도 하였다. 양기수선생(장흥향토사회)이 "‘流頭觀農樂' 에서의 '농악'은 요즘 국어사전에서 단어화한 '농악'의 뜻일까를 의심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유두날 농사꾼들의 즐거움을 보다"라고 해석해 본다면 훗날 이를 단어화 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합니다.(2011.09.16)"라는 글을 보내 왔다.

  

 

이 무렵 또 다른 여러 '농악' 용어를 본다. 새로 찾은 것이다. 안유신의 시보다는 좀더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충청도 서천 유생 최덕기(崔德基, 1874~1929)의 일기 가운데 1894년 9월 어느날조에 “밤 삼경에 촌민이 많이 이동하면서 농악을 두드렸다(夜三更村民大動擊農樂)”라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김제출신 근대학자 이정직(1841~1910)의 저서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전북 유형문화재 제149호, 지정명칭 석정 이정직유저 유묵) 제5책에 ‘農楽’ 제목의 시가 있다. 5언 44구의 장편시이다. 단연 압권이다. 김제문화원에서 국역문집을 발간했다해 김제까지 한걸음에 달려 갔다. 그리고 김제문화원 발간 문화원지(<성산문화> 24)에 기고를 했다. 이정직의 '농악'시와 안유신의 시를 글로 쓴 전후 확인한 6종인가에 대해서 확인 경위와 출처, 내용을 정리한 글. 2012년 4월 2일 보냈고 그 해 연말에 실린다.

  

 

 ○ 김희태, 「고전 용어 ‘농악(農樂)과 석정 이정직의 한시 ‘농악」『성산문화』제24, 김제문화원, 2012, 71~89쪽.

  

 

새로 찾은 농악 시 가운데 한 수를 보자. 1914년까지 살았던 보성 선비 일봉 이교문(日峯 李敎文, 1846~1914), 의 시. 농악의 여러 유형 가운데 두레굿의 경관이다.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김매러 갈 때나 김맬 때, 그리고 김매고 돌아올 때, 또한 호미걸이와 같은 축제를 벌일 때 치는 농악.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수십명이 짝을 지어 호미질을 급히 하고, 농부가를 부르면서, 북을 울리는 소리에 풍년과 태평성대를 기원한다. 공동체의 살아 있는 모습이다.

 

 

 

농악 農樂

북을 울리는 농악소리에 답답한 심정 열리고 

   社鼓聲中湮鬱開

태평스런 술잔에 일만 가정이 취했다네 

   萬家同醉太和盃

수십명이 짝을 지어 호미질 급히 하고 

  十千鋤耦趨功急

한 두사람 전관이 감독하려 찾아 왔어 

  一二田官掌職來

늙은이들 환호하며 농부가를 부르며 

  白首懽呼歌力穚

황관쓰고 둘러 앉아 이끼를 쓴다. 

  黃冠匝坐掃班苔

시인들 농사꾼의 풍악을 만들 줄 아니 

  詩人解撰農郊樂

소원은 태평세대 해마다 돌아왔으면 

  但願昇平歲歲回

 (<일봉유고(日峯遺稿)> 권1)

  

17세기 중반의 '농악' 시를 소개하면서 고전용어라 표기한 것도 언급할 대목이다. '농악'은 우리의 전통 문화용어가 아니며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 일종의 조어(造語) 형식으로 '일인학자' 또는 '관변인사'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게 일반논이었다. 개론서에도 실렸고, 무형문화재 지정 명칭도 '농악' 을 '풍물'이나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그런데 '농악'이 16세기부터 용례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고전용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정직(1841~1910)의' 농악' 시는 1910년 이전의 농악 문화현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유산이다.

 

이러한 용례 확인과 제안이 계기가 되었던지, 농악 관련 문헌을 강독하는 모임(이경엽, 송기태, 한석중, 김희태 외)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농악문헌 역주자료집>(가칭)이 간행되는 날 몇 줄 보태리라.

 

* 2011년 9월 첫글을 올린 뒤 몇번의 추기(追記)를 그때 그때 올렸는데, 하나의 글로 갈무리하다.(2017.12.21)

 

* 처음에는 150~200건 정도로 생각하고 비슷한 유형끼리 묶어 일련번호를 부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번호가 들쭉날쭉이어 오히려 혼란스럽다. 2017년 12월 들어, 올린 순서대로 번호를 다시 붙이고 있다.   

 

 

이교문 일봉유고 - 농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