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39 - 월남사 진각국사비, 국사의 입적 다비처 월등사(月燈寺) 어디일까?

향토학인 2018. 1. 2. 03:00

인지의 즐거움139

 

월남사 진각국사비, 국사의 입적 다비처 월등사(月燈寺) 어디일까? 

김희태

 

강진 월남사 진각국사비문을 그 어느 때보다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늘 보면서 ‘많이 보아 온 내용’, ‘잘 알 수 없는 기록’ 따위가 오락가락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월등사(月燈寺)이다. 진각국사가 자주 갔고 입적하고 다비를 했던 곳이다. 비문 기록은 뚜렷하지만 어디쯤인지에 대해서는 분분한 의견뿐이다. 지리지나 읍지 등 여느 기록에도 위치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각국사는 왕명에 따라 단속사 주지를 임명 받지만 대부분 본사(수선사)에 있었다고 한다. 단속사, 수선사와 함께 비명에서 드러나는 사찰이 월등사(月燈寺)이다.

 

월등사는 진각국사비에 2회, 진각국사 시집인 <무의자시집>에서 1회가 확인된다. <무의자시집>에는 고종 8년(1221) 월등사에 들러서 방장(주지), 승평군 사군 품좌, 백운자와 화답 창수(唱酬)하는 시가 있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고종 21년(1234) 봄에 월등사로 옮겨 거처(비명에는 “사처(徙處)”로 표기)하고 6월 26일 입적하자 바로 그 다음 날인 27일 월등사 북봉에서 다비를 한다. 이 월등사는 수선사와 가까운 지역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기록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한편, <동문선>에 석식영암(釋息影菴)이 지은 「월등사 죽루죽기(月燈寺竹樓竹記)」가 있어 ‘월등사’ 사명이 한 곳 더 확인된다. 내용중에 “화산(華山) 월등사 서남쪽에 죽루(竹樓)가 있고, 누의 서편 언덕에 대나무 수천 그루가 솟아서 절의 후면으로 둘러 있는데 빽빽하였다.”고 하여 화산 지명이 나온다. 이 화산은 “화산(花山) (강화도호)부의 남쪽 5리에 있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강화도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기문상의 설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편, 석 식영암은 월남사와도 관련은 있다. 고려말 월남사에 주석했던 ‘연감’이 법명으로 알려져 오기 때문이다. 식영암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고 법명이 연감(淵鑑)이며 식영감으로도 부른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 문인으로 <동문선>에 13편의 산문 작품이 올라 있다. 강화도의 선원사와 용장사(龍藏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의 장로(長老)와 주지(住持)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화상(大和尙)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저서(작품)로 식영암집, 정시자전(丁侍者傳)이 있다. 원래 식영암은 진각국사의 제자인 운기(雲其)라는 늙은 승려가 팔전산(八巓山 : 고흥 팔영산) 만행사(萬行社)의 동쪽에 지은 암자이다. 이름을 식영(息影)이라 부친 것은 그림자가 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취가 담장 밖을 넘지 않으며, 또 좌선(坐禪)한다고 앉았으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는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운기가 세운 이 식영암이라는 암자에 연감(淵鑑)이 거처하며 암자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한편, 석 식영암은 충숙왕(忠肅王)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 혜(譓)로 출가(出家)했다가 환속(還俗)하였다는 주장도 있다.(채상식, 김건곤, 이종문, 김현룡 논문 참조))

 

 


'月燈寺' 기록 - 1221년 수창(酬唱), 1234년 사처(徙處)·입적·다비

  

진각국사는 고종 7년(1220) 단속사 주지로 부임한다. 그러나 주로 본사(수선사)에서 거주하고 필요시에만 단속사에 머문다. 단속사 주지 부임 이후 행적으로 이듬해 고종 8년(1221) 2월 월등사에서 선사들과 수창한 題詠이 확인된다. 대선사의 선계로 올라 국왕의 요청으로 단속사 주지직에 있으면서도 수선사에 주로 거처하였고 또 월등사를 들른 것이다. 그만큼 수선사와 월등사는 진각국사에게는 인연이 깊은 곳인 듯 싶다. <무의자시집>에서 ‘월등사’ 지명이 제목에 들어간 칠언절구 한 수가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혜심 지음, 이상원 옮김, 2013, <무의자 혜심 선시집>, 아라, 85쪽)

  

신사년 이월 초닷새 날 월등사에 들러 당두대로를 뵈었을 때 승평군 사군 품좌와 함께 밤에 앉아 얘기하였다. 죽헌이 남긴 시에 화제가 미치자 백운자가 먼저 선창하고 두 분 공께서 뒤에 화답하였다. 당두대로께서 나에게 운을 따라 지으라기에 마침내 거친 말로써 짐짓 엄명을 받들다(辛巳二月初五日 由月燈寺謁堂頭大老時 與昇平郡使君品坐夜話 話及竹軒留咏 蓋白雲子倡於前 而二公和於後 堂頭命予以賽韻 卒織蕪辭 姑賽嚴命 ; <무의자시집> 상, <한국불교전서>6, 51쪽)

  

   눈 두르고 바람 나부끼는 모습 사랑스러워 

      帶雪舞風形可愛 

   속 비워내고 절개 있어도 가볍지 않네 

       虛心有節道非輕

   노스님의 두각이 당연히 드러났으니 

       老師頭角當呈露 

   향엄이 대나무 울리던 소리 기다리지 않네 

       不待香嚴擊作聲

 

이 시는 고종 8년(1221) 월등사에서 방장(주지), 승평군 사군 품좌, 백운자 등이 진각국사와 수창한 내용이다. 방장이 있는 걸로 보아 어느 정도 격이 있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군(使君)'이란 왕명을 받은 관인이라는 뜻이 있어 현지에 부임한 승평군의 지방관인 듯하다. 승평군의 사군이 함께 하고 있어 월등사는 수선사 소재처를 관할하는 승평군 지역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진각국사는 고종 21년(1234) 봄에 월등사로 옮긴다. 수선사에 있을 때 이미 병이 들어 고종 20년(1233) 11월에는 왕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한 일도 있어 거처를 옮겨 정양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본산인 수선사와 가까운 거리인 탓에 옮겨 간 것 같다. 가깝지만 자주 왕래를 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진각국사비명병서」에 ‘사처(徙處)’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진각국사비명병서」에도 월등사 주지 마곡(麻谷)스님이 문병차 방에 들어가고, 진각국사 본인도 “노승(老僧)이 오늘 통증이 심하다”고 할 정도로 앓고 있었던 것이다. 수선사에서 월등사로 ‘사처’한 과정과 월등사에서 이어지는 선담을 들어 보자.

  

   다음 해인 고종 21년(1234) 봄 월등사(月燈寺)로 옮겼다. 그 때 주지인 마곡(麻谷) 스님이 문병차 방에 들어가니, 스님께서 말하되 “노승(老僧)이 오늘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마곡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아프십니까?”하니, 국사께서 게송으로 대답하되, “모든 고통 다가오지 못하는 곳에 상상 밖에 따로 한 건곤(乾坤) 있으니 그곳이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면 적정(寂靜)한 대열반(大涅槃)의 세계라 하리라”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을 들고 이르되 “이 주먹을 막아야 능히 선법(禪法)을 설할 줄 아나니, 너희들이 이를 믿는가?”하고, 드디어 손바닥을 편 다음 말하기를 “펴면 다섯 손가락이 참치(參差) 하리라”하고,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 이르기를 “합하면 다섯 손가락이 하나가 되나니, 개합(開合)이 자재(自在)하며 일다(一多)가 무애(無礙)하느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아직 권두(拳頭)의 본분설화(本分說話)는 거양(擧揚)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떤 것이 본분설화(本分說話)인가”하고,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고 가가대소하였다.(春 徙處月登寺 麻谷入室 師曰 老漢今日痛甚 谷曰 爲甚麽如此 國師以偈答曰 衆苦不到處 別有一乾坤 且問是何處 大寂涅槃門 師豎起拳頭云 遮箇拳頭也解說禪 汝等信否 遂展掌云 開則五指參差 握拳云 合則混成一塊 開合自在 一多無礙 雖然 如是未是拳頭本分說話 怎生是本分說話 卽以拳頭打窓一下 呵呵大笑 ; 진각국사비명명 병서(한국금석문영상종합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이하 같음)

  

진각국사는 월등사에서 입적한다. 고종 21년(1234) 6월 26일이다. 그런데 봄에 월등사로 사처한 이후에는 다시 본산인 수선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병이 지속되어 월등사에서 계속 머물렀고 이곳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년(1234년, 고종 21) 6월 26일 문인들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마곡에게 이르기를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이 오늘 몹시 아프다”고 되풀이 하니, 마곡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그리고 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맺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甲午六月二十六日 召門人囑事謂麻谷 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蕃噵什麼 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 師微笑跏跌而化)

  

진각국사는 월등사에서 화장을 한다. 「병서」에 입적한 다음날 월등사 북봉에서 다비를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입적한 날이 6월 26일이니 다비한 날은 6월 27일이다.

 

   다음 날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峯)에서 화장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본산(本山)인 송광사로 돌아갔다.(明日 茶毗於月燈寺之北峯 拾靈骨 還本山)

 

입적한 다음 날 바로 월등사 북봉에서 다비한 걸로 보아 입적도 월등사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비를 한 다음 영골을 수습하여 본산인 수선사로 모시고 돌아온다. 「진각국사비명병서」 기록상으로는 돌아 온 시점까지는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수습하고 바로 수선사로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월등사와 본산은 가까운 거리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어 고종 22년(1235) 5월 광원사에서 장사를 지내고 탑을 세운다. 순천 송광사 광원암에 승탑이 있고 ‘진각국사원조지탑(眞覺國師圓照之塔)’의 명문이 있다.(정선종, 2001, 70쪽.)

  

'月燈寺' 위치 - 1221년 승평군 사군(使君) 등과 밤새 수창(酬唱) 한 곳

 

월등사 관련 기록 검토를 통하여 고종 8년(1221) 월등사에서 진각국사는 승평군 관리 등과 수창을 하였고 고종 21년(1234) 봄에 옮겨 갔다가 6월에 입적하였음 알 수 있다. 그만큼 월등사는 진각국사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하겠다. 그리고 수선사와 가까운 승평군 관내일 거라는 점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이제 위치에 대해서 검토해 보자. 먼저 지금까지 월등사 위치를 언급한 자료를 인용해 보자.(혹시 월남사에 탑비가 세워지기 때문에 월남사 이명이 월등사가 아닐까하는 토론도 있었다. 그러나 송광사에서 월남사까지의 거리는 84km로 당시 교통 요건상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① 월등사는 아마도 순천 인근의 소찰이었던 것 같다. 진각국사가 입적했을 월등사는 문헌에서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순천의 방면(方面)으로 「월등(月燈)」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이곳에 있었던 소찰이 월등사였을 것임이 분명하리라 여겨진다.(민현구, 1973, 12쪽.)

  

   ② 월등사 : 위치와 창건주, 창건 연대 등은 미상하나, 순천 인근의 작은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순천 방면(方面)에 월등(月燈)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이 지은 「월등사 죽루죽기(月燈寺 竹樓竹記)」에 따르면 화산(華山) 월등사라 전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화산이 영춘(永春, 충북)·천안(天安)·온양(溫陽)·의흥(義興, 의성)·문경(聞慶) 등 여러 곳에 있다. 여기에서 화산은 전남지방에 있는 듯하다(<東文選> 권65).(이지관, 2000)

  

   ③ 월등사(月燈寺)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에 있는 절로서, 진각국사는 고려 고종 21년(1234) 6월 26일 나이 오십칠세, 법랍 삼십이년으로 이곳 화산 월등사에서 입적했다.(이상원 옮김, 2013, 85쪽.)

  

①과 ②는 순천에 있는 소찰, ③은 전라북도 화산면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②에서는 <동문선>의 「월등사 죽루죽기」에 언급된 화산을 전남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③은 화산이라는 면지명과 연관해서 추정한 듯싶다.

①과 ②에서 “순천 방면에 월등(月燈)이 보인다”고 했는데, 이 기록의 원전은 <대동지지>로, 순천 방면조의 “월등(月燈) : [순천 치소에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이다.”는 내용이 나온다. 교량조에는 : “월등교(月燈橋) : 북쪽으로 40리이다.”는 기록도 있다. 이 ‘월등’은 현재의 순천시 월등면 지역이다. <대동지지> 순천 방면조·교량조. 40리~60리 거리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km~24km 거리이다. 송광사에서 월등면사무소까지 거리는 32km이다.

  

<대동지지>보다 앞선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9년, 順天府 月登面조)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순천부 월등면조)에서도 ‘월등’은 확인된다. 월등면에는 24개 리가 속해 있다. 호구수는 270호 1,165구(남 564, 여 601)이다. 현재는 순천시 월등면이다.

 

  亇老峙, 望峙閭, 蟻谷閭, 堂山閭, 下斗之閭, 所乙洞閭, 中新閭, 上斗之閭, 葛田閭, 並雲閭, 文石閭, 栗枝閭, 永壽閭, 屯垈閭, 墻坪閭, 禾旨閭, 新基閭, 靑石閭, 別堂閭, 外別閭, 龍亭閭, 長善閭, 農谷閭, 九秀閭.

  

그리고 고흥군에도 ‘월등리(月登里)’라는 마을 이름이 있다.(<호구총수> 흥양군 대서면조) 현재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월등마을이다. 다만, 사찰명으로 ‘월등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순천시 월등면 땅이름 가운데 절과 관련이 되는 지명을 정리해 보자. <한국지명총람>(1982) 승주군 월등면 부분에 조사된 자료이다.

  

   계월리(桂月里)

     - 성적굴 : 외동 동쪽에 있는 들, 근처에 절이 있었음.

     - 절골 : 너독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농선리(農善里)

     - 구룡암(九龍庵) : 장선 북쪽에 있는 골짜기. 구룡암이 있었음.

     - 국사골(國師골) : 서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국사암(國師庵)이 있었음.

     - 중산골 : 도롱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중의 화장터가 있음.

   대평리(大坪里)

     - 불댕이(佛堂이) : 밤나무 서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佛堂)이 있었음.

   망룡리(望龍里)

     - 중산골 : 망룡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중 화장터였음.

   신월리(新月里)

     - 절골(사곡) : 시양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월룡리(月龍里)

     - 대흥사터(大興寺터) : 장척 북동쪽, 대흥산에 있는 절터.

     - 대흥산 : 장척 북동쪽에 있는 산.

     - 대흥삿골 : 장자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대흥사(大興寺)가 있었음.

  

순천 월등면의 절과 관련된 땅 이름 가운데 눈여겨 볼 곳은 농선리의 ‘국사골(國師골)’과 ‘중산골’이다. ‘국사암(國師庵)’이 있었고 ‘중의 화장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명은 근래에 조사된 것이라 고려시대의 국사-다비와 바로 연결시키려면 더 많은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다.

  

또 하나 살펴 볼 곳이 대흥사(大興寺)이다.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사세를 갖췄다고 보이는 기록과 유물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대흥사는 순천 월등면 월룡리 장척마을 뒤 봉두산에 있다. 지금은 폐허되어 터만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순천도호부의 종이를 공급하던 지소(紙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이다.(최인선, 2005·2009, 송은석 2013)

 

이 절은 처음에는 용대암(龍臺菴)이라 했다는 기록이 <승평지(昇平志)>(1618년)에 보인다. 용대암은 순천부 북쪽 50리 거리로 뒤에 대흥사(<중간승평지(重刊昇平誌)>, 1729년)라 했는데, <신증승평지(新增昇平志)>(1881년)에 “지금은 폐해졌다(今廢)“는 기록이 있어 조선 말기까지 절집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각 종 지도류에 대흥사가 그림으로 표기되고 있다.(<순천 월등>)

  

그러나 이 대흥사 역시 고려시대 국사-입적-다비와 연관시킬만한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의 사지>(2011) 조사에서 순천시 월등면 신월리(新月里) 사지 1·2, 월룡리(月龍里) 사지(전 대흥사 터) 등이 조사 되었다. 순천 월등은 물론 조계산 일원 등 지속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진각국사의 입적 다비처 월등사에 대해서 여러 자료를 살펴 보았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은 미완이다. 지금까지 월등사는 월남사, 순천 월등 소재, 전남 소재, 전북 완주 화산면 소재 등 몇 곳이 언급되었다.

  

이번에 지리지, 읍지, 지명조사를 통하여 찾아보면서 진각국사의 시집에서 월등사 사명이 들어간 시를 확인하였다. 지리지류를 통해서는 ‘월등’ 지명이 확인되고 지명자료를 통해서 순천 월등 지역에 절터나 국사암, 국사골, 중산골, 화장터 등을 확인했으나 진각국사 입적 다비처 ‘월등사’와 바로 연결시키려면 자료의 축적이 더 필요하다.

  

다만, 진각국사의 시에서 월등사 주지와 함께 승평군 사군(使君)이 함께 날을 지샌 내용을 눈여겨 볼 필요는 있다. 본사인 수선사가 승평(순천)에 소재하고 그 승평의 지방관(使君)이 참여하여 중앙정부의 후원을 받는 진각국사와 함께 창수(唱酬)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본사(수선사, 현 송광사)와 가깝고 순천에 소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되는 책과 글  

진각국사비명명 병서(한국금석문영상종합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무의자시집> 상(<한국불교전서>6)

<승평지(昇平志)>(1618년), <중간승평지(重刊昇平誌)>(1729년), <여지도서>(1759년), <호구총수>(1789년), <대동지지>(1861년), <신증승평지(新增昇平志)>(1881년),

   

김건곤, 2006, 「석 식영암의 정체에 대한 재론-남원 양씨, 법명 연감(淵鑑)-」, <대동한문학연구> 25, 대동한문학회, 349~374쪽

김현룡, 1983, 「석 식영암의 정체와 그의 문학-식영암은 덕흥군 혜이다-」, <국어국문학> 89, 국어국문학회, 83~105쪽

문화재청, 2011, 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사지>

민현구, 1973,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고려 무신정권과 조계종-」, <진단학보> 36, 진단학회

송은석, 2013, 17세기 말-18세기초 조각승 守一의 造像 활동, 『한국사상과 문화>70, 한국사상문화학회, 359~393쪽

이종문, 2002, 「식영암=덕흥군 설에 대한 재검토」, <한문교육연구> 19, 한국한문교육학회, 521~536쪽.

이지관, 2000,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한국금석문영상정보종합시스템> 인용)

정선종, 2001, 「高麗 浮圖銘」, <불교문화연구> 8, 남도불교문화연구회

채상식, 2009, 「강화 선원사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한국민족문화> 34,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35~170쪽.

최인선, 2005, 제주도 正房寺所藏 순천 大興寺 石造如來坐像과 腹藏物, <문화사학>23, 한국문화사학회, 157~175쪽

최인선, 2009, 여수 흥국사 소장 '順天 大興寺 銅鐘'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195~225쪽

한글학회, 1982, <한국지명총람>14 전남편Ⅱ

향토지리연구소, 2015, <순천 월등>

혜심 지음, 이상원 옮김, 2013, <무의자 혜심 선시집>, 아라

   

* 김희태, 康津 月南寺 眞覺國師 圓照塔碑의 內容과 性格, <康津 月南寺의 伽藍構造와 眞覺國師 圓照塔碑의 性格>(학술대회발표논문집), 민족문화유산연구원·월남사, 2017.11.10(금), 강진 시문학파기념관, 69~114쪽 ; 남도불교문화연구회 월례발표, 2017.12.02(토) 광주 차생원


<만덕사지>의 진각국사 비문(일부) - 2행에 월등사에서 다비한 기록이 보인다. <만덕사지>는 당시 진각국사비 원문을 현지에서 판독해 수록한 자료이다. 일부 생략을 했지만 70% 이상 판독되어 있다. <만덕사지>는 1813~1816년 사이에 편찬되는데 감정(鑑定)을 다산 정약용이 한다. 진각국사비를 현지에서 다산이 보았을까도 추적해 볼일이다. 무위사의 선각국사형미탑은 다산의 제자가 베껴온 것이라는 언급이 <만덕사지>에 있지만, 월남사 진각국사비에 대한 언급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하여 기록찾기는 이어진다.

1221년 월등사에서 창수한 진각국사의 시(무의자시집 ; 한국불교전서6)

고려 고종 8년(1221) 2월 5일 월등사에 들러서 방장(주지), 승평군 사군 품좌, 백운자와 화답 창수(唱酬)하는 시이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고종 21년(1234) 봄에 월등사로 옮겨 거처(비문 “사처(徙處)”로 표기)하고 6월 26일 입적하자 바로 그 다음 날인 27일 월등사 북봉에서 다비를 한다. 월등사가 입적 다비처이다. 그 위치는 분분하다. 이 시를 통해 승평의 지방관(使君)이 밤새껏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월등사는 본사(수선사, 현 송광사)와 가깝고 승평(순천)의 지방관이 함께 하는 것은 월등사가 승평(순천)에 소재함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중앙정부의 후원을 받는 진각국사이기 때문에 왕명을 받아 임명된 지방관(使君)이 함께 하는 것은 일종의 '업무'이자 '의무'였을 것이다. 제목을 풀이하면 "신사년 이월 초닷새 날 월등사에 들러 당두대로를 뵈었을 때 승평군 사군 품좌와 함께 밤에 앉아 얘기하였다. 죽헌이 남긴 시에 화제가 미치자 백운자가 먼저 선창하고 두 분 공께서 뒤에 화답하였다. 당두대로께서 나에게 운을 따라 지으라기에 마침내 거친 말로써 짐짓 엄명을 받들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