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37 -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호남 으뜸 고을로, 광주향교

향토학인 2017. 12. 31. 22:01

인지의 즐거움137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호남 으뜸 고을로

-광주향교-

  

김희태

  

광주향교를 처음 건립한 연대에 대해서는 자료로서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초기에는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태조 때 각 주군(州郡)에 흥학교령(興學校令)을 반포하고 제도 안찰사(諸道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써 수령들을 고과(考課)하는 법을 삼도록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광주향교의 위치는 세 곳이 기록으로 나온다. 처음 위치는 무등산((瑞石山) 장원봉(壯元峰) 아래였다고 전한다.(①) 그리고 이곳에서 호환(虎患)이 잦아서 성안(동문 안)으로 옮겼다.(②) 다시 권수평(權守平) 현감이 부임하여 광산현(읍치) 서쪽 2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②) 막상 성안 저자거리로 향교를 옮기자 시정의 소란스러움에 학교의 풍취를 잃었고, 게다가 지대가 낮아 홍수의 피해를 입게 되어 옮긴 것이다. 권수평 혐감의 부임이 1488년(성종 19)이니 지금의 자리에서 교육과 교화를 편친 것이 530년에 이른다. 다음 기록을 통해서 장원봉 아래(①)→성안(城內)→성(읍치) 서쪽 2리(②) 이건을 알 수 있다.

 

   ① 장원봉(壯元峯) : 곧 무등산의 지봉(支峯)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壯元峯 : 即無等山支峯 俗傳 鄕校舊在峯下 邑人中 壯元者多 故名 ; <신증동국여지승람> 35 광산현 산천 신증조)

 

   ② 향교(鄕校) : (광산)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이리로 옮겼다.(鄕校 : 在縣西二里 舊在城內 縣監權守平移構于此 ; <윗책> 광산현 학교조)

  

현감 권수평은 유학자로 광산에 부임한 이후 고을의 폐단을 없애고 적체된 옥사를 처리하면서 민생을 살폈다. 특히 성안에 있던 향교의 부흥에 노력하는 등 교육과 교화에 앞장섰다.

  

성현은 「광산향교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허백당집>권4)에서 권수평의 치적을 소개하고 있다. 성안에 있던 옛 향교는 지대가 낮고 좁았으며 건물이 기울고 낡아 강학의 장소로 적당치 않기에 고을 부로들과 상의해 성의 서쪽에 터를 잡고 학교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수평의 노력에 많은 백성들이 감동하여 협력하였는데, 특히 향교 재정을 위하여 권수평이 사재를 출연하였던 것을 귀감으로 삼았다.

 

「광산향교중수기」 기문의 첫 머리에 ‘歲在商橫黃鍾之月’라 하여 연기를 적고 있다. ‘商橫’은 10干의 ‘庚’인데 성현(1439~1504)의 재세연대로 보아 경신년인 1500년 11월에 해당한다. 이 기문의 연대를 1488년으로 보는 일부 기록이 있는데, 이는 권수평의 광주 부임 연대임으로 주의를 요한다. 

 

권수평은 향교 앞 백성의 땅을 사들여 논과 채마밭을 만들고, 또는 향교 소속 노비들의 집을 마련하였으며, 또 백성들의 밭을 사서 반은 향교에 기부하고, 반은 사마재(司馬齋)에 주어 재정의 바탕으로 삼게 하였다. 또 세금으로 들어온 면포(綿布) 백필, 쌀 백석, 콩 이십석을 향교 교생들의 비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생들의 면학을 위하여 사서, 오경,제자서,운서(韻書)등을 마련하여 열람하게 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물적 지원은 감사(監司) 및 도사(都事)들도 참가하였는데, 감영(監營)에 있는 무명 40여 필, 조세 곡식 50여석을 광주향교에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위의 권수평 현감의 향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상당히 모범적 사례가 되었던 것 같다. 정약용도 목민심서 「예전(禮典)」의 흥학(興學)조에 권수평의 일화를 인용하여 소개한 뒤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유학의 풍교가 크게 진작되고, 유학의 가르침이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향교의 재장(齋長)으로 삼고 사표(師表)가 되어 교생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들을 예의로서 대우하여 향촌민들이 예의염치를 알도록 하였다.(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권7, 「예전(禮典)」, 興學 : 由是儒風大振, 文敎益明. 簡選端方, 使爲齋長, 以作表率, 待之以禮, 養其廉恥.)

  

한편 광주목은 1499년에 판관 우윤공이 부민이 쏜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 10787)현감 권수평 1488(홍치 무신)에 향교를 중건했는데 성현의 기문에 보인다. 1499(기유)에 강등하여 현감이 되었다(縣監權守平 弘治戊申重建鄕校 見成俔記 己酉又降爲縣監)’라는 기록이 있어 재임중에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60년에 유경심(柳景深)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건했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1563년  「대성전중수상량문(大成殿重修上樑文)」,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고봉집(高峯集)>)을 남겨서 이때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성현이 1500년에 지은 향교 이건 중수 기록은 향교의 이건 설립 과정에 중점을 두어 수령의 치적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반면에 1563년 기대승의 기록은 수령의 활동 보다는 향교로 인해 풍교(風敎)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기대승은 중수된 향교에서 유학적 교화가 크게 일어나 광주지역에 유교적 이상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마치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읍재로 있던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에 갔을 때, 거문고 가락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유가 공자에게 학습한데로 예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광주에서 예악에 근거한 정치가 이루어져 향촌민의 교화가 이루어지길 고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소실된 뒤, 1600년 목사 이상길이 부임해 전당(殿堂)과 방실(房室)을 새로 지었다. 이에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은 광주향교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수은집(睡隱集)>)을 남겼다. 강항은 광주의 교화는 다른 곳에 견줄 바 없는 수준으로 높고, 선비들은 중국 유학 천년의 전통을 터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지금도 유학의 도(道)를 의논하는 생원(生員) 수가 대폭 늘어날 정도라고 한다. 광주는 조선의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인걸들이 태어났으니, 이는 산천의 뛰어남과 아름다움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학(敎學)의 효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즉 향교에서의 유교적 교육-교화로 유교적 이상사회 실현을 기대한 것이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이란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염계(濂溪), 정호(程頤)가 살던 낙양(洛陽), 장재(張載)가 살던 관중(關中), 주희(朱熹)가 살던 민중(閩中)을 말한다..

  

1804년 목사 김선(金銑, 1750∼?)에 의해 개수된다. 고을 제생들이 개수를 요청하자 목사는 봉록을 내어줘 자금을 충당하게 하였으며, 민역(民役)의 수고로움을 피하여 추수가 끝난 10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3월 준공시키고 향음주례를 베풀어 온 고을 선비들에게 교화의 기회로 삼았다.

  

기학경(奇學敬, 1741∼1809)이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겸재집(謙齋集)>)를 썼는데 기대승의 7대손이다. 기대승은 광주향교를 통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널리 지역민에게 교육할 것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240년 뒤 기학경은 공자보다는 주자의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는 인재를 교육하는 곳이며, 풍화(風化)의 근본이 되는 곳”이라고 규정하고, 유학의 성쇠는 참으로 학교의 흥폐에 달려있다는 인식은 7대조 기대승 시기와 같았다.

  

기학경은 특히 광주는 호남의 중심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굳세고 영특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문예를 좋아하여 그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광주인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광주향교는 도학과 문장의 전통을 형성하고, 지역민에게 충효와 절의의 풍습을 지키게 하여 남방 학문의 정화를 얻게 하는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1797년에는 정조가 지은 지은 어정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 연의보, 주자대전절약(朱子大全節約)을 호남 선비들이 교정하도록 광주목사 명고 서형수(明皐 徐瀅修, 1749~1824)를 통해 어제조문(御題問, 61조)을 내린다. 이때 84명의 호남 인재들이 참여하였고, 그에 대한 우대책의 일종으로 1798년 광주목에서 호남유림들을 시취(試取)하는 도과 시험을 치른다. 서형수목사 가 편액을 만들어 향교 명륜당 상벽(上壁)에 걸었다. 그리고 어제(御題) 및 방목(榜目, 어고방)은 따로 두권의 책을 만들어 나무로 만든 궤짝에 담아 명륜당(明倫堂)의 들보 위에 봉안하고 명칭을 봉안각(奉安閣)이라 하였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어제봉안각기 전말이 있다.

  

정종(正宗) 무오(1798)에 본도의 유생들에게 명하여 경서의 뜻을 논하게 하고 있어서 시(詩), 부(賦), 전(箋), 의(義), 책(策)으로써 목사 서형수(徐瀅修)에게 명하여 시권(試券)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고(御考)로 인(因)하여 삼하(三下)이상 53인을 선발하여 2인에게는 급제를, 2인에게는 서사(筮仕)를, 49인에게는 발해(發解)를 하사하고 나머지 차상(次上)의 여러 유생들에게는 서책과 붓과 먹과 종이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어제(御題)와 방목(榜目)은 별도로 두권의 책을 만들어 나무로 만든 궤에 담아 명륜당의 들보 위에 봉안하고 명칭을 봉안각(奉安閣)이라 하였다.(<광주읍지>, 1924년, 어제봉안각(御製奉安閣))

 

뒤에 명륜당이 실화로 소실되자 다시 <어정대학연의보초본(御定大學衍義補抄本)> 부본을 만들어 보관한다. 1책의 필사본으로 끝에 서형수 목사의 봉안기(1798년, 정조 22)와 조철영 목사의 봉안기(1841년)가 있다.(광주 공령과에 대해서는 김희태, 조선후기 과거시험 기록, 고정봉의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 <향토문화>, 2015 등 참조.)

 

조철영(趙徹永, 1777∼1853) 목사 재임 중인 1841년 명륜당과 동서 재실(齋室)이 화재로 모두 소실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조철영 목사는 성묘에 관한 일은 늦출 수 없다고 즉시 명을 내려 재물을 모으고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1843년 한달 남짓 기간에 준공하였는데, 공사비용은 관급미로 충당하여 고을 백성들에게 갹출하는 부담을 넘기지 않았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하여 고을의 장로와 유생을 불러 모아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여서, 효제의 도리와 강학의 도를 가르쳤으니 이것이야 말로 정치의 근본을 아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당대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이 「명륜당중수기」(<운석유고(雲石遺稿)>)를 지었다.

  

1854년(철종 5) 부임한 홍재응(洪在應) 목사는 향교의 문묘가 겨우 버팀목에 의지해 있는 모습을 보고 중수를 결정하였다. 2월에 시작해서 5월에 준공하였는데, 전당은 옛 모습을 유지하되 목재는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고 기와와 초석 이외의 모든 것을 새롭게 교체하였다. 목사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주민들에게 재물을 염출하거나 노역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온 고을의 대소사서인(大小士庶人)들이 모두들 기뻐하면서 목사의 공적을 칭송하였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문묘중수기(光州文廟重修記)」(<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권21)를 기록하였다. 광주도 홍재응목사의 교화를 받아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호남 으뜸의 고을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도움돠는 글과 책

광주향교, <광주향교지>, 1934

전라남도, <전남의 향교>, 1986

광주향교지편찬위원회, <광주향교지>, 1987

광주향교지편찬위원회, <광주향교지>, 2003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9호) 광주향교 정밀실측조사보고서>, 태창건축사사무소조사,2011

광주향교문헌지편찬위원회, <광주향교문헌지>, 광주향교재단, 2012

한예원, 광주(光州)향교 관련 문헌자료를 통해서 본 “광주읍성”의 교육과 교화, <한국고시가문화연구>34, 한국고시가문화학회, 2014, 419~448쪽

김희태, 조선후기 과거시험 기록, 고정봉의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 <향토문화> 2015

  

※ 김희태, 광주향교, <금당문화대학>(강의자료) 2017.09.08, 광주광역시 남구문화원 ; <문화금당>17, 광주광역시 남구문화원, 2017

 

 

허백당 성현 - 광산향교중수기

 

 

고봉 기대승 - 광주향교 중수기

 

 

 

수은 강항 - 광주향교상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