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35 - 월남사 명문와 송계사(松溪寺)와 진경 심희 탑비의 '송계(松溪)'

향토학인 2017. 12. 31. 19:46

인지의 즐거움135

 

월남사 명문와 '송계사(松溪寺)'와 진경 심희 탑비의 '송계(松溪)'

  

  

강진 월남사 발굴조사에서 송계사(松溪寺) 명문와가 출토되었다. 1994년~95년 사이 지표조사에서 송계사 명문와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를 통하여 또 확인한 것이다. 내용은 “功德主 禪師 景雷 施主 松溪寺 大德 空○”

  

송계사(松溪寺)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봉림산문(鳳林山門, 창원 봉림사)을 개창하였던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5~923)와 그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의 탑비 기록에 나오는 ‘광주 송계선원(光州 松溪禪院)’과 같은 곳으로 판단된다.

다음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진경대사가 문덕(文德) 초년(888)부터 건령(乾寧, 894~897) 말년 사이 ‘송계(松溪)’에 자리를 잡았고(①), 그 제자인 원종대사도 진경대사를 따라 ‘광주 송계선원’으로 따라 갔다(②). ②의 ‘광주(光州)’ 지명은 940년(고려 태조 23)에 ‘무주(武州)’에서 고친 이름인데, 그 이후에 비가 건립되어 그 당시 지명 ‘광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제35권 전라도 광산현 건치연혁조)

  

원종대사는 892년 중국 송나라로 유학을 떠난다.(③) 그러므로 진경대사가 송계사(송계선원)에 자리잡은 것은 888년~892년으로 보인다. 이 진경대사비의 ‘송계’, 원종대사비의 ‘송계 선원’과 월남사 출토 명문와의 ‘송계사’는 월남사의 초기 기록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이다. 즉, 월남사 명칭 이전에 ‘송계사’ 또는 ‘송계선원’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① 문덕 초년(888년, 신라 진성여왕 2)부터 건녕(894~897) 말년 사이에 먼저 松溪에 자리를 잡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었으며(文德初歲 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 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보물 제363호. 경남 창원 소재)

   

   ② 그러던 중 본사인 진경대사가 광주 송계선원(光州 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대사도 행장을 정돈하여 육환장을 짚고 송계선원으로 따라가서 례족의 소충을 나타내어 주안의 현조에 대하여 감사하였다.(時本師 迻住光州 松溪禪院 大師遠携笻杖特詣松溪 申禮足之素衷 謝鑄顏之玄造 ; 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 비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 탑비 보물 제6호, 경기 여주 소재)

   

  ③ 대사가 생각하기를, ‘무릇 도에 뜻을 둔 자가 어찌 일정한 곳에 고정된 스승이 있으랴!’하고, 스님에게 제방으로 다니면서 심사문도할 것을 고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그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라. 나는 자네에게 깊이 징험하였다.’면서 기꺼이 떠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멀리 해외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산을 내려와 해변으로 가서 중국으로 가는 선편을 찾았고, 드디어 경복4 원년(景福 元年, 892) 봄 송나라로 들어가는 상선을 만나 편승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大師以爲 凡志於道者 何常師之有 迺吿以遠遊泛覽 師因謂曰 它心莫駐 迅足難留 吾於子驗之笑而聽去 大師以道之云遠行之 則是迺出山並海 覗西汎之 緣景福元年春 適有商舶入漢者 遂寄載而西卽以 ; 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

  

   ③의 경우, 진경대사를 따라 ‘송계선원’에 온 원종대사가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중국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과정이다. 처음 문답 내용에 이어 산에서 내려와 해변으로 가서 선편을 찾아 상선에 편승하여 떠나는데, 그 해는 ‘경복 원년(景福 元年)’이다. 이때는 신라 진성여왕 6년이고 견(진)훤왕이 후백제를 건국하던 해이다. 그리고 해변으로 내려와 선편을 찾은 것은 아마도 영산강 수로와 바닷길이 만나는 입지를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경대사와 원종대사가 ‘송계사(송계선원)’, 즉 뒤의 ‘월남사’에 머문 시기는 월남사 삼층석탑의 건립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건립 추정 시기 가운데 892~905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바로 진경대사와 원종대사 주석하던 시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월남사 석탑의 조성에는 이 지역의 토호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표방한 892년에서 왕건(王建)과 가까운 형미가 무위사에 주석하는 905년 사이로 보는 것이다.


  한편, 무위사가 선종의 가지산문 계통이었으므로 월남사는 다른 선종 산문보다는 교종 종파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희, 위 논문) 그런데 봉림산문과 관련있는 진경대사가 주석한 시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선종의 봉림산문 계통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명문와의 선사 경뢰(禪師 景雷)는 현재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월남사 삼층석탑 조성 시기는 892~905년 사이(이병희), 고려초(성춘경·이계표), 12세기(진홍섭), 1210~1234년 사이(민현구), 고려 중기 이후(천득염)로 각각 비정한 있다.)

  

이처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송계사(松溪寺)’ 명(銘) 기와를 통해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봉림산문(창원 봉림사)을 개창하였던 진경대사 심희(855~923)가 888~892년 머무르며 수행한 광주 송계사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되었다.(김용선, 2006,「玄昱·審希·璨幽와 驪州 高達寺」,『한국중세사연구』21, 한국중세사학회, 123~125쪽.)

 

‘송계(松溪)’의 역사 지명에 대해서 더 살펴 보자. 다음 몇 사료에서 보는 것처럼 ‘송계’는 자연(하천) 지명(송계)이며 행정 지명(송계부곡, 송계리, 강진현 읍치, 고읍면)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는 강진현 북쪽 15리(⑤), 작천의 상류(③), 옛 도강현 땅이었다(①, ②).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왔다(③). 그리고 면적은 처음이 10리, 끝이 30리라 하여 20리 거리임을 알 수 있다(⑥). 공간의 기능은 처음에는 부곡(⑤)이었는데 조선 세종 11년(1429)에는 읍치가 들어서(①, ②) 성종 6년(1475)까지 강진현의 읍치가 된다(②). 읍치를 ‘송계’로 옮긴 것은, 1409년에 두 현(도강, 탐진)이 합해져 강진이 되면서 자리 잡은 탐진 옛 현의 산성은 두 현의 중앙이기는 하나 산성이 협착하여 감사가 조정에 전보하여 송계리로 옮기게 된다.(『조선왕조실록』문종 1년 신미(1451) 11월 27일(신유)) 조선 후기는 고읍면이 된다(⑥).

  

   ①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 본조 태종 17년 정유(1417년)에 병마절제사영을 도강의 옛읍에 옮기고, 두 현을 합하여 강진(康津)으로 하고 읍을 탐진현에다 정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11년 기유(1429년)에 읍을 도강현의 송계(松溪)로 옮겼다.(道康縣 : 本百濟 道武郡 <중략> 耽津縣 : 本百濟 冬音縣 <중략> 太宗十七年丁酉 徙兵馬節制使營于道康古邑 合兩縣爲康津 仍邑于耽津縣. 今上十一年己酉 移邑于道康縣之松溪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나주목 강진현)

 

  ② 도강현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이었는데 … 탐진현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이었는데 … 본조 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을 도강(道康)의 옛 치소에 옮겨 두 현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탐진을 치소로 하였다. 세종 11년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1475년)에 탐진의 옛 치소로 돌아왔다.(『신증동국여지승람』제37권 전라도 강진현 건치연혁조.)

 

  ③ 송계(松溪) : 송계부곡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옛현(古縣)을 지나는데, 곧 작천(鵲川)의 상류이다.(『윗책』강진현 산천조.)

   

  ④ 고강진(古康津) : 송계(松溪)에 있다.(『윗책』강진현 고적조.)

 

  ⑤ 송계부곡(松溪部曲) : (강진)현의 북쪽 15리에 있다.(『윗책』강진현 고적조.)

 

  ⑥ 고읍(古邑) : 옛 송계부곡(松溪部曲)인데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대동지지』강진 방면조.)

  

이처럼 송계는 자연 지명이면서 고려 시기에는 소규모 행정구역이었다가 조선 초기에는 47년간 강진현의 읍치가 들어선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월남사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라 말기 ‘송계사(송계선원)’가 확인됨으로서 ‘송계’는 사찰 지명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송계사’-‘월남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리적, 역사적 공간 특징이 고려~조선 초기까지도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희태, 강진 월남사 ‘명문와(銘文瓦)’와 관련 기록의 역사적 성격, <강진 월남사 출토 銘文瓦의 현황과 성격>-학술대회발표논문집-, 주최 강진군, 주관 한국중세고고학회·민족문화유산연구원, 강진시문학파기념관, 2016.11.25, 69~86쪽

 

* 진경대사탑비 기록의 ‘광주(무주) 송계사’와 관련하여 남도불교문화연구회에서 무위사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송계천임을 알고 수년간 답사와 탐문을 하였다. 월남사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2014.8.13) 때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송계사=월남사 임을 알 수 있었다고 도움말을 해준 정선종․황호균 학형에게 감사드린다.

  

** ‘송계사’ 명문 와당이 출토되었다 해도 송계사=현재의 월남사 구역으로 한정하지 말고 위에서 언급한 ‘송계권역’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진경대사와 원묘국사 요세,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등이 월출산을 중심으로 주석, 교화하였고 그 중심 사찰이 현재의 월남사 중심의 ‘월남사’이기는 하지만 당시 월남사의 영향권(암자 등)에 들었던 것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운암(백운원), 약사암(약사난야) 등과 수암사 등 월출산 남쪽 현재의 강진군 성전면 일원을 송계사-월남사 권역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세한 제보(2015.12.17./12.20. 방문 면담 등)와 자료를 제보 해준 양광식 선생(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 전라남도 문화재위원)께 감사드린다.



 

명문와 - 功德主 禪師 景雷 施主 松溪寺 大德 空○(사진 민족문화유산연구원)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찬유) 탑비(975년) - 광주 송계선원(좌3행) 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