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83
담양 창평(昌平) 삼지천(三支川)마을 옛 담장
전남지방의 돌담5
김희태
‘담양 창평(昌平) 삼지천(三支川)마을 옛 담장’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일원에 소재하며 등록 고시 지적은 80,419㎡(삼천리 82-1번지 등 131필지)이다. 등록문화재 제265호(2006.06.19 등록 고시)이다.
창평은 고대부터 독립된 고을이 형성된 곳이다. 원래 지금의 담양에는 담양과 창평 2개의 고을이 있었다. 담양 지명은『고려사지리지』에 “담양군(潭陽郡)은 원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로 하였다가 뒤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고려 때 생겨난 지명임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 1413년 담양도호부로 고쳤다.
창평 지명은『고려사지리지』에 “창평현(昌平縣, 명평[鳴平]이라고도 한다)은 원래 백제의 굴지현(屈支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기양(祈陽)으로 고쳐서 무주의 관할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와서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부터 부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전라·제주편-, 2010.)
‘屈’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구루’의 한자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 구루>우루>울로 변한 것으로 추정되며, ‘울’은 ‘울다’의 뜻을 가진 한자 ‘祈’와 ‘鳴’을 빌어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支)와 양(陽)과 평(平)은 고을(골)을 의미하는 동일한 한자이다. 현재의 담양군 창평면, 고서면 일대이다.(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1908. 10. 15 옥과군(玉果郡)이 폐지되어 창평군(昌平郡)에 합쳐졌다가 1914년 옥과는 곡성군으로 넘어 가고, 창평군은 담양군으로 합해진다.
창평면(昌平面)은 담양군의 중앙 남부에 위치한 면이다. 호남정맥 만덕산에서 북서쪽으로 감돌아온 능선에 안겨있고, 남동쪽에서 발원한 삼지내가 굽이 돌아 해곡리를 거쳐 증암천에 합류된다.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한다. 면 소재지인 창평리를 비롯하여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창평 읍치가 있던 곳으로 함평, 남평과 함께 3평 고을로 유명하였다. 창평은 전라도에서는 ‘광라장창(光羅長昌 - 광주, 나주, 장성, 창평)’이라 할만큼 인물과 역사가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1914년 창평군이 없어지면서 담양군에 속하고 창평군의 군내면과 가면, 그리고 우면과 대면 일부를 합해 창평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삼지천마을은 ‘삼지내’라고 하며, 상삼천마을(삼천2리)과 하삼천마을(산천1리)이 있고 법정리는 삼천리로 부른다. ‘삼지천(삼지내)’은 월봉산과 국수봉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이 마을 앞에서 합쳐져 세갈래 물길이 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후기 호구와 동리를 기록한 관찬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 1789년)[奎 1602]에는 창평현 동면 소속으로 11개소의 마을이 나오는데 삼지천리로 표기되고 있다.
창평 동면조 : 득량산리(得良山里), 삼지천리(三支川里), 수곡리(水谷里), 소천리(素川里), 신촌리(新村里), 월동리(月洞里), 유촌(柳村), 보평리(普坪里), 옹점리(瓮店里), 대자동리(大慈洞里), 초여리(草餘里)
1895년 윤5월에 전국 8도를 23부(府)로 개편할 때 남원부 창평군에 속하게 되며, 1896년 8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에 속한다. 1912년 기록에서는 창평군 군내면 16개 마을 가운데 본촌(本村)으로 표기된다.
郡內面(15) : 本村, 柳村, 外東, 良山, 唐谷, 梧山, 下素川, 上素川, 龍雲洞, 水谷, 普坪, 龍田, 釜洞, 月良, 邑里(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
1914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속하면서 창평군 군내면 본촌, 읍리와 대면 증산리 일부를 합해 삼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김정호, 『지방연혁연구』 -전남을 중심으로-, 1988.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삼지천 마을은 151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동편에는 월봉산, 남쪽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천의 모습이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지(내)천(三支川)이라 불렀다. 이 마을은 들판 가운데에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창평 유지들의 요람이었다.
이 마을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하였고, 기존 담장위에 재축조한 경우도 있다.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줄눈이 생긴 담장과 막쌓기 형식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다.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과 중간 정도의 돌이 사용되었다.
심지내 마을의 돌담은 乙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을 따라 형성된 담장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고가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지천을 중심으로 창평면 일원에는 담양 고재선 가옥(전라남도 민속문화재 5호, 창평면 삼천리 366-1), 담양 고재환 가옥(전라남도 민속문화재 37호, 창평면 삼천리 155-1), 창평 춘강 고정주 고택(전라남도 민속문화재 42호, 창평면 삼천리 411), 창평 장전 이씨고택(전라남도 민속문화재 41호,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 498), 담양 류종헌 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2호, 창평면 해곡리 230) 이 있다.
* 김희태, 전남지방의 돌담, <전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1, 164~215쪽
담양 삼지천 돌담, 돌과 흙을 쌓은 토석담이며 담장 위로 기와를 얹었다. 마을 안길과 가옥을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가옥의 벽체로도 기능한다. 하부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았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도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돌담의 위부분에 사각의 공간을 만들어 창문을 달고 그 위로는 목조건물의 구조물로 마감하여 자연과 문화, 이를 활용하여 생활하는 일체감이 엿보인다. 돌담을 바로 벽체로 하여 지붕이나 구조물을 얹은 경우도 있지만, 일정 높이에서 흙벽으로 마감하고 지붕 가구 구조물을 얹기도 한다. 가운데는 기둥이지만 동자주처럼 돌담장 위에서 받치고 있다. 돌담과 마을길 사이는 몇단의 돌을 다시 쌓아 경계를 삼으면서 화단과 노거수, 유실수의 식생 생태공간으로도 기능한다. 공동 공간인 마을 안길에서 개인생활무대인 가옥으로 들어 가는 골목길과 담장. 원형의 토석담과 함께 보수한 돌담을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벽돌담과 시멘트 벽체, 철제 대문 등 시대를 지나온 여러 재료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 근래에 보수한 돌담. 정성스러운 관리도 우리의 책무이다. 삼지천과 연결되는 창평리 오리천마을 입구(‘오리시암’)의 돌장승. 높이 높이 157cm. 지금은 시멘블럭 담장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예전에는 돌담이 있었다 한다.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행운을 기원하였던 민간신앙의 유형물이다. 주변에서는 돌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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