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32
창평 용담대와 용담정, 면앙정보다 110년 앞선 무등산권 정자 기록, 1423년
김희태
용담대 용담정과 창평현령 박흥생
창평 용담대 자료를 찾아보다가 15세기 초반 1423년에 중건한 용담정(龍潭亭)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알려져 왔던 16세기의 무등산권 정자 조영 시기 보다 100여년 이상이 앞선다. 물론 고려 말 조선초의 인물 전신민과 연관되는 독수정이 있긴 하지만, 전신민 당대의 기록은 더 찾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어서 ‘용담정’에 대한 자료는 새로움으로 다가 왔다. 면앙정이 1533년 이라 하니 110년이 앞선다. 용담정은 무등산권 최초의 정자 기록인 셈이다.
지금은 그곳 일원에 1920년대 건립한 소산정(小山亭, 篠山亭)이 있다. 2004년에 담양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소산정의 연혁에, 동은당 조은환이 선조 환학 조여심(喚鶴 曺汝諶)이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 등과 더불어 용담대
에서 소요하던 것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라 하고 있다.
제봉과 용담대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자 뒤적이다가 1423년 창평 현령으로 부임한 국당 박흥생(鞠堂 朴興生, 1374~1446)의 문집인 『국당선생유고』에서 「용담정 중건 서문[龍潭亭重新序]」 글을 본 것이다. 세주에 ‘창평현 재임시[宰昌平時]’라는 기록이 있어 창평현령 때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박흥생이 창평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1423년(세종 5)이다. 그리고 ‘중신(重新)’이라 한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있었던 정자를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평현령 박흥생의 「용담정중신서」(『국당유고』)
중건 서문에는, 원래 초가 정자가 있었고 들보와 서까래 구조물은 대나무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대나무의 고장 죽향 담양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건조물이 무너져 박흥생 현령 때 다시 지은 것이다. 용담정의 중건에 대해 서술한 기록을 보자.
예전에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들보와 서까래를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다. 세월이 오래되자 그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겨우 비와 볕만 가릴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백성을 다스리며 은근히 홀로 정자를 염원하였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지엽적인 일이었다. … 무릇 사신이 물가를 찾고, 시인이 시를 읊으려고 한다면 어느 곳이 영감을 드러낼 곳이겠는가? 이 때문에 틈을 내어 노는 사람을 시켜 산에서 재목을 구하고, 들에서 풀을 베어오니 공사의 재물도 안 들고 백성에게 부역도 시키지 않고 옛 규모를 넓혀서 채색하는 일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편액하기를, '이요정'이라 하였다..(舊有草亭 樑棟欀桶 皆以竹爲之 歲久傾圮 聊蔽雨暘而已 爰自政民 竊獨惟念亭榭之於爲治 抑末矣 … 凡使華原濕之咨 詞人瓊土之詠 顧何所以楊靈乎 是以間倩遊徒 取材于山 誅第于野 不鳩工 不役氏 增廣舊制 繪事亦畢 仍扁之曰二樂]
이 기록은 몇가지 중요하다. ‘옛 초정[舊有草亭]’이라 하여 정자가 이전부터 있었다는 점, 단순히 개인적 별서가 아니라 창평현이라는 고을의 주민들이 공적으로 이용하는 휴식 공간이었다는 점, 박흥생은 정자를 중건함으로써 풍류와 학문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 부역도 하지 않고 마쳤다는 점 등이다.
즉, 용담정은 조선 전기의 관(官)이 주도하여 조영한 공공적 성격의 정자였다. 이는 후대 면앙정이나 식영정처럼 사대부 개인 별서 성격의 정자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1362년 과거 급제한 강호문과 용담대
그런데 박흥생 현령 중수와 그 이전의 초가 정자보다 더 앞선 시기 인물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창평현 누정조에 보인다.
용담대(龍潭臺)
[창평]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산록에 기암이 있는데 높이가 백 자나 된다. 남쪽으로는 서석(瑞石,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아래로는 맑은 못이 있다. 이름을 용담대라 하는데 그 옆에 승사(僧舍)가 있었다. 강호문(康好文)의 시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 그 이전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본 임으로 15세기 후반에 이곳 일대를 용담대라 했고 승사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만으로는 용담대라 명명한 건조물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어지는 기록에 강호문의 시가 나온다. 1362년(공민왕 11)에 과거에 급제했으니 고려의 서정을 담고 있을 것이다.
고찰(古刹)에 사는 중이 없고 古刹無僧住(고찰무승주)
문앞으로 지나는 손이 적도다. 門前少客過(문전소객과)
대(臺)가 높으매 봄 기운이 빠르고 臺高春氣早(대고춘기조)
시내 가까워 저녁에 시원한 기운이 많다. 溪近晩涼多(계근만량다)
옛 섬돌에는 이끼가 끼었고, 古砌封苔蘚(고체봉태선)
그늘진 회랑에는 칡넝쿨이 걸렸도다. 陰廊掛薜蘿(음랑괘벽라)
다시 와서 노니 무엇을 얻었는가, 再遊何所得(재유하소득)
시구를 짓노라고 애써 읊조린다. 覓句費吟哦(멱구비음아)
옛 절에는 승려도 보이지 않고 지나는 길손도 드물다. 용담대는 높직하고 시내를 감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때는 이른 봄철인듯 싶다. 오래된 섬돌에는 이끼만 가득, 회랑은 칡넝쿨만 너울 너울. 그래도 다시 찾아 시구를 읊조려 본다.
이 시의 작가 강호문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이며, 사암 유숙(思菴 柳淑, 1316~1368)의 문인이다. 시문에 능했고, 1362년(공민왕 1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박의중, 이숭인, 정도전, 설장수 등과 동방이다. 성균 사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다. 1373년(공민와 22)에는 천안부사를 지냈고 1377년에 천안의 「영주 남원루 기(寧州南院樓記)」를 지었는데 『동문선』에 시 3편과 함께 올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창평현 용담대 시와 함께 양성현, 장단도호부, 공주목, 임천군, 고부군, 금산군조에 강호문의 시가 올라 있다. 양촌 권근,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도 강호문과 관련있는 시가 보인다.
1491년(서종 22)에 남효온이 지은 「담양향교 보자기[潭陽鄕校寶上記]」에 담양부 출신 인물로 “재술(材術)로 이름난 이영간(李靈幹), 공명으로 이름난 이성(李晟), 문장으로 이름난 전녹생(田祿生)‧강호문(康好文), 돈독한 행실로 이름난 김기(金頎)‧전근(全謹)‧송시흥(宋時興)”을 들고 있다. 강호문은 문장으로 알려졌고 담양과 연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박흥생이 중신 서문을 지은 용담정은, 강호문의 시가 있던 용담대, 오랜된 섬돌만 있던 승사, 무너진 대나무 들보의 초가 정자, 이요정이라 명명한 용담정으로 네 번째 이어진 것이다.
기암괴석이 솟고 맑은 연못이 있는, 용담대
용담대는 현재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용대마을 증암천 곁에 자리한다. 옛 창평현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무등산의 장대한 연봉이 뻗어 있고, 북쪽으로는 담양 분지의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증암천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옛 기록에서는 이곳의 물을 가리켜 “청수(淸水)”라 칭하며, 여름철의 더위를 씻어내는 청량한 기운을 전한다고 기록하였다.

앞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담대의 기록처럼, 기암괴석이 솟아 있고 맑은 연못이 있고, 남쪽으로 서석산, 북쪽으로는 창평과 담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다. 용담대의 입지가 단순히 경관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산·물·들판이 모두 어우러진 경관 조망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용담대는 예로부터 “용담(龍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는 깊은 소(沼)가 용이 노니는 못처럼 보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의 시 세주에 “토사가 몰려와 용담을 메운지 이미오래된 탓[時龍潭淤塞已久故云]”이라 하여, 이미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본래의 깊은 소가 상당 부분 메워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용담대의 원형은 현재보다 훨씬 수려한 계류와 소를 중심으로 한 자연 경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지』(1656년) 창평현편에는 산천조에 용담암(龍潭巖)이 나오는데, “산기슭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 높이가 백 척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서석산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맑은 못을 누르듯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용담대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담대는 용담암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창평현은 담양군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원에 있던 고을이다. 읍치는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 고읍(구읍)마을로서 창평현 행정 중심지였다. 창평은 삼국시대에는 굴지현(屈支縣), 757년 통일신라시대에는 기양현(祁陽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창평현으로 바꾸었다.
1793(정조 11)년 읍치를 지금의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로 옮겨갔다. 고서면 고읍리 읍치 시절 세운 역대 현감 선정비 일곱 기가 마을 입구에 보존되어 있다. ①강필구[縣令姜公必龜清白善政碑, 1724~1725 재임], ②이목[縣令李公穆清德碑, 1642~1642 재임], ③임익상[縣令任侯翼常清簡善政碑, 1839~1842 재임], ④민성로[縣令閔候聖魯清德愛民碑, 1703~1706], ⑤이영[縣令李候泳永世不忘碑, 1690~1691 재임, 원래 동면에 세움), ⑥이영[縣令李候泳清簡善政碑, 1690~1691 재임, 서면에 세움), ⑦이영[縣令李候泳永世不忘碑, 1690~1691 재임, 현내에 세움) 등이다.
15세기 초반 용담정을 넘나든 문사들
창평현령 박흥생은 용담정을 중수하고 칠언율시를 짓는다. 『국당선생유고』 권1에 실려 있는다. 헌납 조사수와 제학 박희중의 차운시도 있다. 한국문집총간 8집으로 영인 표점본이 나왔다. 국당 박흥생과 이요당 박흥거 형제 문집 국역본도 나왔다. 이를 인용한다.
용담정이 중수되자 쓰다 題龍潭亭重修
맑고 푸른 용담에 높은 봉우리 비쳤고 韻潭澄碧映危岑(운담징벽영위잠)
푸른 안개 고목에 땅이 더 깊어졌다 古木蒼煙地轉深(고목창연지전심)
평평한 대(臺), 성벽 막힌 곳에 정자 지으니 亭爲臺平臨絶堞(정위대평림절첩)
정자 때문에 대(臺)가 수풀보다 빼어나다 臺因亭季出層林(대인정계출층림)
물에 밝은 달뜨니 금빛 그림자 흐르고 水舂明月流金影(수용명월류금영)
산들바람 대(竹) 흔들자 녹음이 움직인다 竹戰輕風動綠陰(죽전경풍동록음)
태수 번뇌 식히려 두건을 젖혀 쓰고 太守息煩長岸幘(태수식번장안책)
맑은 밤 고요한 낮 거문고를 타노라 淸宵靜晝獨鳴琴(청소정주독명금)
처음에 용담의 맑은 물에 우뚝한 봉우리가 비치고, 안개에 싸인 고목이 신비로운 기운을 드러낸다고 하여 자연의 청정함과 고아한 분위기를 묘사한다. 다음으로는 정자 건립의 의의이다. 정자가 들어섬으로써 자연의 경치가 한층 더 드러나고, 주변 숲보다 빼어나게 되었다는 점, 단순한 건조물이 아니라, 경관을 완성하는 문화적 장치로 본 것이다. 5‧6구에서는 달빛과 물, 금빛과 물결, 바람과 흔들림, 대숲과 그늘 등 음영과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경물이 단순한 풍경에서 시인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대상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자아와 수양의 희구, 벼슬살이의 번뇌를 달래고 선비의 마음을 맑히는 경지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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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수(趙士秀)는 봉선대부 소부소윤(少府少尹) 조문형의 아들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에 입격했다. 1404(태종 4)년에 우헌납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나온다. 창평이나 광주 인근에서 국당과 만난 듯하다.
차운하다[헌납 조사수] 次韻[獻納 趙士秀]
서석산 높아서 뭇 봉우리 조회하고 瑞石山高朝衆岑(서석산고조중잠)
산속 맑은 물 깊은 못을 이루었다 應山心水作潭深(응산심수작담심)
정자 앞 빼어난 경치 시안을 열어주고 亭前勝景供詩眼(정전승경공시안)
못 위의 기암괴석, 죽림을 감싸 안네 潭上奇嵒抱竹林(담상기암포죽림)
산 기운 냇물 소리 고금에 변함없고 岳氣川聲互今古(악기천성호금고)
구름과 비의 모습 개었다가 흐려진다 雲容雨態易晴陰(운용우태역청음)
백성 송사 없다면 날마다 여기 와서 使民無訟日來此(사민무송일래차)
어찌 그대 거문고에 시대를 맡기지 않으리? 豈獨當時子賤琴(기독당시자천금)
박희중(1364~1446)은 첫 이름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급제, 1406년 군자감 전라도경차관, 세자부 좌정자, 1407년 이조정랑, 1410년 점마별감, 1415년 전라도경차관으로 관찰사 박습(朴習) 등과 김제 벽골제 수축. 1416년 예문관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 1421(세종 3)년에 영암군수, 1422(세종 4)년에 일본 회례사, 1423(세종 5)년 직제학 등을 지냈다.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이름이 오른 명필이었다.
차운하다[제학 박희중] 次韻[提學 朴煕中]
맑은 못에 바위를 꽂아 우뚝한 봉우리 되고 巖揷澄潭屹作岑(암삽징담흘작잠)
산봉우리, 그림 누각 비치니 높고도 깊어 岑顚畫閣控高深(잠전화각공고심)
비탈진 돌길 만들어 객 올 길 열고자 欲開客逕營危磴(욕개객경영위등)
울창한 숲 깎으니 딴 산을 만든 듯 擬出他山翦茂林(의출타산전무림)
달빛은 물결에 비쳐 온갖 물상이 잠겼고 月到彼心涵萬象(월도피심함만상)
나무 끝에 바람 부니 겹겹 그늘 흩어진다 風來樹角散層陰(풍래수각산층음)
어찌 마침 이요의 종자기를 만났던가? 祗將二樂期鍾子(지장이요기종자)
그저 난간에 기대어 홀로 거문고를 뜯노라 徒倚欄干獨撫琴(도의란간독무금)
세 사람의 시는 같은 경관을 배경으로 하지만, 박흥생의 원운은 “자연 속 자기 수양”이라는 자기 서정의 측면이 드러난다. 조사수의 차운은 “자연-정치의 합일”이라는 공적 서정이 돋보이고, 박희중의 차운은 “자연 속 지기(知己) 갈망과 고독”이라는 교유적·인간적 서정을 보여준다. 용담정이라는 공간은 자연을 매개로 선비의 심성과 세계관을 투영하는 마당이 되었고, 세 시를 함께 놓고 보면 청정·찬미·고독이라는 서로 다른 정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16세기 제봉의 용담대와 1710년 학봉종가 연시례(延諡禮)
고려시기로부터 연원을 이어 15세기 초에 용담정이 중건되었고 관인 문사들이 넘나들었다. 그런데 용담정은 16세기 중후반 들어서서야 본격적으로 문학사에 등장한다. 제봉 고경명의 시를 통해서이다. 그는 젊은 시절 용담대에 올라 여러 차례 시를 남겼다. 「용담대에서 앞의 운을 거듭하여 군망에게 보이다[龍潭臺 疊前韻 示君望]」는 시를 인용한다. 군망은 백록 신응시(白麓 辛應時, 1532~1585)의 자이다.
담동은 빙 돌고 옥봉은 꽂은 듯 潭洞灣洄揷玉峯(담동만회삽옥봉)
하늘 열리고 들 넓어 바람이 절로 나네 天開野曠自生風(천개야광자생풍)
높이 오른 물색은 모두 안중에 들어오고 登高物色牢籠裏(등고물색뇌농리)
부절을 잡은 어사는 주위를 돌아보네 持節風稜顧眄中(지절풍릉고면중)
서석의 아지랑이 푸른 빛 거두었고 瑞石煙嵐收莽蒼(서석연람수망창)
영추의 천둥 비 컴컴하게 끼었네 靈湫雷雨鎖冥濛(영추뢰우쇄명몽)
진흙 밑에 괴물 누가 알랴 誰知怪物泥沙底(수지괴물니사저)
수달피는 길이 막혀 다투어 조롱하네 獱獺爭嘲路不通(獱달쟁조로불통)
이 시는 세주에 ‘이 때에 용담이 메워진 지 오래임으로 그런 것[時龍潭淤塞已久故云]’이라 하였다. 경관 좋던 용담도 메워져 옛 자취만 있을 뿐이다. 몇세대 전 용담정에서 창평현령과 문사들이 창수하였던 시정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용담정 건조물 마저도 전하지 않은 듯하다.
이 시는 단순히 자연의 변화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시대적 몰락과 현실의 불우함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해석된다. 즉, 본래 장엄한 기운을 간직한 용담이 세월과 환경의 변화로 제 모습을 잃듯이, 선비 또한 시대의 불운 속에 잠겨 있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 용담대에는 제봉의 아들인 학봉 고인후의 종가가 있었던 것 같다. 고경명-고종후-고인후 삼부자의 임진왜란 순국은 청사에 빛나고 있었다. 1694년(숙종 20) 10월 11일 증 영의정 고인후에게 「의열(毅烈)」로 시호가 내린다. 이에 따라 창평 종가에서 연시례(延諡禮)를 봉행한다. 증시 17년만인 1710년(숙종 36) 11월 29일의 일이다.
이 종가가 창평의 용담대에 있다는 기록(肅宗 三十六年[淸康熙四十九年] 庚寅 十一月 二十九日 奉行延諡於昌平宗家[宗家時在龍潭臺])이 있다. 『제하휘록』의 의열공사적[증시 연시 사실]편에 보인다. 연시의 사시관(賜諡官)은 이조좌랑 오명항[해주인], 연시집사관은 구례현감 김우추[固城人]와 경양찰방 김계명이었다. 경양찰방 김계명, 배천[白川] 조익휘, 의령 남하창, 창령 조근하 등은 연시 연회석에서 시를 읊는다. 김계명의 시를 보자.
연시하는 연회석에서 읊음 延諡宴席上吟
조야의 어렵고 위태로움 임진에 심했는데 朝野艱危劇壬辰(조야간위극임진)
일문의 충효 세 사람이 있었네 一門忠孝有三人(일문충효유삼인)
천은이 아름다움 드날려 천고에 빛났고 天恩褒美光千古(천은포미광천고)
이조에서 시호를 전하니 사방 이웃이 영광일세 吏部傳號煥四隣(이부전호환사린)
자리 위의 풍류는 벼슬 높은 손들이요 座上風流簪笏客(좌상풍류잠홀객)
술잔 앞에 노래하고 춤추는 것 화려한 봄일세 尊前歌舞綺羅春(존전가무기라춘)
용담 오늘날 남다른 영화로운 모임에 龍潭此日殊榮會(용담차일수영회)
문득 모든 자손들로 하여금 감동함이 새롭게 하네 却使雲仍感慕新(각사운잉감모신)
임진왜란 때 고경명과 고인후의 금산전 순국, 고종후의 진주성전 순국의 충절과 효행, 그리고 그 가문에 내려진 천은(天恩)을 찬양하고, 그 영예로운 자리에 모인 후손들과 문사들을 기쁘게 축하하는 내용이다. 1‧2구에서 시대의 혼란과 가문의 충효라는 역사적 사실의 제시, 3‧4구에서 국왕의 은혜와 시호의 영광에 대한 칭송과 기쁨, 5‧6구에서 연회 현장의 분위기의 풍류와 축하의 장면,
7‧8구에서 용담대의 영화로움과 후손의 감격을 전하며 삼충(三忠)의 가문 정신이 세대 간에 계승됨을 상징하고 있다. 풍류와 충절이 함께 어우러진 의례시(儀禮詩)이다. 특히, ‘용담(龍潭)’을 시어로 형상화하고 있어 문학 풍류의 공간인 용담대가 충효 가문의 터자리로 자리잡았음도 드러난다.
이후 1927년에 소산정이 들어선다. 그 연원을 차례로 보자면, ①강호문 용담대-②섬돌 승사(僧舍)-③대나무 들보 초가 정자-④박흥생 현령 중수 용담정[이요정]-⑤제봉 고경명과 환학 조여심의 용담대-⑥학봉 고인후 종가와 연시례-⑦동호당 조은환의 소산정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용담대-용담정의 역사성과 장소성은 장기 지속성을 이어 오고 있다.
특히 창평현령 박흥생의 용담정 중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용담정은 담양 정자 문화의 기원을 15세기 초반으로 소급하게 한다. 이는 정자 문화가 16세기 면앙정이나 식영정 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일반 인식을 보완해 줄 또 다른 기록으로 여겨진다.
*자료
용담정 중건 서문【창평 현령 시절에 지었다.】 / 龍潭亭重新序【宰昌平時】
성상 5년(1423, 세종 5년) 봄, 명을 받들고 남으로 와서 현을 다스리는 여가에 두루 다니며 보니, [창평]현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구불구불 서쪽으로 내려가면서 펑퍼짐한 봉우리를 이루었다. 수목이 울창하여 푸른 비단을 짜놓은 듯하였으며, 성의 보루 터가 아직도 있었는데 바로 봉우리와 맞서 암석이 가파르게 서서 성의 담을 이루었고, 꼬불꼬불한 산골시내는 맑은 연못이 되어서 깨끗하게 고여 있는데 그곳에 대(臺)가 있는데, 용담(龍潭)이라 한다. 이전의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들보와 서까래를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다. 세월이 오래되자 그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겨우 비와 볕만 가릴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백성을 다스리며 은근히 홀로 정자를 염원하였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지엽적인 일이었다. 비록 그러하나 창평의 고을 됨이 지세가 궁벽하고, 관사의 중방 규모가 이웃 고을과 비교하여 더욱 좁았다. 뜨거운 햇볕이라도 내리쬐면 돌도 삭이고 쇠도 녹일 정도여서, 찌는 더위의 고통이 불을 피운 화로 속에 사는 것과 같았다. 무릇 사신이 물가를 찾고, 시인이 시를 읊으려고 한다면 어느 곳이 영감을 드러낼 곳이겠는가? 이 때문에 틈을 내어 노는 사람을 시켜 산에서 재목을 구하고, 들에서 풀을 베어오니 공사의 재물도 안 들고 백성에게 부역도 시키지 않고 옛 규모를 넓혀서 채색하는 일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편액하기를, '이요정'이라 하였다.
가까이 보면 맑은 여울에 달이 일렁이고, 푸른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맑고 상쾌한 기운이 가슴에서 저절로 생겨난다. 멀리 보면 높은 봉우리가 하늘로 솟아 구름과 연기가 변화무쌍하여 그윽한 풍치가 다 눈앞에 모여 있으니, 비록 더위가 치열하다해도 정신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어찌 명사를 맞이하여 스스로 좋아 하고 분수에 사치스럽게 구경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겠는가? 뒷날의 군자는 이 미쳐서 참람한 일을 벌인 죄를 용서하리라.
드디어 두 가지 좋아함[이요, 二樂]과 두 가지 맑음[쌍청, 雙淸] 사이에 흥취를 붙여서 인자함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지혜로움으로 일을 처리하며, 번잡함에서 휴식하고 한가로움으로 나아가 마음을 넓히고 정신을 기쁘게 하여, 증자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는 취향으로 나아간다면, 아마도 정자가 그 구실을 하지 않겠는가? 이에 비루하고 졸렬함을 따지지 않고 이어서 시에 명현의 귀한 운을 사용하여 화답한다.[ 『국역 국당유고·이요당유고』, 도서출판 월인, 2018.]
龍潭亭重新序【宰昌平縣】
上之五年春。承命南來。治縣之暇。周草瞻眺。縣之南有山。蜿蜒西下。盤礴成峯。樹木蔥鬱。蒼翠綺綰。城堡之基尙存。直抵峯。嵒石峭立而成堞。鉅澗澄淵而潔滯。有臺曰龍潭。舊有草亭。樑棟欀桶。皆以竹爲之。歲久傾圮。聊蔽雨暘而已。爰自政民。竊獨惟念亭榭之於爲治。抑末矣。雖然。昌之爲邑。地勢洿僻。館舍廳房之制。比房邑尤隘。至若畏景流空。石鑠金消。則炎蒸之苦。若棲于烘爐中矣。凡使華原濕之咨。詞人瓊土之詠。顧何所以楊靈乎。是以間倩遊徒。取材于山。誅第于野。不鳩工。不役氏。增廣舊制。繪事亦畢。仍扁之曰二樂。近視則淸湍漾月。綠竹搖風。淸爽之氣。自生於襟懷。遠眺則峻嶺凌霄。雲煙萬變。幽閒之致。悉萃于目前。雖當炎熾。庶可怡神矣。然則斯亭之作。豈邀名自好。僭侈遊觀爲務哉。後之君子。恕其狂僭之罪。遂寓興於二樂,雙淸間。仁以愛民。智以制事。息繁就閑。心曠神怡。馴致乎浴沂風雩之趣。不其亭之爲乎。於是不揆鄙拙。繼之以詩。以資名賢之賡和云。[『鞠堂先生遺稿』(한국고전번역원,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8집 342면, 1990[한국고정종합DB])]
*참고문헌
박흥생‧박흥거 저, 박기용 역, 『국역 국당유고·이요당유고』, 도서출판 월인, 20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역 제봉전서』, 1980.
김희태, 「창평 용담대와 용담정, 무등산권 정자의 또 다른 기록」,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학산책,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05[https://www.hiks.or.kr/HonamHeritage/1/read/2275, 2022.11.05.]
김희태, 「15세기 초반, 창평현령 박흥생의 용담정」, 『한국의 가사문학』 2026 (근간)
*출전 : 김희태, 「창평 용담대와 용담정, 무등산권 정자의 또 다른 기록」, 『담양문화』, 『문화담양』 34호, 담양문화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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