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28
담양·창평의 문과 급제자와 주요 사족의 활동
김희태
| 차례 담양과 창평의 ‘사족’ 기록을 살펴보다 1. 조선시기의 담양 연혁과 주요 성씨 2. 담양 지역 문과 급제자와 성씨별 현황 1) 담양도호부 문과 급제자 2) 창평현 문과 급제자 3) 담양 본관 성씨 문과 급제자 3. 담양의 주요 사족과 사림의 활동 1) 담양이씨(潭陽李氏) 2) 담양전씨(潭陽田氏) 3) 창령조씨(昌寧曺氏) 4) 문화유씨(文化柳氏) 5) 제주양씨(濟州梁氏) 6) 장흥고씨(長興高氏) 7) 나주오씨(羅州吳氏) 8) 신평송씨(新平宋氏)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알려져 집성되기를 |
담양과 창평의 ‘사족’ 기록을 살펴보다
「담양지역 주요 ‘사족’ 관련 기록과 자료」를 주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전북대학교 이재연구소 워크숍(2025.01.20.~21., 담양)에 참여하여 강의를 하고 토론을 하였다. 이야기를 이어 가면서 죽록원, 향토책방, 관방제림 거리를 돌아 보았다. ‘과거연보 DB구축사업’ 연구팀을 중심으로 12명이 함께 했다. 한문종, 전경목, 박순철, 박정민, 류호석, 송만오, 김영준, 김은정, 최명숙, 김병곤, 노유진, 조유라. 참여한 분들을 보면 필자가 강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배움을 청해야 할진데, 차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강의자료는 조선시기의 담양 연혁과 주요 성씨, 담양 지역 문과 급제자와 성씨별 현황, 담양의 주요 사족과 사림의 활동,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 현판과 시권 등으로 정리했는데 ‘하여면앙정’ 시권은 봄호에서 소개했다. 주요 사족은 고영진교수의 글(「담양사림(유학)의 형성과 학맥」)에서 간추려 인용하면서 보완하였다. 고려조의 인물도 함께 살펴 보았다.
‘사족(士族)’은 지역의 의미를 곁들여 ‘재지사족(在地士族)’이란 용어도 있다. 주로 조선 시대에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 계층을 이르던 말이다. 이번 논의는 주로 조선시대 자료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다만, 사회의 지배 주류 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통일신라기나 고려의 성씨 집단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는 있다. <개선사지 석등기>(경문왕 8, 咸通 9, 868년)에 나오는 전 국자감경 사간 김중용(前國子監卿沙干金中庸), 고려시기 문과 급제자인 이영간과 이성, 백적(백제)도원수를 칭하면서 후백제부흥운동을 펼친 원율현의 이연년 등의 출자와 성씨 집단에 대한 것 등이다.
1. 조선시기의 담양 연혁과 주요 성씨
지금의 담양군에는 세 개의 고을이 있었다. 대전면 일부는 광주목(광산현)에 속했기 때문에 4개 군현이 관련된다. 담양읍과 무정면 부근에 담양부(추자혜군, 추성군, 담주), 금성면 일원에 원율현(율지[복]현, 율원현), 창평면과 고서면, 남면 일원에 창평현(굴지, 기양, 명평) 등이다. 1018년(현종 9)에는 무주에서 나주로 소속이 바뀌며 1232년(고종 19)에는 원율현에서 이연년이 주도하여 후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다. 담양은 1395년에 담양군, 1398년 담양부로 승격하며, 1413년에 담양도호부가 된다. 1728년 담양현이 되었다가 1738년 담양도호부, 1762년 담양현, 1772년 다시 담양도호부가 된다. 창평현은 1474년 혁파되어 광주에 예속되었다가 1478년 창평현으로 복구된다. 1908년 옥과군이 창평군에 합해졌다가 1914년 옛 옥과군 지역은 곡성에 넘겨주고 창평군은 담양군에 합해진다.*1)(주석, 이하 같음)
이처럼 담양지역은 고려중기까지는 나주의 속현이었다가 명종 때에 감무(監務)가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주현(主縣)의 읍격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 위격(位格)이 두 번에 걸쳐 크게 변했다.
먼저,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는데, 1395년(태조 4)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탄생지라 하여 감무관에서 지군사(知郡事, 군수)로 승격되었다. “담양현(縣)을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니, 국사(國師) 조구의 고향인 때문이었다.”*2)라 하여 현(縣)에서 군(郡)으로 등급이 오른 것이다.
국사 조구는 고려 말기 1310년대 후반에서 1320년대 초기에 담양에서 출생해 조선 초기까지 활동했던 천태종의 고승이다. 조선왕조 개창 바로 앞서 당시 불교계의 큰 종파였던 교종과 선종을 두루 관장하는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자리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인 1394년(태조 3)에 국사로 책봉됐으며, 1395년(태조 4) 11월 14일에 입적하였다. 조구의 저술로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가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유식(唯識)사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저술이다.
다음으로는 군에서 부(府)로 승격되는데, “담양군을 승격시켜 담양부(府)로 삼았으니, 덕비(德妃)의 외가가 있는 고을이기 때문이었다.”*3)라 하여, 조선의 2대 국왕인 공정왕(恭靖王, 定宗, (1357~1419, 재위 1398.09.05.~1400.11.20)의 왕비 김씨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군에서 부(府)로 승격됐다.
공정왕비 김씨(1345~1412, 定安王后)는 경주김씨 김천서(金天瑞)와 담양이씨(이예의 녀)의 딸이다. 태조의 둘째아들 이방과(李芳果)와 혼인했는데, 1398년(태조 7)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그 해 9월에 형인 이방과를 왕으로 옹립해 이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했고, 김씨는 덕비(德妃)로 진봉(進封)됐다. 왕에 오른지 2년만인 1400년에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순덕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다. 김씨가 왕비가 된 1398년 11월에 왕비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담양이 부로 승격된 것이다.
담양지역의 성씨 가운데 담양의 토성으로 “이(李) 전(田) 전(全) 국(鞠)” 4개 성씨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데 “이(李)”씨는 맨 처음 올라 있다. 이 담양이씨 이예의 딸이 정종 왕비가 되고 외가 고을인 담양군은 담양부로 승격된 것이다.
담양도호부의 4개 토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박(朴), 현(玄), 김(金)(래성)이 추가된다. 창평현(창평, 고서)에는 토성(6)으로 안(安), 조(曹), 신(辛), 정(丁), 김(金), 탁(卓), 경래성(3)으로 이(李), 함(咸), 정(鄭), 속성으로 문(文, 開城, 향리)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全), 성(成)이 추가되며 문(文)이 없어진다.
담양에 속한 원율(原栗)현(금성면 일원)에는 성(5)으로 박(朴), 이(李), 문(文), 배(裵), 오(吳)가 나온다. 창평에 속한 갑향(甲鄕)현(대전면 일원)에는 성으로 진(陳), 승(昇)이 나온다.
이외에 담양에 속한 정석(貞石)부곡(무정면 정석리 일원)에는 망성으로 현(玄), 신(辛), 속성으로 김(金)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玄), 신(辛)이 없어진다. 창평에 속한 장평(長平)부곡(수북면 일원)에는 성(4)으로 신(辛), 현(玄), 김(金), 원(元)이, 망성으로 박(朴)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유(柳) 대신 박(朴)으로 표기된다.
<표 1> 지리지와 읍지에 기록된 담양지역의 성씨
| 군현 | 세종실록지리지(1454) | 신증동국여지승람 (1481/1530) |
담양-추성지(1758) 창평-여지도서(1759) |
읍지[담양] (1832)(고궁) |
||
| 담양도호부 | 담양 | 土姓 | 李 田 全 鞠 | 李 全 田 鞠/朴 玄 金[竝來] | 田 鞠(土居) 李 全 朴 玄 金[竝來] | 田[秋成] 鞠[秋成] 李[秋成] 全[秋成] 朴[秋成] 玄[秋成] 金[秋成] |
| 原栗 | 姓 | 朴 李 文 裵 吳 | 朴 李 文 裵 吳 | 朴 文 裵 李 吳 | ||
| 貞石 | 亡姓 | 玄 辛 | 金 | 金 | 朴[貞石] 文[貞石] 裵[貞石] 李[貞石] 吳[貞石] 金[貞石] | |
| 續姓 | 金 | |||||
| 창평현 | 창평 | 土姓 | 安 曺 辛 丁 金 卓 | 安 曺 辛 丁 金 卓 全 成/李 咸 鄭[竝來] | 安[竹山] 曺[昌寧] 丁[靈光] 金[光山] 全[天安] 李[完山] 鄭[延安] 金[延安] 柳[文化] 玄[延州] 高[長興] 梁[濟州] 朴[咸陽] 南[宜寧] 吳[羅州] 曺[昌平] 林[平澤] 盧[光山] 蔡[平康] 尹[坡平] 金[慶州] 李[星州] 羅[羅州] 宋[洪州] 房[南州] 薛[玉川] 禹[丹陽] 徐[利川] 崔[江華] 李[全州] 奇[幸州] 李[延安] 文[南平] 朱[綾州] 李[水原] 鞠[潭陽] 朴[密陽] 李[淸安] 吳[海州] 申[高靈] 金[扶安] 朴[珍原] 郭[玄風] | |
| 京來姓 | 李 咸 鄭 | |||||
| 續姓 | 文[開城來鄕吏] | |||||
| 長平 | 姓 | 辛 玄 金 元 | 辛 金 柳 [一作朴]/玄 元 | |||
| 亡姓 | 朴 | |||||
| 甲鄕 | 姓 | 陳 昇 | 陳 昇 | |||
조선후기 담양 지역의 성씨는 『여지도서』 (1759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만, 담양도호부는 『여지도서』에서 누락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담양읍지로 『추성지』(1758)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같다. 『여지도서』 창평현*4) 성씨조에는 43개 성씨가 본관과 함께 올라 있다. <표 2>에는 등재 순서대로 기록하였는데, 이해의 편의를 위해 가나다순으로 옮겨 본다.(밑줄 고딕체는 문과급제자 배출 성씨)*5)
高[長興] 郭[玄風] 鞠[潭陽] 奇[幸州] 金[慶州] 金[光山] 金[扶安] 金[延安] 南[宜寧] 羅[羅州] 梁[濟州] 盧[光山] 柳[文化] 李[星州] 李[水原] 李[延安] 李[完山] 李[全州] 李[淸安] 林[平澤] 文[南平] 朴[密陽] 朴[珍原] 朴[咸陽] 房[南州] 徐[利川] 薛[玉川] 宋[洪州] 申[高靈] 安[竹山] 吳[羅州] 吳[海州] 禹[丹陽] 尹[坡平] 全[天安] 丁[靈光] 鄭[延安] 曺[昌寧] 曺[昌平] 朱[綾州] 蔡[平康] 崔[江華] 玄[延州]
담양에서 50호 이상 거주 성씨는 10개 성씨로 조사 된 바 있는데, 김해김(무정면 봉안리, 55), 함양박(창평면 유곡리, 76), 문화유(柳)(창평 해곡리, 67), 남원윤(금성면 대곡리, 50), 경주이(월산면 월평리, 50), 영천이(대전면 대치리, 155), 연일정(鄭)(남면 지곡리, 95), 하남정(程)(봉산 대추리, 61), 순창조(趙)(금성면 금성리, 50), 경주최(대전 중옥리, 53) 등이다.(밑줄 고딕체는 문과급제자 배출 성씨)*6)
2. 담양 지역 문과 급제자와 성씨별 현황
담양 지역의 문과 급제자를 살펴 보면 담양 17명, 창평 28명이 확인된다.*7) 거주지가 담양으로 확인된 인물을 정리한 것이라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이 급제했을 것으로 보인다. 담양 본관 성씨는 3개 성씨 16명이다.
1) 담양도호부 문과 급제자
담양도호부 거주 문과급제자는 17명(13개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는 나씨가 3명이다. 방목에는 본관이 나주로 표기되어 있으나 나주본관과 금성본관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신평송씨는 2명인데, 송순은 회방연을 한 바도 있다. 이어 홍주송씨 2명이고, 광산김씨 등 10개 성씨는 1명씩 배출한다.
○나주[금성]나씨(3) : 나무송(羅茂松) 나무춘(羅茂春) 나위문(羅緯文)
○신평송씨(2) : 송순(宋純) 송돈(宋燉)
○홍주송씨(2) : 송정황(宋庭篁) 송두문(宋斗文)
○광산김씨, 김해김씨. 남원윤씨. 밀양박씨, 수안전씨, 순천김씨, 장흥고씨, 전주이씨, 함양여씨, 함평이씨(1)
<표2> 담양 문과 급제자
| 번 | 인명 | 자 | 호 | 재세 | 본관 | 연대 | 종별 | 합격등급 | 父 | 지역관련 |
| 1 | 송순 宋純 |
守初 誠之 |
俛仰亭 企村 拙齋 |
1493~1582 | 신평 新平 |
1519 중종14 |
별시 | 을과1[探花] | 宋泰 | 담양 면앙정/1533, 가단 俛仰集, 담양 龜山祠, 시호 肅定 1579 회방연, 1798 하여면앙정 |
| 2 | 송정황 宋庭篁 |
천경 天擎 |
- | 1532~1557 | 홍주 洪州 |
1556 명종11 |
별시 | 병과3위 | 宋駒 | 兄 : 宋庭筍[文](居 미상, 구산사) 순창 훈몽재 1553 함경 종성 朱子文錄 편저 子 송제민,의병 正字宋公遺稿 |
| 3 | 김존경金存敬 | 수오 守吾 |
죽계 竹溪 |
1569~1631 | 광산 光山 |
1599 선조32 |
별시 | 병과11위 | 金彦勗 구산사 |
|
| 4 | 나무춘 羅茂春 |
耆之 大年 |
九華 九峯 |
1580~1619 | 羅州 錦城 |
1612 광해 4 |
식년시 | 병과6위 | 羅德用 | 外祖:宋廷筍[文] 담양 龜山祠 동복 물염정 |
| 5 | 나무송 羅茂松 |
수부 秀夫 |
창랑 滄浪 |
1577~1653 | 羅州 錦城 |
1615 광해 7 |
알성시 | 병과3위 | 羅德用 | 外祖:宋廷筍[文] 滄洲文集 동복 물염정 |
| 6 | 송두문 宋斗文 |
자첨 子瞻 |
- | 1601 ~? | 홍주 洪州 |
1624 인조 2 |
식년시 | 을과5위 | 宋受益[進] | |
| 7 | 나위문 羅緯文 |
성휘 聖輝 |
반곡 盤谷 |
1602~1653 | 나주 羅州 |
1642 인조20 |
식년시 | 갑과2[榜眼] | 羅茂春[文] | |
| 8 | 이익신 李益新 |
군환 君煥 |
- | 1602~? | 함평 咸平 |
1642 인조20 |
식년시 | 병과17위 | 李大英 | 曾祖:李邦柱[文] (居 : 光州) |
| 9 | 윤시명 尹時鳴 |
원숙 遠叔 |
- | 1634~? | 남원 南原 |
1687 숙종13 |
식년시 | 을과1위 | 尹珽 | |
| 10 | 김담 金潭 |
- | - | 1756~? | 순천 順天 |
1780 정조 4 |
식년시 | 을과6위 | 金載秋 | |
| 11 | 고택겸 高宅謙 |
- | - | 1732~? | 장흥 長興 |
1780 정조 4 |
식년시 | 병과16위 | 高萬旭 | |
| 12 | 박휘 朴暉 |
- | - | 1735~? | 밀양 密陽 |
1783 정조 7 |
증광시 | 병과23위 | 朴弼憲 | |
| 13 | 김문택 金文澤 |
- | - | 1767~? | 김해 金海 |
1807 순조 7 |
식년시 | 병과18위 | 金得麗 | |
| 14 | 전제현 田齊賢 |
- | - | 1787~? | 遂安 潭陽 |
1816 순조16 |
정시 | 병과10위 | 田躍龍 | |
| 15 | 송돈 宋燉 |
爾晦 | - | 1777~? | 신평 新平 |
1846 헌종 2 |
식년시 | 병과4위 | 宋文楫 [文](居:미상) |
|
| 16 | 여선기 呂善驥 |
- | - | 1810~? | 함양 咸陽 |
1867 고종 4 |
식년시 | 병과34위 | 呂鼎周 | |
| 17 | 이준선 李駿善 |
- | - | 1820~? | 전주 全州 |
1873 고종10 |
식년시 | 병과23위 | 李奎彬 |
2) 창평현 문과 급제자
창평현 문과급제자는 27명(14개 성씨) 가운데 연일정씨가 7명으로 가장 많다. 정홍명의 부친 정철도 문과 급제를 했고, 형 정기명(鄭起溟), 정종명(鄭宗溟), 정진명(鄭振溟)은 진사이다. 정방의 숙부 정택하(鄭宅河)도 문과급제자이다. 정류와 정청은 형제간이고, 정재건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나주오씨는 4명으로 오희도와 오이규는 부자간인데, 오이규의 동생 오이익(吳以翼, 거주지 京)은 문과 급제를 했고, 형 오이두(吳以斗)와 동생 오이정(吳以井)은 생원이다. 오정원과 오한원은 형제인데 오이정의 증손이며 부친 오현주(吳鉉胄)도 문과급제를 했다. 장흥고씨와 창령조씨는 3명이다. 조홍립과 조수는 부자간이다. 강화최씨 등 11개 성씨는 1명이다.
○영일정씨(7) : 정홍명(鄭弘溟), 정귀(鄭氵+龜)[監], 정방(鄭枋), 정류(鄭鎏), 정청(鄭㵙, 정류 弟), 정재건(鄭在健), 정해두(鄭海斗)[知]
○나주오씨(4) : 오희도(吳希道), 오이규(吳以奎, 오희도 子), 오정원(吳鼎源), 오한원(吳翰源, 우정원 弟)
○장흥고씨(3) : 고시신(高時臣), 고시홍(高時鴻), 고정주(高鼎柱)
○창녕조씨(3) : 조호(曺浩, 父 : 曺秀文), 조홍립(曺弘立), 조수(曺璲, 조홍립 子)
○강화최씨, 廣州이씨, 나주나씨, 단양우씨, 문화유씨, 밀양박씨, 언양김씨, 연안김씨, 의령남씨, 죽산안씨, 함양박씨(1)
<표3> 창평 문과 급제자
| 번 | 인명 | 자 | 호 | 재세 | 본관 | 연대 | 과 | 등급 | 父 | 지역관련 |
| 1 | 조호 曺浩 |
호연 浩然 |
雲谷 | ?~? | 창녕 昌寧 |
1489 성종20 |
식년시 | 을과2위 | 曺秀文 | 담양 죽림서원 |
| 2 | 김자수 金自修 |
성중 誠仲 |
- | ?~? | 언양 彦陽 |
1507 중종 2 |
증광시 | 병과21위 | 金石川 | 담양 上月亭 |
| 3 | 이원화 李元和 |
화지 和之 |
연곡 淵谷 |
?~? | 광주 廣州 |
1507 중종 2 |
증광시 | 병과26위 | 李精秀 | |
| 4 | 유옥 柳沃 |
계언 啓彦 |
석헌 石軒 |
1487~1519 | 문화 文化 |
1507 중종 2 |
식년시 | 1등1[壯元]위 | 柳文豹 | 愼妃復位疏 석헌집, 시호 靖簡 순창 花山書院 |
| 5 | 조홍립 曺弘立 |
극원 克遠 |
수죽헌 數竹軒 |
1558~1640 | 창녕 昌寧 |
1588 선조21 |
식년시 | 갑과3[探花]위 | 曺光福 | |
| 6 | 정홍명 鄭弘溟 |
자용 子容 |
기암 畸菴 |
1582~1650 | 영일 迎日[監] |
1616 광해 8 |
대증광시 | 병과16위 | 鄭澈[文] | 시호 文貞 기옹집, 기옹만필 |
| 7 | 오희도 吳希道 |
득원 得原 |
명곡 明谷 |
1583~1623 | 나주 羅州 |
1623 인조 1 |
알성시 | 병과1위 | 吳言彪 | 명곡유고 담양 명옥헌 |
| 8 | 김위 金瑋 |
경온 景溫 |
- | 1592~? | 연안 延安 |
1628 인조 6 |
별시2 | 병과1위 | 金仁洽 金仁漑(生父) |
妻父 : 朴汝樑[文] |
| 9 | 조수 曺璲 |
자장 子長 |
- | 1587~? | 창녕 昌寧 |
1628 인조 6 |
별시2 | 병과8위 | 曺弘立[文] | |
| 10 | 박영철 朴英喆 |
숙명 叔明 |
- | 1566~? | 밀양 密陽 |
1633 인조11 |
식년시 | 병과20위 | 朴洪禎 | |
| 11 | 우유일 禹惟一 |
자윤 子允 |
二友堂 | 1614~? | 단양 丹陽 |
1646 인조24 |
식년시 | 병과11위 | 禹寔 | 창평 內洞祠宇 |
| 12 | 오이규 吳以奎 |
빈중 贇仲 |
지천 支川 |
1608~1653 | 나주 羅州 |
1650 효종 1 |
증광시 | 병과6위 | 吳希道[文] | 支川逸稿 |
| 13 | 남언욱 南彦彧 |
여성 汝成 |
- | 1703~? | 의령 宜寧 |
1735 영종11 |
식년시 | 을과4위 | 南履陽 | |
| 14 | 최명옥 崔鳴玉 |
자성 子成 |
- | 1713~? | 강화 江華 |
1740 영조16 |
대증광시 | 병과35위 | 崔萬瞻 | |
| 15 | 나충좌 羅忠佐 |
양필 良弼 |
- | 1728~? | 나주 羅州 |
1750 영조26 |
식년시 | 병과16위 | 羅景益 | |
| 16 | 정방 鄭枋 |
계직 季直 |
삼청재 三淸齋 |
1707~1789 | 영일 迎日[知] |
1753 영조29 |
식년시 | 병과4위 | 鄭敏河 (죽림서원) |
담양 식영정 孝子歌, 시호 孝憲 叔父 : 鄭宅河[文] |
| 17 | 안치방 安致邦 |
재중 載重 |
원봉 圓峰 |
1709~1765 | 죽산 竹山[新] |
1756 영조32 |
식년시 | 을과7위 | 安晩裕 | |
| 18 | 오정원 吳鼎源 |
- | - | 1741~? | 나주 羅州 |
1766 영조42 |
정시4 | 병과9위 | 吳鉉胄[文] 居 : 미상 |
|
| 19 | 오한원 吳翰源 |
공예 公藝 |
- | 1750~? | 나주 羅州 |
1775 영조51 |
정시 | 병과6위 | 吳鉉胄[文] | |
| 20 | 고시신 高時臣 |
- | - | 1771~? | 장흥 長興 |
1810 순조10 |
식년시 | 병과1위 | 高元謙 | |
| 21 | 정귀 鄭氵龜 |
우서 禹瑞 |
지포 芝圃 |
1797~1861 | 영일 迎日[監] |
1825 순조25 |
식년시 | 병과5위 | 鄭在涵 | |
| 22 | 정류 鄭鎏 |
공려 公麗 |
지산 芝山 |
1801~1864 | 영일 迎日[知] |
1831 순조31 |
식년시 | 병과7위 | 鄭在洙 | |
| 23 | 고시홍 高時鴻 |
- | - | 1803~? | 장흥 長興 |
1849 헌종15 |
식년시 | 갑과3[探花]위 | 高進謙 | |
| 24 | 정청 鄭㵙 |
경려 景麗 |
기사 磯史 |
1821~1908 | 영일 迎日[知] |
1865 고종2 |
식년시 | 을과5위 | 鄭在洙 | |
| 25 | 박동귀 朴東龜 |
- | - | 1799~? | 함양 咸陽 |
1867 고종4 |
식년시 | 병과35위 | 朴聖洙 | |
| 26 | 정재건 鄭在健 |
계주 啓周 |
소송 小松 |
1843~1910 | 영일 迎日[知] |
1888 고종25 |
식년시 | 병과1위 | 鄭㝡煥 | 옥과 입평면(입면) 경술국치 자결 순국 小松遺稿 고흥 德陽書院, 진안 永光祠, 駬山廟 건국훈장 애국장 |
| 27 | 고정주 高鼎柱 |
보현 寶鉉 |
춘강 春崗 |
1863~1933 | 장흥 長興 |
1891 고종28 |
대증광시 | 병과18위 | 高濟升 | 昌平英學塾, 昌興義塾, 春崗集 |
| 28 | 정해두 鄭海斗 |
윤칠 允七 |
- | 1858~1932 | 영일 迎日[知] |
1891 고종28 |
식년시 | 병과26위 | 鄭澾 |
한편, 『추성지』(1758년, 미암박물관 소장)의 면별 문과 항목 기록 인물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자료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〇서변면 : 김자민(金自敏)[부사]
〇답곡면 : 채신로(蔡莘老)[부사], 채하룡(蔡河龍)[헌납], 송정황(宋庭篁)[정자], 나무송(羅茂松)[정랑], 이방주(李邦柱)[교리], 송두문(宋斗文)[부사], 나위문(羅緯文)[도사], 이익신(李益新)[찰방], 박규환(朴奎煥)[군수, 첨추]
〇우치면 : 송세충(宋世忠)[군수]
〇목산면 : 윤시명(尹時鳴)[좌랑, 문효공 윤효손 6세손]
〇산막곡면 : 이성청(李聖淸)[본관 尙州, 담양부사, 仍居]
〇고지산면 : 조형겸(趙亨謙)[조원길 14대손, 정묘(1747 영조23) 經科, 전적], 한동악(韓東岳)[경과, 학록]
3) 담양 본관 성씨 문과 급제자
담양을 본관으로 성씨 가운데 문과 급제자는 3개 성씨 16명이 확인된다. 담양전씨(潭陽田氏)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담양이씨(潭陽李氏) 2명, 담양국씨(潭陽鞠氏) 1명이다. 거주지가 방목에 기록되었거나 보완된 급제자는 11명인데, 거주지가 담양으로 기록된 이는 없다. 거주지 별로 보면 전주(1), 결성(2), 홍주(1), 연기(1), 밀양(1), 안동(1), 정산(1), 남양(1), 정주(1), 선천(1) 등 10개 군현이다. 전빈과 전속은 형제간이다. 거주지 미상은 5명이다.
<표 4> 담양 본관 성씨 문과 급제자
| 연 | 인명 | 자 | 호 | 생몰년 | 문과 | 본관 | 부친 | 거주 | 합격등급 |
| 1 | 이견의(李堅義) | - | - | ?~? | 1429 세종11 식년시 | 담양 | 李德林 | 미상 | 동진사7위 |
| 2 | 이담룡(李聃龍) | 성언(聖言) | - | 1523~? | 1570 선조3 식년시 | 담양 | 李龜 | 密陽 | 병과1위 |
| 3 | 국경례(鞠經禮) | - | - | 1428~14 | 1451 문종1 대증광시 | 담양 | 鞠襦 | 미상 | 정과4위 |
| 4 | 국민(鞠旻) | 유원(悠遠) | - | 1611~? | 1663 현종4 식년시 | 담양 | 鞠大雄 | 全州 | 병과18위 |
| 5 | 전가식(田可植) | 미재(美哉) | 성암(省菴) | ?~? | 1399 정종1 식년시 | 담양 | 田畝 | 미상 | 을과1[장원]위 |
| 6 | 전예(田藝) | 춘백(春伯) | 죽당(竹堂) | ?~? | 1399 정종1 식년시 | 담양 | 田恒 | 미상 | 동진사16위 |
| 7 | 전구주(田九疇) | 석우(錫禹) | 퇴암(退庵) | 1491~1553 | 1516 중종11 식년시 | 담양 | 田士發 | 定山 | 병과15위 |
| 8 | 전승개(田承漑) | 개지(漑之) | 모재(茅齋) | ?~? | 1517 중종12 별시 | 담양 | 田實 | 洪州 | 3등9위 |
| 9 | 전여림(田汝霖) | 사열(士說) | 국헌(菊軒) | ?~1576 | 1534 중종29 식년시 | 담양 | 田沃 | 南陽 | 병과16위 |
| 10 | 전위(田煒) | 이회(而晦) | - | 1564~? | 1601 선조34 식년시 | 담양 | 田有秋 | 燕岐 | 병과12위 |
| 11 | 전빈(田馪) | 자훈(子薰) | - | 1613~? | 1633 인조11 식년시 | 담양 | 田擢英 | 結城 | 병과5위 |
| 12 | 전속(田{香+束} | 자원(子遠) | - | 1620~? | 1662 현종3 대증광시 | 담양 | 田擢英 | 結城 | 을과7위 |
| 13 | 전시우(田時雨) | 자시(子施) | - | 1670~? | 1715 숙종41 식년시 | 담양 | 田潤秋 | 미상 | 병과23위 |
| 14 | 전재오(田栽五) | - | - | 1807~? | 1831 순조31 식년시 | 담양 | 田良元 | 定州 | 병과28위 |
| 15 | 전석원(田錫元) | - | - | 1874~? | 1874 고종28 식년시 | 담양 | 田學鷹 | 宣川 | 병과23위 |
| 16 | 전규풍(田圭豊) | - | - | 1874~? | 1893 고종 30 정시 | 담양 | 田龍洽 | 安東 | 병과14위 |
담양 본관 성씨로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는 담양이씨 2인이 확인된다. 이영간(李令幹, ?~?)과 이성(李晟, 1251~1325)이다. 거주지는 미상으로 나온다.
한편, 사마시는 생원시 담양 54명, 창평 55명, 진사시 담양 24명, 창평 60명이 확인된다. 담양 생원시 합격자는 26개 성씨로 광산김씨가 7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경주이씨(4명), 고성채씨(固城蔡氏)(3), 신평송씨(3), 홍주송씨(3), 안동권씨(3), 남원윤씨(2), 나주[금성]나씨(2), 밀양박씨(2), 전주이씨(2), 흥양이씨(2), 청도김씨(2), 함양여씨(2) 등이다. 창평 생원시 합격자는 24개 성씨로 영일정씨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나주오씨(6), 연안김씨(4), 장흥고씨(4), 창평조씨(昌平曺氏)(4), 함양박씨(4), 문화유(柳)씨(2), 제주양씨(2), 창녕조씨(昌寧曺氏)(2) 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살피고자 한다.
3. 담양의 주요 사족과 사림의 활동
1) 담양이씨(潭陽李氏)
담양이씨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는 이견의(李堅義, 1429년 세종 11, 거주지 미상)와 이담룡(李聃龍, 1523~?, 1570년 선조3 식년시, 거주지 밀양)이다. 담양 거주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담양이씨는 고려 문과 급제자는 이영간과 이성이다. 이영간은 1040년(정종 6) 5월 사관수찬이 되었고, 1042년 12월 비서소감 겸 한림시강학사(秘書少監兼翰林侍講學士)가 되었다. 1052년(문종 6) 7월 예부상서가 되었다가 그해 9월 한림학사가 되었다. 1056년 4월 상서우복야로서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복시(覆試)를 행하여 이간방(李幹方) 등 13인과 은사(恩賜) 2인, 명경(明經) 4인을 급제하게 하였다.
이성(李晟, 1251~1325)은 약관에 과거에 합격해 온수감무·수원사록 등을 역임하다 임기가 다 되자 고향의 죽계촌사(竹溪村舍)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이후 천거로 국자박사에 임명돼 국자감 학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1309년 좌사보에 올랐으나 다시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때 일시의 명유들이 이성의 초당)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전송했다 한다. 충선왕이 연경에 있으면서 그의 명성을 듣고 내서사인에 임명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314년 낙향했다.
뒤에 화평부사가 됐으나 얼마 되지 않아 또 사직했다. 화평부(化平府)는 1310년(충선왕 2)~1362년(공민왕 11) 사이 광주(光州, 광산)의 읍격이다. 사람됨이 질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책을 놓지 않았으며, 이르는 곳마다 배우려는 자가 구름과 같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오경사[五經笥]라 불렀다.*8)
2) 담양전씨(潭陽田氏)
담양전씨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12명이 확인되는데, 전가식(田可植, ?~? ; 1399년, 정종 1 급제), 전예(田藝, ?~? ; 1399년, 정종 1), 전구주(田九疇, 1491~1553 ; 1516년, 중종 11), 전승개(田承漑, ?~? ; 1517년, 중종 12), 전여림(田汝霖, ?~1576 ; 1534년, 중종 29), 전위(田煒, 1564~? ; 1601년, 선조 34), 전빈(田馪, 1613~? ; 1633년, 인조 11), 전속(田{香+束, 1620~? ; 1662년, 현종 3), 전시우(田時雨, 1670~? ; 1715년, 숙종 41), 전재오(田栽五, 1807~? ; 1831년, 순조 31), 전석원(田錫元, 1874~? ; 1874년, 고종 28), 전규풍(田圭豊, 1874~? ; 1893년, 고종 30) 등이다.
거주지가 담양으로 표기된 급제자는 보이지 않지만, 전가식(田可植)과 전예(田藝)는 정종 1년 1399년 급제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과방목은 태조 2회, 정종 1회인데, 조선 건국기 세 번째 치러진 문과에서 담양 본관의 인물이 2명 급제한였다는 점에서이다. 특히 전가식은 합격 등급이 을과(乙科) 1위로서 당시는 갑과가 없었기에 장원 급제를 하였다. 그리고 전귀생의 아들이다. 전예(田藝)는 전록생의 아들이다.
전녹생(1318~1375 )은 고려 충혜왕 대 과거에 합격해 제주사록과 전교시 교감 등을 역임했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의 관리가 되어 당시 남의 토지를 강탈하던 원의 기황후의 족제인 기삼만을 잡아다 문초하다 옥사하는 일이 벌어져, 관련자들과 함께 원으로부터 조사받고 장형(杖刑)에 처해지기도 했다.*9) 공민왕 대 기거사인에 임명돼 이색·정추 등과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어 전라도안렴사로 나가서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는 방어체제를 개선할 것을 건의하는 등 안민(安民)을 위한 정책을 계속 주장했다.
전록생은 3형제였는데 전녹생의 호가 야은(埜隱), 동생 전귀생田貴生)의 호가 뇌은(耒隱), 전조생의 호가 경은(耕隱)이고 모두 학문과 시문에 능해 ‘삼은(三隱)’으로 불리었다. 전귀생(은 삼사좌윤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전조생은 찬성첨의 부사 등을 지내고 이색·정몽주 등과 교유했으며, 충정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호종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3) 창령조씨(昌寧曺氏)
창령조씨 문과급제자는 조호, 조홍립, 조수(曺璲) 3명이다. 조홍립과 조수는 부자간이다. 조수문의 아들 호연 조호(浩然 曺浩)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9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와 함양군수 등을 역임했으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조수문의 손자 조여심(曺汝諶)은 환학당(喚鶴堂)을 짓고 소세양·임억령·고경명 등과 교유했으며, 양자징 등과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을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조수문 가문은 성리학을 담양 지역에 전파하고 뿌리내리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소세양은 조호의 사위로 조여심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수죽헌 조홍립(數竹軒 曺弘立, 1558~1640)은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탐화랑(探花郎)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병조 정랑, 동부승지, 여주목사 등을 지냈다.
죽림 조수문(竹林 曺秀文, 1428~?)은 조부 산광 조대운(山狂 曺大運)이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었으며 부친 조유도(曺由道)는 고려 말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으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그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신구소(伸求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차 창평으로 내려와 성리학을 가르쳤다.*10)
조수문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김숙자의 학맥을 잇고 김종직과 학문적 교유를 했다.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했고 죽림재(竹林齋)를 지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고 『대학연의』·『근사록』·사서 육경 등을 강학했다.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학지남(聖學指南)」과 「척불론(斥佛論)」등의 저술을 남겼다. 죽림재는 대대로 창녕 조씨의 강학 장소로 이용됐다.
강학 공간인 죽림재는 담양군 고서면 잣정길 88-7 (분향리 338)에 있고 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내에 조수문, 조호, 삼청당 조부(三淸堂 曹溥, 1593~1656)를 배향한 죽림사가 있고, 1934년 고광선이 비문을 짓고 완산 이광수(李光秀)가 글씨를 쓴 「고려 문하시중 산광 조선생 보문각 직제학 조선생 원향기실비(院享紀實碑)」가 있다.
4) 문화유씨(文化柳氏)
문화유씨 문과 급제자는 유옥이 있다. 석헌 유옥(石軒 柳沃, 1487~1519)의 부친 유문표가 순창훈도를 역임하다가 창평으로 이거했다. 유옥의 조부 유인흡은 사육신 유성원의 6촌으로 세조 반정 때 화를 피하여 순창으로 은거했다. 유옥은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사간원 정언과 홍문과 교리·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1515년 무안현감 재직 때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등과 함께 순창 삼인대(三印 臺)에 모여 신비복위소를 올렸다. 박상은 남평에, 김정은 보은에 유배되었다.
당시 유옥은 노모가 있었지만 형제가 없어 죽게 되면 부양할 사람이 없게 된다면서 박상과 김정이 이름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해서 상소문에 이름을 넣지 않아 화를 면했다. 신비복위소는 호남유학이 의리명분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11) 1517년에는 「오조구폐장(五條救弊狀)」을 올려 북방 방어·군량 확보·병농 일치·조정 관리의 사치 금지·호포제 개선 등을 주장했으며, 1518년에는 한전제(限田制)와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했다.
5) 제주양씨(濟州梁氏)
제주양씨 사마시 합격자는 6명이 확인된다. 창평 생원으로 양천회(梁千會, 1563~1591), 양천지(梁千至, 1577~?), 진사는 양천운(梁千運, 1568~1637), 양경지(梁敬之, 1662~?), 양학연(梁學淵, 1708~?), 양천장(梁千章, 1580~?), 양몽우(梁夢禹, 1589~?)이다.
제주양씨는 소쇄옹 양산보(瀟灑翁 梁山甫, 1503~1557)의 부친 양사원이 종부시 주부 등을 지낸 뒤 광주에서 창평으로 이주했다. 양산보의 모친 신평송씨는 송희경(宋希璟, 1376~1446)의 증손녀이자 송순의 고모로 양산보와 송순은 고종사촌 간이다. 양산보는 광산김씨와 결혼하는데 김윤제와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양산보는 15살 때인 1517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1519년 현량과에 추천됐으나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능주에사 사사(賜死)되고 사림들이 화를 입자 통분하며 낙향해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 창암촌(蒼巖村)에 소쇄원을 경영하고 두문불출했다.
교유한 인물로는 김인후·송순·임억령·송인수·유희춘·이후백·오겸·이수·김언거 등이 있었다. 사돈인 김인후와 많은 교류를 했다. 양산보의 아들 양자징이 김인후의 사위였다. 양산보는 『소학』의 실천에 힘썼으며 효를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6) 장흥고씨(長興高氏)
장흥고씨 문과급제자는 4명이 확인되는데, 담양 거주자로 고택겸(高宅謙, 1732~? ; 1780년, 정조 4 급제), 창평 거주자로 고시신(高時臣, 1771~? ; 1810년, 순조 10), 고시홍(高時鴻, 1803~? ; 1849년, 헌종 15), 고정주(高鼎柱, 1863~1933, 1891년 ; 고종 28) 등이다. 그리고 광주 거주자이지만 담양·창평과 고경명은 아들 고종후, 고인후, 고용후, 손자 고부천 3대 5명이 문과에 급제한다. 고부천의 동생 고부즙은 생원, 고부량은 진사이다.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은 1563년 울산군수로 좌천됐다가 파직된 뒤 19년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어간에 광주 본가 보다는 창평 용담대(龍潭臺)에 거처하며 김성원과 양산보·송순·정철 등과 교유했다. 용담대는 식영정과 이웃한 곳이다.
고경명이 창평에 거처하게 된 것은 장인 김백균이 김성원의 고모부인 것도 계기라 하겠다. 고경명은 1558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1560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서도 1등을 해서 말 한 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 전역을 대상으로 6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담양에서 창의했으나 금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순절했다. 큰 아들 고종후는 복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했다. 고경명의 이러한 행동은 사상적으로 조광조 이래 사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도학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의열공(毅烈公) 학봉 고인후(鶴峯 高因厚, 1561~1592)의 자손들은 창평에 자리잡았다. 모친이 작고한 고인후의 자녀들이 부친도 임진왜란으로 순절하자 외가인 창평으로 와서 외조모인 언양김씨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고경명과 고인후는 금산전에서 순절한 뒤 화순 흑토평에 장례를 했는데, 뒤에 고경명은 장성 오동촌으로, 고인후는 창평으로 묘소를 옮겼다. 창평면 유천리(경동길 12-1)에 묘소와 부조묘, 종택이 있다.
고인후의 아들 고부천(高傅川, 1578~1636)은 1615년(광해군 7) 문과에 합격하고 1620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인조대 사헌부 장령·성균관 사예 등을 역임했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고인후의 12세손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 1848~1907)은 대한제국기 의병장으로 구례 연곡사 전투에서 순국했다.
7) 나주오씨(羅州吳氏)
나주오씨 문과 급제자는 4명이 확인되는데, 오희도(吳希道, 1583~1623 ; 1623년, 인조 1 급제), 오이규(吳以奎, 1608~1653 ; 1650년, 효종 1), 오정원(吳鼎源, 1741~? ; 1766년, 영조 42), 오한원(吳翰源, 1750~? ; 1775년, 영조 51)이다. 오희도와 오이규는 부자간이다. 오이규의 동생 오이익(吳以翼)도 문과에 급제하는데 거주지는 경(京)으로 나온다. 오이두의 형 오이두(吳以斗)와 동생 오이정(吳以井)은 생원이다. 그리고 오정원과 오한원은 형제간이다. 오정원 형제의 부친 오현주(吳鉉胄, 1715~?)도 문과에 급제하는데 거주지는 미상으로 나온다. 오현주는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의 증손이다.
명곡 오희도(明谷 吳希道, 1583~1623)의 부친 오언표 때 창평으로 옮겨왔다. 오희도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 문하에서 배웠으며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 문과에 합격해 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망재(忘齋)라는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넷째 아들 오이정이 1652년경 부친이 지내던 터에 명옥헌(鳴玉軒)을 짓고 원림을 꾸몄다. 오이정은 정홍명의 문인이다. 근처에는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인조가 세자 시절 전국을 돌아다니다 호남에 내려와 오희도를 세 번 찾아왔을 때 말을 이 나무에 매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8) 신평송씨(新平宋氏)
신평송씨 문과급제자는 2명으로 송순(宋純, 1493~1582 ; 1519년, 중종 14 급제)과 송돈(宋燉, 1777~? ; 1846년 헌종 2)이다.
면앙 송순(俛仰 宋純, 1493~1582)은 1519년 문과에 합격했다. 몇 차례 파직되거나 귀양간 적이 있지만 50년 동안 홍문관 직제학·사간원 대사간·전라도 관찰사·전주부윤·나주목사·의정부 우참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533년 면앙정을 창건하고 면앙정시단(俛仰亭詩壇)을 중심으로 신광한·성수침·나세찬·이황·정만종·송세형·홍섬·임억령·양산보 등과 교유했다. 1579년(선조 12) 면앙정에서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1798년 광주목 도과에서 정조가 송순의 회방연 일화를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라 시 부분 시제(試題)로 냈다.
조선초기에 형성된 호남사림의 학맥과 인맥은 크게 김굉필계열·최부계열·송흠계열·박상계열·이항계열·김안국계열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후에 호남사림은 크게 송순계열과 서경덕계열로 볼 수 있다. 송순 계열은 광주·장성·담양·창평 등 주로 전라좌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서경덕 계열은 나주·화순·함평·해남 등 주로 전라우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신평송씨는 송희경(宋希璟, 1376~1446)이 충청도 신평에서 담양으로 이주했으며 예문관 수찬과 함양군수 등을 지냈고, 1420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錄)』을 남겼다.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알려져 집성되기를
담양의 문과급제자를 살펴보면서 주요 사족의 활동도 정리해 보있다. 문과급제자는 문과방목 자료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현지를 탐문하다 보면 더 많은 자료가 드러날 것이다. 예를 들면 오희도의 아들 오이익처럼 방목 기록상의 거주지는 경(京)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자료들이 더 많이 찾아지고 집성되기를 기대한다.
문과급제자의 관련 자료 가운데 하나로 시권을 들 수 있다. 문집에 실린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시권을 모아 자료총서로 간행[『조선의 시권』Ⅰ·Ⅱ]된 바도 있다. 그런데 이번 자료를 준비하면 전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송순의 시권 관련해서이다. 후손가에 전해져 오던 문서로서 당연히 문집에 올라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예전 사진을 뒤적여 다시 살펴 보니 문집에는 책문·대책 1건이 올라 있고 이 시권은 실려 있지 않았다. 현지 설명문에는 “표문(表文) : 송순의 과거시험 답안지로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건의한 글이다.”라 되어 있다. 과거 시험 답안지이고 과목은 표문이라는 것이다. 문집에는 왜 오르지 않았을까.
송순은 중종 14년 별시에 급제한다. 중종대에는 56회의 문과가 실시되었고, 송순이 급제하던 중종 14년에는 식년시, 현량과, 별시 3회의 문과가 있었다. 식년시는 3월에 19일에 실시하여 28일 발표하였는데 29명(장원 박소)이 급제하였다. 현량과는 4월에 13일 실시하여 20일 방방을 하였는데 28명(장원 김식)을 뽑았다. 별시는 10월에 19일에 실시하여 11월 13일 방방을 하였는데 19명(장원 김필)이 급제하였다. 별시 사유는 “종계변무(宗系辨誣)”와 관련이 있다. 세 번의 시험 문제는 표기되지 않았고 과목만 ‘책문(策問)’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가사문학관 전시 시권이 혹여라도 송순이 별시에 급제하기 전에 응시했던 문과와 관련이 있는 시권, 어쩌면 현량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연보 DB구축사업’ 연구팀의 송만오교수도 그런 견해를 말하였다. 시제가 “擬漢朝羣臣賀元年詔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表[한나라 때 여러 신하들이, 황제가 즉위 원년에 어진 이와 바른 이를 선발하고 직언과 간언을 하는 선비들을 천거하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축하한 표문을 의작하다.]”라는 점에서 현량과와의 연관성이 있을 듯 싶어서이다. 지금까지 현량과의 시제는 알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다만, 현량과의 시험과목은 ‘책문’으로 알려진 점, ‘賢良方正 直言極諫之士’ 운운의 내용이 있는 시제는 문신 정시(庭試)의 시제에서도 보이고 있다는 점 등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시권』Ⅱ에는 기사년(숙종 15, 1689) 증광 초시에서 장원한 나이귀(羅以龜)의 표 시권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시험문제는 ‘표(表) 의당회서민인등사급복2년(擬唐淮西民人等謝給復二年)’였는데, 나이귀의 시권은 ‘唐諸州刺史謝命宰相百官餞於洛賓書賜十韻詩[당나라 재상과 백관들에게 명하여 낙수 가에서 전별하게 하고, 황제가 글로 십운시를 써 준 일에 대해 당나라 여러 주의 자사들이 사례하였다.]’이다.
또 하나 새로운 내용은 용담대와 용담정에 대해서이다. 창녕조씨 조여심이 환학당에서 고경명 등과 교류를 했음은 앞에서 살폈다. 뒷날 조여심의 후손 동호당 조은환(桐湖堂 曺殷煥)이 그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고서면 분향리 용대마을 용담대에 소산정을 건립했다고 한다. 소산정은 2004년에 담양군 향토유형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용담대 자료를 보던 중, 용담대에 있었던 용담정(龍潭亭) 관련 시문을 보게 되었다. 창평현령은 지낸 박흥생(朴興生, 1374~1446)의 문집 『국당선생유고(菊堂先生遺稿)』에 실린 「용담정 중신 서문[龍潭亭重新序]」과 「용담정이 중수되자 쓰다[題龍潭亭重修]」 등이다. 박흥생은 1423년~1424년 사이 창평현령을 지냈으니 용담정은 면앙정보다도 100여년 이상 앞섰다. 담양 지역 누정의 원류와 관련하여서도 세밀히 살펴볼 일이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참고문헌
고영진, 2022, 「담양사림(유학)의 형성과 학맥」, 『담양군사』 제2권 역사Ⅱ(제4편 조선시대 제2장 유교와 유교문화 제1정), 237~257쪽.
김덕진, 2007, 『소쇄원사람들』 , 다할미디어,
김신중, 2015, 「담양의 가사문학」, 『담양』, 국립광주박물관.
윤여정 편, 2009, 『대한민국행정지명』1 전남·광주편, 향지사
이상원, 2015, 「송순의 면앙정 구축과 <면앙정가> 창작 시기」, 『한국고시가문화연구』 35, 한국고시가문화학회.
이해준, 2013, 「신비복위소 논란과 재평가의 성격」, 『유학연구』 28, 충남대 유학연구소
전남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담양군, 1995, 『담양군 문화유적 학술조사』
조원래, 1995, 「사화기 호남사림의 학맥과 김굉필의 도학사상」, 『동양학』 25.
하태규, 1992, 「고려수절신 가문의 지방분산과 그 정치적 동향 –전북지역에 은거한 가문을 대상으로-」, 『전라문화논총』 5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한국학호남진흥원, 『조선의 시권』Ⅰ·Ⅱ-호남한국학 자료총서7-, 유호석·배경옥·송만오·김봉곤 역, 2023.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http://hnkostma.org]
주석
1) 윤여정 편, 2009, 『대한민국행정지명』1 전남·광주편, 향지사 ; 김동수, 2022, 「행정구역의 개편과 담양·창평」, 『담양군사』 제2권, 담양군사편찬위원회 등 참조.
2)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1396) 1월 27일.
3) “[陞潭陽郡爲府 德妃外鄕也.]”『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 11월 6일. 『세종실록지리지』 담양도호부조에 “恭靖王卽位之年戊寅, 以中宮厚德王大妃金氏外鄕, 又陞爲府”, 『신증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 건치연혁조에 “恭靖王卽位之年,以中宮金氏外鄕,陞爲府”라 하였다.
4) 인물조 : 柳沃 梁山甫 梁子澂 朴以洪 林億齡 鄭澈 高敬命 高因厚 林檜 曺弘立 鄭弘溟 吳希道 鄭忠信 吳玭 尹弘承
5) 43개 성씨에 들지 않은 延日鄭 廣州李 彦陽金도 문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여지도서』 창평현 인물조에는 柳沃 梁山甫 梁子澂 朴以洪 林億齡 鄭澈 高敬命 高因厚 林檜 曺弘立 鄭弘溟 吳希道 鄭忠信 吳玭 尹弘承이 올라 있다.
6) 朝鮮總督府, 1934, 『朝鮮の姓』(1988, 민속원 영인본)
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자료를 인용하여 편집하였다.
8) 『고려사』 권109, 「열전」 22, 이성(李晟)
9) 『고려사』 권112, 「열전」 25, 전록생(田祿生)
10) 하태규, 1992, 「고려수절신 가문의 지방분산과 그 정치적 동향 –전북지역에 은거한 가문을 대상으로-」, 『전라문화논총』 5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11) 이해준, 2013, 「신비복위소 논란과 재평가의 성격」 『유학연구』 28, 충남대 유학연구소.
*김희태, 「담양·창평의 문과 급제자와 주요 사족의 활동」, 『오늘의 가사문학』 45, 2025년 여름호(문화기획-전라도 천년문화 통신), 고요아침

담양 죽림재(사진 : 담양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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