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23
나주의 고려시대 문화유산과 시문‧사료의 재해석과 서사(敍事)
김희태
| 1) 국왕에게 올린 이름난 과실[名果] – 1170년께의 나주배? 2) 나주관의 대발[簾]과 경갑(鏡匣) – 1175년, 소목(小木) 가구 3) 송에서 돌아 온 나주의 표류민 23인 – 1088년 4) 송나라에 알려진 나주 잣나무[소나무] – 1123년 5) 금성산의 가시나무 목책 금성산성*14) - 1270년 6) 나주목을 오고 간 관인들, 금성일기 – 1358년~1392 7) 고려 전함 314척 영산 열병(榮山 閱兵) 1372년 |
1) 국왕에게 올린 이름난 과실[名果] – 1170년께의 나주배?
나주의 수령으로 있던 최여해(崔汝諧, 1101~1186)가 “이름난 과실과 말린 해산물을 구하여 〈익양공의〉부에 후하게 보내니 명종(明宗)이 매우 고맙게 여겼다.”*1)(주석, 이하 같음)는 내용이 있다. 명종(1131~1202)은 1170년~1197년 재위한 고려 제19대 국왕이다. 즉위 전의 작호는 익양공(翼陽公)이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나주 수령이 국왕에게 올린 이름난 과실, 후하게 보내니 국왕이 고맙게 여긴 나주의 과실, 그 과실을 ‘나주 배’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조선초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조에 기록된 토공과 약재, 토산 가운데 과실류를 보면, 토공(土貢)은 대추(棗)·감(柿)·배[梨]·석류(石榴)·비자(榧子), 약재(藥材)는 오매실(烏梅實)·염매실(鹽梅實), 토산(土産)은 귤(橘)이다.*2)
최여해는 77세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여 치사하게 하였고 1186년(명종 16)에 86세로 죽자,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했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3) 그만큼 문신으로써 치적이 있었고 명종은 예우를 다하였다. 명종이 즉위전 익양공의 부에 나주 수령 최여해가 올린 이름난 과일. 명종은 1170년 9월(양 10월 13일) 즉위함으로 최여해가 과일을 올린 시기는 1169년~1170년 사이일 것 같다.
『고려사』기록에 ‘이름난 과일을 구하여[求名果]’, ‘후하게 올렸고[厚餽於府]’, ‘명종이 매우 고맙게 여겼다[明宗深感之]’ 했으니, 이름나고 후하게 올릴만한 과실을 ‘나주배’로 연계시키고 서사(敍事)로 풀어 간다면 ‘고려의 나주 역사문화유산’-‘나주 지역의 특산 향토자원’이 자연스레 연계될 것이다. 고려시대는 국왕이 ‘심감(深感)’했다 했는데, 그 유향이 이어져 현금에 이르러서는 온나라 사람들이 즐거워 나주의 먹거리를 찾지 않을까.
2) 나주관의 대발[簾]과 경갑(鏡匣) – 1175년, 소목(小木) 가구
1175년(명종 5)경 안렴사로 나주에 온 채보문(蔡寶文)의 시*4)에 공관인 나주관에 있던 기물로 대발[簾]과 경갑(鏡匣)이 보인다. 「나주 공관에 쓰다(題羅州館)」는 시의 주석에 “을유년(1165년, 의종 19)에 유학차 이 고을에 이르니, 서기 박원개(朴元凱)가 특히 공관에 잔치를 벌이고 나를 위로하였다. 이제 내가 안렴사의 명을 받들고 다시 이곳을 찾아와서 지난 일을 추억하고 지금 일에 감회가 일어 사운(四韻)을 짓는다.*5)”라 하였다.
기구에서 “이 땅에 와서 논 지 십여 년 만에 올가을에 또 기러기처럼 남으로 왔네(此地來遊十餘歲 今秋又作鴈南飛)”라 하였다. 세주에 을유년(1165)에 유학차 왔다 하였으니 다시 안렴사로 나주에 온 것은 1175년(명종 5)쯤 가을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연에서 “저녁에 발 걷으니 강산은 그대로인데 아침에 거울을 여니 귀밑털이 변했구나(簾旌暮捲江山是 鏡匣朝開齒髮非).”라 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발[簾]과 경갑(鏡匣)은 당시 나주의 물산이나 산업과 관련하여 시사점이 있다. 저녁과 아침이라 했으니 유숙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객관에 있는 집기이자 가구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나주의 소목 가구와 대나무 공예품 등은 알려져 있는데, 고려시대 1175년경 나주목을 방문한 중앙관리 안렴사의 유숙처 객관의 대발[竹]과 경갑은 최고급품이었을 것이고 특산 명물이었을 것이다. 장엄한 금성관, 나주 명물 가구는 관리의 품격을 더 높여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허리의 누른 띠 새 영화가 중하니 뉘라서 나를 옛날의 그 포의라 하느뇨(腰黃眼赤新榮重 來去誰云一布衣).”라 한 것으로 읽힌다.*6)
채보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읍지』(조선후기, 奎17422) 등에 실리면서 나주의 대표적 시문으로 자리 잡는다. 채보문은 고려 중기 인물로 출생년은 확인되지 않으나 1163년(의종 17)에 문과에 급제했다.*7) 학문이 탁월했고 『동문선』에 시 3수*8)가 전한다. 『보한집』에도 채보문의 시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함께 나주 객사의 벽에 시를 걸었음을 적고 있다.*9)
나주 소목과 관련하여 나흥유(羅興儒)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주 사람 나흥유는 왕명으로 나무로 반룡(蟠龍)을 만들어 전각의 문에 장식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기교로 칭찬을 받았다. 어쩌면 고려 최고의 조각가 아닐까 싶다. 전각의 문에 장식하는 것이라 했으니 소목장과도 연결될 것 같다.*10)
3) 송에서 돌아 온 나주의 표류민 23인 – 1088년
“나주 표류민 양복(楊福) 등 남녀 23인이 송(宋)의 명주(明州)에서 돌아 왔다.”*11)는 기록이 있다. 명주(明州, 밍저우)는 지금의 닝보(寧波)로 중국 저장성(浙江省)에 있는 도시이다. 밍저우[明州]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흑산도, 군산도, 태안 반도를 거쳐 벽란도로 들어오는 고려의 해상무역로의 ‘남로’인데 이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나주인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로 나서다가 표류했을까. 언제쯤일까. 그들이 남긴 기록이나 자료는 없을까. 구전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나주는 조선시대 초기의 금남 최부의 『표해록』 등 표류와 관련된 인물이나 자료가 많다. 서로 연계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4) 송나라에 알려진 나주 잣나무[소나무] – 1123년
1123년(고려 인종 1, 선화 5년) 송나라의 서긍(徐兢, 1091~1153)의 사행보고서인 『고려도경』에 나주도의 소나무[잣나무]가 나온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에도 소나무가 … 막 생겨나는 것을 송방(松房)이라 하는데*12),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와 같고 푸른 윤기가 나며 〈과육이〉 단단하다. … 고려의 풍속에 비록 과일(果)·안주(肴)·국(羹)·저민 고기[胾]에 이것을 사용한다.*13)
다른 지역 것의 풍부함보다는 못하다는 내용도 있긴 하지만, 지역의 자원과 연계하여 볼 만하다. 송방을 과일·안주·국·저민 고기에 사용한다 했는데, 나주배나 나주 곰탕과 연계시켜 볼 만하다.
5) 금성산의 가시나무 목책 금성산성*14) - 1270년
금성산은 나주의 진산이다. 고려 현종이 남순(1011년)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산성은 고려 중기 1270년(원종 11)에 삼별초와 관련하여 나주 사람들이 가시나무로 목책을 만들어 입보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나주사록(羅州司錄) 김응덕(金應德)이 중심이 된다. 산성에 목책으로 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주민들의 입보처로서 행정적, 군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유산이다.*15)
김응덕의 활동상은 “곧바로 수성할 것을 결의하고 주(州) 및 영내(領內) 여러 현(縣)에 공문을 보내고는 금성산으로 입보(入保)하였다. 가시나무를 세워 목책을 만들고 솔선하여 사졸을 독려하였으며 적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사졸들은 모두 상처를 싸매면서 사수하였는데, 적이 성을 공격한 지 일주일이 되었으나 끝내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국왕은 김응덕에게는 7품의 관작을 내렸고, 나주의 김서(金敍)·정원기(鄭元器)·정윤(鄭允)에게 섭오위(攝伍尉)를 하사하고 쌀 각 15석(石)씩을 내렸다.*16) 금성산신은 국가로부터 정령공으로 봉작(1277년)이 되면서 국왕이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 명산을 봉작하는데 금성산은 호국지신으로 예우(1394년)한다.*17)
나주의 고려시대 성곽은 금성산성, 회진성, 자미산성 등이 있다. 금성산성의 경우에도 광주 무등산처럼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여가, 스포츠 활동 등과 접맥을 하여 활용해야 할 것이다.
6) 나주목을 오고 간 관인들, 금성일기 – 1358년~1392
『금성일기(錦城日記』는 1358년(공민왕 7)~1481년(성종 12) 사이 나주목의 관청일기이다. 나주목을 다스리고 오고 갔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금성일기』에는 목사, 판관, 춘하번안렴사, 추동번안렴사, 찰방 겸 군수별감, 도문순사, 병마사, 지병마사, 찰방사, 왜인추포 겸 녹전감송사, 찰방 겸 추포사, 점군사, 찰방 겸 병마사, 찰방 겸 군수사, 찰방 겸 군수별감, 방별감, 조전사, 이운최독사, 도순어사, 도순문진변사, 안렴사 겸 방어찰방별감의 도임과 이임 상경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체찰사, 황제사좌, 회사사, 부사, 서장, 압물, 타군역어, 정랑, 조서사좌, 호송사 환관, 절일사 등 사신 관련 내용도 있다.
이 같은 인물 자료들을 정리하고 DB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18)
7) 고려 전함 314척 영산 열병(榮山 閱兵) 1372년
1372년(공민왕 23) 8월 15일 나주의 영산(榮山)에서 전함과 사졸이 제주로 출항을 한다. 규모는 전함 314척과 사졸 25,600명이다. 이 군사들은 출항 전 나주에 도착하여 최영이 영산(榮山)에서 열병(閱兵)을 한다. 1372년(공민왕 23) 7월에 최영은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 염흥방(廉興邦)은 도병마사, 이희필(李希泌)과 변안렬(邊安烈)은 양광도원수, 목인길(睦仁吉)과 임견미(林堅味)는 전라도원수, 지윤(池奫)과 나세(羅世)는 경상도원수, 김유(金庾)는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도순문사가 된다. 그리고 8월 15일 나주에서 전함과 사졸을 거느리고 제주로 간다. 그 계기는 명 태조가 제주 말 2,000필을 진상하라 했는데, 300필만 보내니 왕이 제주 토벌을 의논한 것이다.*19) 경과는 그렇지만, 나주의 영산이 300여척의 전함과 2만 5천여명의 군사의 열병을 할 정도의 국가 군사시설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주 영산의 열병지, 출항지 등을 비정하여 서로 연계되는 역사경관 조성과 활용이 필요하다. 나주지역이나 영산강 일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축제나 문화행사 등과도 연계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주석)
1) “後倅羅州, 求名果海脯, 厚餽於府, 明宗深感之.” 『高麗史』 卷一百一 列傳 卷第十四 諸臣 최여해.
2)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3) 『고려사』 권101 列傳14 諸臣 최여해.
4) “此地來遊十餘歲 今秋又作鴈南飛 簾旌暮捲江山是 鏡匣朝開齒髮非 庭靜白沙留月色 園深綠竹醉春輝 腰黃眼赤新榮重 來去誰云一布衣”(채보문, 「題羅州館」, 『동문선』 제13권(한국고전종합DB))
5) “乙酉歲, 遊學到此, 書記朴元凱特於公館宴慰. 今忝按廉之命復過, 懷古感今, 因爲四韻.”
6) 김희태, 「“선현들의 시문” 해제」, 『선현들의 시문속에서 나주를 읽다』(나주문화원, 2021), 22~24쪽.
7)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 古4650-10)(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8) 「題羅州館」, 「珍島碧波亭次崔按部永濡韻」, 「高山縣公館梨花」, 『동문선』 제13권 칠언율시.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고적조 회선정(會仙亭)조에 채보문의 시가 있다.
9) 『보한집』 권상 습유(拾遺)
10) 『고려사』 권114 열전27 諸臣 나흥유.
11) 『고려사』 권10 세가 권제10 宣宗 5년[1088] 5월 신해[6일].
12) 본문의 다섯 잎이 나서 열매를 맺는 ‘소나무’가 사실은 잣나무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송방(松房)도 ‘잣’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선화봉사 고려도경 역주[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인용)
13) “廣楊永三州多大松. 松有二種, 惟五葉者, 乃結實. 羅州道, 亦有之, 不若三州之富. 方其始生, 謂之松房, 狀如木瓜, 青潤緻密. 至得霜乃拆, 其實始成, 而房乃作紫色. 國俗, 雖果肴羹胾, 亦用之, 不可多食. 令人嘔吐不已.”(『선화봉사 고려도경』 권23 풍속[雜俗] 2 특산물[土産](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 금성산성은 나주 진산인 금성산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규모가 둘레 1,095보이고 사철 내내 마르지 않는 5곳의 샘이 있으며 연못과 군창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축하였으며 둘레가 2,946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군창이 있었으나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 강봉룡, 1999, 「나주시의 관방유적」, 『나주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나주시, 349~352쪽.
16) 『고려사』 권103 列傳16 諸臣 김응덕.
17) <나주 ‘어향’ 유향, 금성산신에 국왕이 보답 제사 1277년 – 746주년> 참조.(김희태, 「나주 지역 고려시대 역사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18) 인물 DB와 관련, 『錦城日記』 인물과 함께 나주 연고 인물을 정리하고 자료를 모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나주’로 검색하면 구도(具道), 구진(具鎭, 羅州道大行臺侍中), 권단(權㫜, 안찰사), 김경손(金慶孫, 전라도지휘사, 1237) 등 70여명에 이른다.
19) 『고려사』 권113 열전26 제신(諸臣) 최영.
*출전 : 김희태, 「나주 지역 고려시대 역사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고려 어향(御鄕) 나주의 재조명관 영산강』-목포대 호남문화콘텐츠연구소 총서01-, 경인문화사, 2026, 261~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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