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87
금성일기, 1424년과 1489년 개수, 현전본은 1710년 이후 중수
김희태
『금성일기』 해제 차례(* 이번호 소개) 1358년~1481년 나주목사와 판관, 관인의 행적 기록 *1424년 고쳐 기록하고 1489년 다시 개수 *후대 나주 방문 관인들의 추가 기록, 1710년 이후 중수 원래 1364년~1489년, 1510년~1708년 기록, 일본에 소재 1747년 『승정원일기』 개수에 참고한 나주의 『호장일기』 조선시대 기록이나 자료를 통해서 본 『금성일기』 58인의 나주 목사, 46인의 나주목 판관의 행적 인명, 관직, 지역 등을 종합적으로 연계해 활용되기를 |
『금성일기』 는 나주에 부임했던 여러 관원들을 시기별로 정리한 것이다. 고려시기부터 전승되던 자료를 1422년(세종 4) 관찰사 하연(河演, 1376~1453)의 지원으로 새로 고치고 베껴 썼다. 이후 1481년(성종 12)까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상한은 1358년(공민왕 7)이다. 일본에 전존되고 있는 『금성일기』를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 보자.
1422년 나주 순력 전라도 관찰사 하연 후원, 1424년 개수,
『금성일기』에는 일기 개수와 관련하여 작성된 첫 부분과 끝 부분 등 2건의 입안(立案)이 실려 있다. 앞 부분의 입안은 1424년(세종 6, 永樂 22, 갑진) 5월에 작성된 것으로 선생안의 개수 경위를 정리한 내용이다.
“아래 입안은 지난 1358년(무술년, 공민왕 7) 이래로 관원과 별성의 부임 연월과 교대를 기록한 것으로 문서에 모두 써서 지금까지 전해온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책이 파손되고 글자가 빠져 어떤 이가 고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여러 해 되었다. 지난 1422년(임인년, 세종 4) 8월에 도관찰사 하연이 여기에 순방 와서 그 증조 목사 하집과 아버지 안렴사 하자종이 와서 있었던 세월을 알고자 하여 정안을 자세히 살피고, 이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법은 다른 고을에는 없다. 진실로 훌륭한 풍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드디어 종이 값으로 소금 20석을 주어 종이를 사게 하여 고쳐서 완성하게 되었으니 영원히 후일에 보게 되었다.”(『금성일기』)
이에 따르면 하연이 전라도도관찰사 재임 때에 나주목을 순력하면서 선생안 기록을 보고 매우 중요한 기록이라 여겨 소금 20석을 주어 종이를 사서 개수하도록 했다.
하연 관찰사가 나주목에 왔을 때 남긴 것으로 보이는 시가 문집에 있다. 나주목사에 주는 시(「戲寄羅州牧使」)이다. “금성산의 풍광과 기운은 특별한 땅의 원기이고 봄빛이 늙지 않으니 무릉도원에 든 것 같도다. … [錦岳風煙特地元 春光不老武陵源 少年使節淸修處 豈意名花一朶存]”라 읊었다. 당시 나주목사는 이양몽(李養蒙)으로 1420년(세종 2) 12월 28일 부임하였다가 1423년(세종 5) 7월 우군동지총제로 은퇴하였다는 기록이 『금성일기』에 나온다.
하연(河演)은 1421년(세종 3) 2월부터 1422년(세종 4) 윤12월까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하연은 증조부 하집이 나주목사를 지냈고 아버지 하자종이 안렴사로 나주목을 들렸던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역대 선생안을 남긴 것은 다른 고을에 없는 훌륭한 풍속으로 이어가기를 바랐다.
1424년(세종 6)에 개수를 마쳤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입안이 부기되어 있다. 이 문서의 끝에는 수호장(首戶長)을 비롯한 호장(戶長), 섭호장(攝戶長), 부호장(副戶長) 등 9인의 향리 명단이 있다.
1489년 다시 개수, 1481년~1507년 26년간 기록은 유실
『금성일기』의 뒷부분에 실린 입안은 1489년(성종 20, 弘治 2, 기유) 10월에 작성된 것이다.
“다음 입안은 우리들이 다행히 사청에 깊이 보관된 고적을 찾다가 정안을 열람하게 되었다. 무술년(1358년)* 이래로 관원과 사신들이 부임한 년월과 교체되고 왔다가는 사항을 빠짐없이 모두 책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여 졌다. 이 법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고 유독 나주의 후한 풍속이다. 그러나 신축년(1481년) 이래 9년 동안 호장의 무리들이 공적인 기록이 아닌 사적인 기록으로 생각하면서 장구하고 원대한 기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정안을 보는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여기고 고치지 아니하였으니 슬프게도 단절될 줄이야. 이에 우리들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고 책 40폭을 마련하여 이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것은 다 기록할 수 없고 지금부터라도 옛 법에 의거하여 기록해 영원히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성화 17년 신축(1481년)에서부터 정덕 2년 정묘(1507년)까지 26년간은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했다.”(『금성일기』)
*『금성일기』 에는 ‘至正 二十一년 戊戌年’로 표기되어 있는데, 至正21년은 신축년(1361년)이고, 무술년은 1358년이다. 이런 경우 간지를 취하는 관례를 따랐다.
이 기록도 선생안의 개수 경위를 적은 것이다. 1481년 이후 9년 동안 관련인들이 방치하여 보수하지 않아 40폭을 마련하여 개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끝에는 1481년부터 1507년까지 26년간이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앞(1424년)에서 책자가 오래되어 파손 결락되는 문제가 생기자 전체를 새 종이에 개수한다고 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후대 나주 방문 관인들의 추가 기록, 1710년 이후 중수
위 두 입안으로 보면 처음에는 1422년에 개수하여 1424년에 완성하였고, 뒤이어 1489년에 다시 개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전하는 『금성일기』는 원 내용에 추가 기록된 내용이 세주 형태(【 】부분)로 실려 있다. 몇 사례를 보자.
“1364년(공민왕 13) : 공물별감은 변남룡이다.【숭정 11년(1638년) 7세손 변시익이 무안현감으로 가다 이곳에 와 삼가 쓰다. 공의 벼슬은 한성부좌윤에 이르렀고, 묘는 직산 주당산에 있다. 8세손 황이 해운판관으로 이곳을 거쳐 갔고, 경술년(1670년)에는 장흥부사로 또 여기를 지나면서 삼가 기록하다.】”(『금성일기』)
“1406년(태종 6] : … 경력 민심언 일행이 같은 날[1월 20일] 나주에 왔다.【공의 벼슬은 개성유수에 이르렀고, 숭정 을사년 1665년에 9대손 민유중이 분에 넘치게 이곳의 안찰사가 되어 들려 삼가 쓰다. 뒤에 계미년 1703년에 10대손 진원이 또한 순찰사로 와 이곳을 지나다가 삼가 쓰다。】]”(『금성일기』)
“1444년(세종 26) : 전품척간 도순찰사 자헌 정이정과 종사관 김길통이 1월 12일 나주에 왔다.【벼슬이 월천부원군에 이르렀다. 외외손 조정만이 느끼어 기록하다.】(『금성일기』)
이같은 기록은 원래의 선생안에 후대에 후손 등 관련 관인들이 열람한 사항을 추가로 정리한 것이다.
사례에서 보듯이 추기한 관인은 나주목사인 경우도 있고 안찰사나 순찰사로 나주목에 들렀거나 장흥부사 등 나주 인근 고을 수령으로 재임한 경우도 있다. 기록 연대를 보면 1638년, 1665년, 1670년, 1703년이다.
그리고 1444년(세종 26) 기록에 추기한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은 1707년(숙종 33)에 광주목사(부임은 광산현감), 1710년 6월~1712년 5월 사이 나주목사로 재임한다. 이 무렵에 『금성일기』를 열람하고 추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추기로 미루어 현존하는 『금성일기』는 1710년대 이후에 정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나주문화원, 『역주 금성일기』-선조들의 대기록-, 2024.
https://kht1215.tistory.com/1350 인지의 즐거움386 - 금성일기, 1358년~1481년 나주목사 58인, 판관 46인과 나주 찾은 관인의 행적 기록
https://kht1215.tistory.com/1352 인지의 즐거움388 - 금성일기, 1364년~1489년, 1510년~1708년 기록 1923년 소실
https://kht1215.tistory.com/1353 인지의 즐거움389 - 금성일기, 1747년 『승정원일기』 개수의 필수문헌 활용, 여러 학자들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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