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62 - 정수사 사적기 1983년 확인, 한글자 한글자 베껴쓰다-청광 양광식 선생과 〈정수사 여지승람〉, 대웅전 지정 고증자료

향토학인 2024. 9. 9. 02:40

인지의 즐거움362
 

정수사 사적기 1983년 확인, 한글자 한글자 베껴쓰다
-청광 양광식 선생과 〈정수사 여지승람〉, 대웅전 지정 고증자료 활용-

 

김희태
 

정수사의 사적 기록인 〈정수사 여지승람〉에는 26개소의 전각과 24개소의 산내 암자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정수사의 사세를 알 수 있다.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 여지승람(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淨水寺輿地勝覽)’(이하 <정수사 여지승람>으로 표기)이라는 제목의 정수사 사적기록이 세간에 알려진 계기가 있다.
 
청광 양광식 선생께서 전남의 전적(典籍) 조사차 해남 군청 담당자와 함께 해남 대흥사 입구 백화사(白化寺)를 방문하였다. 1983년 9월 5일이다. 백화사 주인이 조사 요청을 하여 간 것인데도 건강을 이유로 다음에 오라 하였지만, 방문 앞 마루에 걸터 앉아 주인과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그 주인이 정수사지를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보여달라 졸랐으나 한달 뒤로 다시 오라 하였다. 정수사지를 찾으려 애쓴지 10년째 되던 해에 ‘정수사지 소장’, ‘꿈만 같은’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다시 한달 뒤 해남을 찾았다. 칠량면-강진읍 정류장-해남읍 정류장-삼산면 대흥사입구,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 도착하였다. 그 전날 전화로 ‘내일 한달’이라며 확인까지 하였다. 1995년 국역본을 냈는데, 그간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이를 옮긴다.
 
 
정수사지를 찾게 된 내력
 
“1983년 9월 5일 전남의 전적(典籍) 조사차 해남의 공보실 담당자와 함께 대흥사 입구에 있는 백화사(白化寺)를 방문하였다. 조사 요청을 하였던 주인은 건강을 이유로 다음에 오라는 한마디로 거절을 하였다. 나는 그냥 돌아서 나오기가 허탈하여 누워있는 주인의 방문앞 마루에 걸터 앉아서 소개(紹介)를 드리고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1시간에 후에 정수사지를 자기가 소장하고 있다고 하여 너무나 꿈만 같은 현실이라 당장에 좀 볼 수 없느냐고 졸라대니 정확하게 한달 뒤에 오라고 하였다. 일은 내가 정수사지를 찾으려고 애쓴지 꼭 10년째 이었으니 남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루 전날 우체국에 나가서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하니 내일이 한달이니 오라고 하였다. 찻잔을 준비하여 아침을 다그쳐 먹고 칠량, 강진, 해남 대흥사의 순서로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가니 오전 11시 쯤에야 도착되었다.
 
주인은 책을 보여 주면서 알고 싶은 내용을 물으라고 하기에 좀 읽어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니 손으로 책을 만지면은 닳아지므로 안된다기에 책을 팔거나 아니면 복사를 해주거나 또는 사진을 찍도록 요청을 하였으나 모두 다 거절하였다. 그래서 마룻장에다 책을 놓으며 손을 대지 않고 보겠노라고 하니 그것은 허락을 하였다.
 
막대기를 꺾어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준비해간 노트에다 한자 한자씩 옮겨 적기 시작하니 자꾸 그러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내용이 공개가 되면은 자료가 값어치가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꿈쩍도 않고 베껴쓰기를 계속하여 연혁(沿革), 계국(界局), 산천(山川), 경개(景槪), 고적(古蹟), 전각(殿閣), 방사(房舍), 암우(庵宇), 탑묘(塔廟), 물산(物産) 등 앞에 부분을 적었다. 그러고 나니 오후 5시 30분이었으며 배도 고프고 눈도 아팠으며 정신이 멍멍하였다. 이렇게 하여 베껴온 내용을 읽어보니 정수사의 내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서지적(書誌的) 내용(內容)
 
•크기 : 全 가[로] 27.2 세[로] 47.1 / 內 가[로] 22.2 세[로] 35.5㎝, •五針 •8行 字數未定 •四周雙邊 •朱絲欄
•記錄始作 - 雍正元年癸卯 : 1723년(조선 경종 3) : 시작 / 光緖乙酉 : 1885년(고종 22) : 끝”[*양광식 역, 『淨水寺誌』, 강진문헌연구회, 1995., 28~30쪽 인용].
 
1983년 9월 5일 소재를 확인하고 한달 뒤에 갔다 하니 10월 5일이었을 것 같다. 청광선생은 열람하면서 대출이나 사진 촬영을 말했지만 승낙하지 않아서, 막대기로 책장을 넘기면서 한 글자씩 한 글자씩 베껴 나갔다. 11시에 도착하여 오후 5시 반까지 필사를 했으니 그 열정은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위 글에서 “연혁(沿革), 계국(界局), 산천(山川), 경개(景槪), 고적(古蹟), 전각(殿閣), 방사(房舍), 암우(庵宇), 탑묘(塔廟), 물산(物産) 등 앞에 부분을 적었다.”고 했는데, 그 필사본을 보관하고 있을 것 같다. 막대기로 넘겨가면 한줄 한줄 베껴온 〈정수사 여지승람〉은 정수사 대웅전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고증자료로 활용된다. 정수사 대웅전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1985년 2월 25일이니 지정신청을 1984년에 했을 것 같다. 정수사 수현스님이 〈정수사 여지승람〉 입수사실을 알고 청광선생에게 요청하여 밤낮으로 번역을 하였고, 이 내용이 고증자료가 되어 정수사 대웅전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56년경에 해체, 복원된 대웅전의 건축양식과 단청(丹靑)이 여늬 사찰과는 달라서 절을 찾는 모두가 마음으로만 안타까와 하였다. 그러던 차에 10년간 수소문(搜所聞)한 끝에 사지의 앞 부분을 베껴 왔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자 주지를 맡고있는 수현(首賢)스님이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때에 나는 칠량 소재지에 설립된 도강요(道康窯)의 운영에 관한 책임을 맡아 밤낮으로 일을 하던 때이다. 그래서 1983년 11월 11일부터 밤이면 틈을 내어서 번역을 하기 시작하여 그 다 음해인 1984년에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01호로 지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양광식 역, 『淨水寺誌』, 33쪽.]
 
이와는 달리 소개되기도 하였다. 〈정수사 여지승람〉은 완도 신흥사로 옮겨 소장된 적이 있다. 1990년 3월에 당시 신흥사 백운 큰스님과 성춘경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이 협의하여 광주로 대출하여 제본을 할 수 있었다. 1990년 3월 3일 남도불교문화연구회 제 10회 집담회에서 신흥사 소장 박영희(응송)스님 소장본 사적기류 문헌자료를 복사하기로 협의되어 1990년 4월 7일 제11회 집담회에서 배부하였다. 당시 14책을 제본하였는데 이 가운데 〈정수사 여지승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완도-광주 오가는 실무를 김희태가 하였다. 1992년 12월에는 김희태가 「정수사 사적기 해제」를 강진문화원에서 내는 향토학술지 『강진문화』 11집에 발표하였다. 화보편에 〈정수사 여지승람〉 앞부분에 있는 원색 지도를 실었다. 정수사 배치도와 고금고 탄보묘와 월송대 지도였다.
 
1995년에는 양광식선생이 번역한 <정수사 여지승람> 번역본이 강진문헌연구회에서 <淨水寺誌>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이 번역본에는 정수사 지도에 실린 배치도를 그림으로 그려 실었다. 2017년 동지날에는 <정수사 여지승람>에 실린 원색 지도 정수사 배치도와 고금도 탄보묘 등 2종을 사진이미지 보정작업을 하여 액자로 제작하여 정수사에 기증하였다.
 
2021년에는 정수사의 신 사적기라 할 <천태산 정수사>가 출판된다. 정수사 법랍 40년의 석수현 큰스님의 원력과 함께 여러 사람의 힘과 지혜가 모아진 결과이다. <천태산 정수사>는 2017년부터 한성욱, 황호균, 성대철, 박종오, 김진희, 김희태가 분야를 나누어 조사하고 기술했다. 그리고 정수사의 여러 기록을 새로 찾아서 송광사성보박물관장 고경큰스님이 정리를 하였는데, <정수사 여지승람>도 일일이 대교를 하여 입력하였다. 원본 사진은 순천대 이종수교수로부터 제공 받았다. 강진군과 강진군의회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천태산 정수사> 발간 과정에서 또 한가지 확인한 게 있다. <정수사 여지승람>의 원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중간에 문장이 끊어진 부분이 있었다. 책의 면수로는 이어지는데 내용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원본 소재처를 탐문하여 열람하면서 살펴보니, 풀로 접착하여 버린 부분이 있었다. 글자는 몇자 안되지만 접착된 부분에 숨겨져 버린 것이 되어 문장은 연결이 안되었던 것이다. 글자를 추가하고 그 부분의 원본 사진도 넣었다.
 
<천태산 정수사>에는 <정수사 여지승람>의 양광식 선생 국역문을 그대로 실었다. 청광 양광식선생이 <정수사 여지승람>을 막대기로 넘겨가면서 한글자씩 베꼈던 때로부 38년이 지나서였다.
 
이러는 사이 <정수사 여지승람> 원본은 소장처가 담양 어느 사찰로 또 한번 옮겨졌다고 한다. 강진 정수사로 환지본처를 기대해 본다.
 * 강진우리신문 게재

도움되는 글
양광식 역, 『淨水寺誌』, 강진문헌연구회, 1995.
대한불교조계종 정수사, 『天台山 淨水寺』, 2021.
김희태, 「근현대기의 정수사와 석수현스님의 원력, 천태산 정수사 출판」-인지의 즐거움219 -, 향토학인블로그, 2021.01.27.

정수사 배치도(&lt;정수사 여지승람&gt;)
정수사 배치도(&lt;정수사 여지승람&gt;을 기초로 새로 그려서 1995년 정수사지 번역본에 실었다.)
&lt;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 여지승람&gt;
신 정수사 사적기-&lt;천태산 정수사&gt;(2021)
천개산 정수사 법당 중수상량문 &ndash; 이 상량문이 정수사 대웅전이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고증자료가 되었다. 1983년 청광 양광식선생은 해남 백화사를 찾아가 &lt;정수사 여지승람&gt;을 막대기로 넘겨가며 한글자씩 한줄씩 여섯시간에 걸쳐 베껴온다. 1984년 번역하여 정수사 석수현스님에게 제공하여 대웅전 문화재 지정신청서에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