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79 - 꿈에라도 가고픈 고향 갓골, 마동욱사진집, 2022.07.21. 출판기념회, 07.21~07.25. 사진전

향토학인 2022. 7. 21. 10:16

인지의즐거움279

 

꿈에라도 가고픈 고향 갓골, 마동욱사진집, 2022.07.21. 출판기념회, 07.21~07.25. 사진전

-장흥댐건설로 사라진 고향, 30년 사진 기록, 그 사진집으로 마을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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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1967년과 1971, 1991년의 갓골마을 서사(敍事)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든다.

 

워메. 아제! 잘 계셨지라.”

어디 가셨닥해서 아직 안 오신 줄 알았제라. 아라쓰면 모시고 오 꺼신다.”

. 그래 잘 이썼제. 엊저녁에사 와써. . 저 집 잔치한단디 볼라고 왔제. 텃골성님 잘 계시제.”

 

龍 檀紀 四千三百年 丁未 二月 甲戌朔 十四日[定礎] 同日[立柱] 十六日己丑 巳時 上/[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지동마을 사진집 265쪽에 실린 상량문 사진을 보고 옮겨 적었다. / 이하는 보이지 않는데 보통의 예에 따라 보완해 넣었다. 해설하면 이렇다.

 

단기 사천 삼백년 정미년 이월 초하루는 갑술인데 14일 주초석을 놓고 같은 날 기둥을 세우고 16일 기축 사시(10)에 종도리를 올립니다. 하늘의 삼광은 감응하시어 인간의 오복을 내려 주소서.

 

1967216일의 상량식 현장을 서사(敍事)로 풀어 봤다. 정월초하루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 지나 2월 보름까지는 일년의 운세와 건강, 풍년을 기원하며 여러 가지를 삼가며 정성을 드린다. 2월 보름 지나 16일에 상량고사를 하는 것이다. 새집이 들어서면 터주신과 성주신에게 예를 올리고 목수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 동네 사람들은 모여서 축하를 하고 음식을 나누면 잔치를 한다. 아짐들은 쌀 한되박, 아제들은 봉투를 준비하고 함께 복을 기원한다. 상량 고사날은 보통 음력을 쓰니 양력으로 치면 325일이다. 1967325일 부산면 지천리 지동마을 갓골에서는 푸짐한 상이 차려지고 막걸리가 돌면서 너도 나도 흥에 겨워하고 복을 빌었을 것이다.

 

1967년의 상량문(겉상량)(265)

 

상량문은 두 종류다. 하나는 저 사진처럼 버로 집의 마룻대(종도리)에 써서 바로 보인다 하여 겉상량이라고 한다. 보통 네 단계 절차의 연월일시를 적는다. 개기(開基), 정초(定礎), 입주(立柱), 상량(上樑). 자리를 잡아 땅을 파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와 도리를 맞추고 마지막으로 종도리를 올린다. 이게 상량이다.

 

저 사진에는 개기(開基)는 안 쓰고 세 단계만 썼다. 삼광은 해()와 달(과 별(), 말하자면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우리 집 사람들에게 오복을 내려 주라는 바램이다. ((다남(多男(건강(健康)이다.

 

다른 하나는 긴 찬문으로 동네 어른이 짓고 써서 청홍배에 싸서 종도리를 조금 파내고 봉인을 한다. 속으로 들어가 안보이니 속상량이라고도 한다. 이 속상량문을 상량고사날 낭독을 한 뒤 봉을 한다. 그리고 지붕과 벽체, 창호 등을 손질하여 완성이 되면 입택고유를 한다. 집들이이다. 또 한번 갓골사람들은 한마당 축제의 자리가 되었으리라.

 

그로부터 4년 뒤 1971년 중학생 또래들이 마을에 들어선다 너댓명. 언뜻보니 그동네 얘들과 놀러 온 친구들이 섞인 것 같다. 장흥중학교 1학년 4반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김희태와 이향양은 손님이고, 동네 얘들 셋은 강친구 최친구 임친구.

 

이향양은 두살인가 많았는데 제법 어른 티가 난다. 그때 이곳 저곳 쏘다녔고 이향양이 어디선가 가져온 공기총으로 꿩사냥도 했다. 꿩을 따라 내달리던 기억. 꿩백숙을 맛나게 먹은 기억. 약간은 선후가 바뀐듯 하지만 그런 어릴 때의 모습들이 스친다. 그리고 고교시절엔가 보고는 오십년 세월이다. 두어번은 더 봤을 것 같기도 한데.

 

최친구와 이향양은 못 만났지만. 한친구는 이따금 연락을 했었다. 전화를 한다. 다행히 받는다. 행정공무원을 마치고 순천에서 사는 강친구. 옛날의 소식을 나눈다. 조금은 기억들이 엇갈리리지만 반갑다.

 

최친구는 십여년전 고인이 되었단다. ~. 임친구는 저 동래 부산에서 살고. 지동마을 사진전 꼭 보고 싶다 했다. 그날 만나자 약속. 마작가와도 오래전 통화를 한 것도 같단다.

 

다시 20년이 흐른다. 1991. 한 젊은이가 각골을 찾는다. 카메라를 들고 매고서. 여그 저그 사방 팔방 바쁘다 바빠. 동네 사람들은 한마디씩 한다.

 

"~ 머한다냐"

".. 일 없는 사람도 있네"

"우리는 쫓게나게 생겼는디 머슬 저라고 찍어 싼다냐."

"밥이 나오까"

"저거시 직업이까"

 

그래도 아랑곳 않는다.

 

"엄니 잘 계시지라"

"워메 아제 또 만나요"

 

만나는 이마다 인사하고 말을 걸고 물어 보고.

 

"친정은 어디요"

"용반리"

"음매 그라믄 지암몰 아짐이구만"

"워매매 지암몰도 아요. 벨짝 스럽네. 아직 애기 같은디

 

서른을 갓 넘긴 마동욱.

소방관 교도관 사진관,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살이로 돌아온지 두어 해. 시도 때도 없이 발품을 판다. 말그대로 카메라를 이고 지고 매고 들고.

 

마동욱 작가의 '각골(갓골)' 첫 사진 - 1991년 가을. 서른 갓넘긴 마작가는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며 발품으로 찍고 찍고 또 찍었다. 30년이 지나 '갓골' 어른들께 , 그 후손들에게 꿈에라도 보시라고 사진집을 헌정한다.

각골만이 아니다. 장흥호로 들어간 마을, 아니 산하 곳곳을 들락 날락. 카메라 소리도 차알칵에서 스으삭으로. 그러느라 30.

 

그 와중에 시도 때도 없이 사진을 인화해 보내주고 회관에 걸어 주고, 사진전을 열고, 사진집을 내고... 열여섯번째의 사진집.

 

꿈속의 고향-탐진댐 건설로 사라진 지천리 지동마을-

 

그렇게 찍고 다니면서도 얼마전까지도 각골로 알았단다. 동네 들어가면 어른들이 각골’ ‘각골하시니. 그런데 망향제를 하면서, ‘갓골을 그렇게 말했는데, 마작가는 각골로 들었고, 한국전쟁기 조사를 한다는 후배가 일러줘서야 지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

 

76쪽의 비석 사진, 유인평택인씨열행비(孺人平澤林氏烈行碑)

 

산비탈 바위 면을 이용하여 감실처럼 들어간 자리에 세운 석비이다. 사각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한옥지붕형의 비갓을 올렸다. 앞부분은 2단의 기단부가 있다. 좌우로 네그루의 나무가 있고 뒷산에도 나무가 보인다. 사진이 어두운 바위 면에 초점이 맞춰진 듯 비석면은 밝다.

 

보통의 석비는 앞부분에 일종의 비제를 큰 글씨로 새기고, 좌우면이나 뒷면에는 빗돌 주인공의 행적, 연대, 비문 지은이나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 새긴다. 너무 밝게 잘 찍혀 읽기가 어렵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화면을 확대하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희미하게 나마 孺人平澤林氏烈行碑라 내려쓰기 큰 글씨가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부산면지>유인 평택임씨 열행비(孺人平澤林氏烈行碑)”가 보인다. 1992년 장흥문화원 간행. 112쪽이다. 건립연대는 1957, 내용을 보니, 평택임씨 임장학(林璋學)의 딸로 청풍김씨 김익로와 혼인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남편이 동학에 가담하여 쫓기는 몸이 되었다. 급박한 처지에 있던 남편을 호랑이 굴에 숨도록 하고 남몰래 전대에 밥을 숨겨 날라 끼니를 잇도록 하였다. 이에 관군은 남편을 체포하지 못하자 대신 임씨를 연행하여 머리털을 불사르고 온갖 고문으로 남편의 은신처를 말하라 하였으나 끝내 입을 다물어 남편을 사지에서 구해냈다. 고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열행(義烈行)을 한 뜻을 기려 향교의 추천을 받아 비를 세운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1957년 비석에 행적이 적혀 있으니 동학특별법에 따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의 여건도 될 것 같다. 장흥 선조로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분은 386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최후 최대의 전적지인 국가 사적 장흥 석대들 전적이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저 비석의 주인공 평택임씨 할머니와 김익노선생.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을 모색해 봐야겠다.

 

유인 평택임씨 열행비(1957년 건립)(76)

 

3~4천년전부터 살아오신 갓골선조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갓골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장흥댐 건설을 할 때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했다. 장흥댐에서는 처음으로 발굴을 한 유적 소재지가 갓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갓골은 댐을 본격적으로 공사하기 전 가물막이댐이 들어선 지역이기 때문이다.

 

113쪽에 발굴조사 사진이 있다. 1999년에 목포대박물관 발굴팀이 전문적 조사를 했다. 이런 조사를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라 하고, 이같은 공부를 하는 학문을 고고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땅을 파고 돌을 고르고 흙을 져 나르고 했던 노동력은 죄다 갓골어르신들이었다.

 

그때 조사한 것이 정리되어 발굴조사보고서 책으로 나왔다. 여기를 살펴 보니 그 당시 번지로 지천리 135-2 19필지는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지천리 135-2 19필지 일원에는 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단다.

 

청동기시대는 지금부터 3천년~4천년전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대표적인 유적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5기가 조사된 바 있다. 고인돌은 땅 위로 보였는데, 실제로 땅을 파보니 철기시대의 수혈 주거지(집자리) 17기와 삼국시대 수혈주거지 12기가 확인되었다. 사람들이 사는 집자리인데, 위에서 파내려 가서 자리를 마련하고 움집을 만들어 수혈(竪穴)이라는 말을 쓴다. 그 바닥에는 자리를 마련해 기둥을 세웠을 것이다.

 

1967년 사진 설명에서 말한 개기(開基)와 입주(立柱)이다. 개기 다음에 정초(定礎)가 있는데, 저 옛날의 움집에는 주추돌은 아니지만 기둥자리에 잔돌을 놓고 다짐을 해서 단단히 한다음 입주(立柱)했을 것이다. 3~4천년의 오랜 전통인 셈이다. 또 그 집자리 안에서는 여러 형태의 토기와 시루, 숫돌, 어망추 등이 쏟아져 나왔다. 쇠로 만든 낫(철겸, 鐵鎌)과 도끼[철부, 鐵斧]도 있었다. 화덕으로 추정되는 불탄자리[燒土]와 구들로 연결되는 아궁이도 보였다. 요즘말로 치자면 세간살이이고 농기구인 셈이다. 부삭이고 정재였다.

 

3천년~4천년전부터 이어진 지동의 그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를 일구어 온 갓골사람들. 탐진댐 건설로 고향은 사라졌지만, 저 사진 한 장 한 장에 그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다 담겼다. 저 사진집의 역사성이고 진가이다.

 

자응사람이라면, 아니 문화를,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꼭 한권씩 구입해 주시기를 권한다. ‘이문을 남기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막중 손해는 보았다. ‘십시일반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고향을 잃어버린 저 갓골의 어르신들께, 그 후손된 분들께, 꿈에서나마 고향을 보시라고 한 권씩 증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꿈속의 고향-탐진댐 건설로 사라진 지천리 지동마을-, 마동욱 사진집(에코미디어, 305, 연락처 마동욱, 010-3121-6493)

- 2022.07.21. 15:00 출판기념회 -  장흥군민회관

- 2022. 07.21~07.25. 사진전 -  장흥군민회관

 

●1971년의 일은 장흥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세명이 갓골에 살아서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우리 동갑이 그 동네에 7명인가 된다 했다. 친구들이지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터라 임친구, 강친구라 했다. 이향양은 읍내 시양쟁이 살았던 친구이다.

 

●지동(枝洞) - 각골, 갓골, 갖골, 같골, 가골.... 탐문과 자료찾기는 계속된다(흥댐건설로 사라진 고향, 30년 사진 기록, 그 사진집으로 마을사 읽기편 예정)

 

 

조선후기 1872년 장흥지도(규장각 소장)의 지동(枝洞)(아래 붉은색 ∪ 부분). 당시는 용계면에 속했고 1914년 부산면과 합해졌다. 위쪽 기와집 형태 건물이 보림사이고 그 턱밑까지 장흥호에 잠겼다.

 

당산나무 앞에 누운 비석. 이제 저 비문도 읽어 내야겠다(158)

 

1972년의 지천(갓골)마을 항공사진. 이 무렵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갓골 강친구, 임친구, 최친구 세명과 읍내 친구 김희태, 이향양 두명은 신나게 갓골 들판을 쏘다녔다(국토정보맵)

1918년의 지동(갓골)마을 지형도. 1914년 지동(枝洞)과 심천(深川)에서 한글자 씩 따서 지천리(枝川里)라 하였다(국토정보맵)

지천리유적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과 출토 유물(장흥 지천리유적-탐진댐 공사용부지내 발굴조사 보고- 인용, 목포대학교박물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