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78
친구들 흥청 망청, 흥우회(興友會)의 자응 강진 나들이, 2022.06.18
김희태
2022년 6월 18일. 말 그대로 깨복쟁이 친구들이 나들이를 나섰다. 강진과 자응(장흥). 모임의 이름은 흥우회(興友會). 친구들끼리 그저 만나 신나고 즐겁게 흥얼거리며 지내자는 모임. 30대 초반쯤이었을까. 고향 친구들끼리 만나 쐬주 한잔하면서 세상사를 말한곤 했는데, 언젠가 이름을 만들자 했던 것. 동창회 성격이니 그대로 한다면 “장흥중27회 장흥고26회 광주동창회”이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 보니 장흥중고를 함께 다닌 친구도 있지만, 중학교만 다녔거나, 고등학교만 다녔거나 하여 구성은 다양. 그리고 장흥과 강진에 연고를 두고 있고.
그래서 편하게 친구들끼리 흥청망청하자고 하면서 흥우(興友)라 했고, 그 “흥(興)”에는 “장흥(興)과 연고가 있는”으로 풀었다. 강진출신이어도 장흥에서 학교를 다닌 인연. 훌쩍 30년이 넘어 6학년 5반이다. 머리는 희끗, 번들, 훤하고, 허리는 구부정, 다리는 터덕거리고 배 불뚝이가 되어 있다. 한가지 여전히 짱짱한 것은 “입”이다. 다들 양기가 입으로만.
비엔날레주차장, 두암지구입구, 주남마을 마트앞, 화순 대리 4거리에서 일행을 싣고 하니움체육관 한켠, 화순천이 보이는 정자에서 약식과 홍어회로 아침을 떼운다. 어쩌면 “삼식”이 신세가 될 즈음이라 아침을 못 얻어먹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을텐데, 백종진 회장님의 각별한 배려로 일용할 양식이 마련된 것. 장흥 군민회관 앞에서 본터 친구들을 태우고 강진으로 향한다.
김상찬 친구가 가이드로 나섰다. 자응과 강진의 여러 이야기를 특유의 말솜씨로 풀어낸다. 사회 사정에 대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시점이라, 선거에 얽힌 몇 얘기, 최근 들이닥친 수사 얘기 등등, “집나간 지비들 동네에 별일이 많소.” “그러더라도 장흥 발전에 힘을 모았으면 하요.” “군수나 의원들도 잘한다고 해서 됐응께 잘 하겄지요.” “지켜보고 힘 보탤일 있으면 보태쇼 잉”
가우도(駕牛島), 출렁다리와 ‘함께해(海)길‘
가우도는 강진의 형국이 소(牛)의 형상인데, 군청 뒤산 보은산이 머리에 해당한다 하여 우두봉(牛頭峯)이라 하고, 소(牛)의 멍에(駕)에 해당하는 곳이 이 섬이어 가우도(駕牛島)라 했다. 어릴적 강진읍 부춘리 외가집에 갈 때면 “시끄테”라 부르는 곳을 지난 기억이 있다. 지금의 도립병원 부근이다. 나중에 그 “시끄테”가 “소의 혀끝”에 해당하는 형국이어 그리 발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의 흔한 지명도 지역의 역사와 지리 특성을 담고 있다.
가우도 섬은 도암면 신기리에 해당하고 진입 동선은 대구면 저두리(猪頭里)이다. 강진에는 섬이 8개소가 있는데 가우도는 유일한 유인도이다. 대구면과 연결되는 저두출렁다리는 438m, 도암면을 잇는 망호출렁다리는 716m 길이. 실제로 출렁거리는 다리는 뒤에 한켠에 설치하였다. 해안선 생태탐방로 ‘함께해(海)길‘은 2.5km. 한시간 거리이다.
걷다가 쉬다가, 막걸리도 한잔, 아이스크림도, 영랑선생과 사진도.... 가우도에는 25m 높이의 청자타워, 짚트랙(공중하강체험시설), 낚시, 제트보트, 요트, 펜션. 레포츠시설이 많다. 멀리 갈 필요 없다. 저 펜션 한곳에 세들어 하루쯤 밤새껏 얘기하고 섬 한바쿠 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막 가우도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역의 김상찬 친구 왈. “싸묵싸묵 돌면 한시간 거링께 돌고 나와 11시 반에 출발할랑께 그리아쇼.” 돌고 와서 차를 타고 출발하려니 “세상에나. 가이드 말을 그대로 믿고 땀 삘삘 흘리면서 갔다 오느라 고상했오.”
주차장 부근의 안내판에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머리에 해당된다 하여”라는 글을 몇 년전에 보고 지적한바 있는데 아직도 그대로이다. 해설은 “소의 멍에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오기가 된 것이다. 가우도는 조선시대에 화살대(竹箭) 산지로서 기록이 나온다. 화살대는 무기용으로 쓰고 선비들의 수양용으로도 활을 썼기 때문에 국가적 산물로서 중요하다.
마량, 예전의 수군만호진, 현재의 놀토시장
그야말로 흥청 망청의 시간이다. 일찍 집을 나서 화순에서 요기를 했지만, 바닷바람을 쐬고 나니 허기도 지고 술도 고프다. 오대양식당[유림수산]에 자리를 잡았다. 예약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일부는 해산물판매장을 돌고. 절반쯤은 평상에서 한상을 차린다. 한잔 술에 “썰”을 푸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입으로 올라온 양기 탱탱 자랑 시간이다.
마침 면장(강한성)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소시적 동학을 했던 인연으로 휴일임에도 얼굴 본다고 나왔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만학도로 사학과에 들어갔을 때, 동기로 만나서 문화유적 조사를 함께 했고, 졸업 후 고향 강진에서 향토사 활동을 이어갔다. 6월 말까지 근무하고 공로연수 들어간다니 세월도 무상하다. 미역 스무꾸러미를 선물로 마련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마량은 싱싱한 수산물로 알려졌고, 근래들어 놀토시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장흥에서 정남진토요시장이 먼저 시작했지만, 마량의 놀토시장은 여러가지가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한다. 지역과 자원을 활용할 줄 아는 안목이 다르다고 할까.
마량과 관련해서는 마도진 수군만호만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수군 군사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수군사령부이다. 진도의 남도포진이나 장흥의 회령포진, 고흥의 발포만호진 등이 같은 등급의 수군만호진이다. 이 만호진 위로는 수영(水營)이 있다. 전라도는 여수(조선시대는 순천에 속함)에 소재한 전라좌수영과 해남에 소재한 전라우수영의 관할을 받았다. 시기에 따라 좌수영과 우수영 관할 지점의 경계가 강진 마도진이 되기도하고 장흥 회령진이 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기른 말을 육지로 싣고와 마량 일원에서 풍토 적응을 시킨 뒤 전국 각지로 보내지기도 했다. 마량에서 대덕에 이르는 산길따라 만리성이라 부르는 성이 있는데 말과 관련된 것이다.
회령진성(會寧鎭城), 명량대첩의 전초기지
낚시도 수없이 다녔고, 된장 물회 먹으로도 왔었는데, “회령진성”이 있는지 몰랐는데 으째야쓰까
스무명 남짓의 친구들이 다들 진짜 몰랐네. 이런데가 있었어. 허허참.
명량대첩은 안가? 이순신장군도 알제?
아문. 그건 알제. 얼마전 영화도 봤제. 천만이 넘었다는 “명량”
아. 그래. 다행이시. 이 회령진에서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했어. 백의종군이라고 들어 봤제. 그 백의종군 길에 통제사 임명장이 내려 왔어. 그것을 교서(敎書)라고 해. 이곳 회령진에서 취임식을 한거여. 통제사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삼도의 수군을 총괄지휘하는 큰 임무가 부여된 자리여. 회령진에서의 취임식도 중요한디, 더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장흥 선조들이 의병으로 수군으로 이곳 회령진으로 모여 들었어. 군량미도 보내 오고 물자도 모으고, 전선도 고치고... 이게 바탕이 되어 명량대첩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여. 말하자면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장흥사람들. 그 전초기지인 회령진성. 우리가 그 역사적인 자리에 온 곳이여.
원래 이 일대는 주포라고 불렀어. 1406년부터 주포에 병선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부터 이곳 주포, 회진이 수군 군사 기능을 했던 것이여. 또 한곳은 소마포라고 나와. 그곳은 지금은 보성군 회천면 지역에 있는데 1422년에 소마포 이름이 등장해. 그런데 지금은 보성이지만, 조선시대 때는 그곳도 장흥부에 속했어. 1914년에 보성으로 넘어가제. 그쪽에 아주 짧은 기간 병선이 배치되었는데, 그마저 얼마 안 있다가 이곳 회진(회령포진)으로 옮겨 버려. 1425년 이제.
그리고 1490년(성종 21)에 회령진성을 쌓았제. 지금 보이는 저 성이 그때 쌓은 것이여. 이곳 회진에서 수군사령부가 들어선 뒤 100여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흥, 강진 선조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벌떼처럼 일어난거여. 이순신장군의 지휘력과 물길을 알고 지리에 익숙하고 배다루는 기술이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경험이 합해져 요즘말로 하자면 “씨너지”를 일으킨 것이여. 올라가 한바쿠 돌아봐.
회령진성은 마을의 배산을 이용한 부정형성으로 600여m쯤이 남아있다. 지도나 기록(회령진지)에는 객사·동헌·내아·비장청·군기고·선창고 따위가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의 관아건조물 자체는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성벽에 올라 돌면서 바다를 조망해 본다. 뒤로 돌아보면 천관산이다. 성벽을 돌다말고 떨어진 살구를 몇알 집는다. 저만치 비파도 보인다. 노릿하니 잘 익었다.
회령진성에 보이는 동쪽의 들녘은 원래 바다였는데, 간척이 된 곳이다. 피난민들의 정착사업으로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최대의 간척지가 된 곳이다. 황해도 남부사람들이 전남쪽으로 정착했다. 1961년 5월의 난민정착사업 현황을 보면, 전남 25개 시군에 163개 사업장 7,639세대 40,300명인데 장흥이 22개 사업장으로 가장 많았다. 1,858가구 9,623명으로 전체 인원의 24%에 이른다. 장흥은 흥업회가 운영하였고 전국 최초로 대덕 사업장을 완공하였다. 1966년 5월 30일에 대덕 사업장 준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대덕을 비롯해 사촌, 풍길, 고마, 장관, 덕촌에 정착사업장이 조성되었다. 중심인믈이 평양 출신의 김형서(金瀅瑞)선생이었다. 안양면에서 피난민 연락사무소를 운영했는데, 1961년 10월에 장흥군 난민정착사업연합회로 개편하고, 1963년 10월에 사단법인으로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라 하였다. 약칭으로 흥업회라 했다.
정남진 전망대에 올라 사면을 돌아 보면서 산과 바다를 내다 보았다. 저 건너 보이는 것이 고흥이요, 저 짝은 완도, 쩌그 저 다리는 고흥 녹동에서 소록도 가는 다리요. 와! 여그서 봉께 가깝네. 장흥 문화관광해설사(김은희님)가 멋진 해설을 한다. 흥우 회원들이 점심 때 한잔씩 한 지라 중간 중간 질문을 해댄다. 아서라. 현지 해설을 들을 때면 해설을 경청하고 끝난 뒤 질문을 하는 것인데, 고향이라 반가워서 그랬겠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사람들은 벌금 받을거여. 해설사 두분이 교대로 근무하는데, 다른 한분(손수자님)은 김상찬 회장과 김희태 강사가 왔다고 녹차를 물병에 담아 준다. 그분 동생도 우리와 같이 중학교를 다녔다.
정남진 전망대 입구에 안중근의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2010년에 세웠다. 동상 건립문에 새겨진 글을 읽어 본다.
안 의사께서 순국하신 후 35년 만에 조국은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 후 지금까지 60여 성상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이미 천국에 울린지 오래건만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상기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구천에 계신 의사의 영령에게 죄스러울 뿐이다.(화산 윤수옥 謹撰)
이젠 해동사로 가는 일정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간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간척지 사업을 했다는 곳, 장재도쪽 제방을 쌓자 생태계가 죽어버렸는데 중간에 일부를 다리로 복구하니 생태계가 살아났다는 곳, 소등섬이 저만치 보이고, 꿀을 구워 먹는 명소가 된 마을과 그 갯밭을 보면서, 논둑길 같은 구불구불 좁은 길을 “리어까” 달리듯 잘도 달린다. 28인승 관광버스. 삼성해외관광
앞에서는 김상찬친구의 해설, 중간에서는 입심좋은 노양재친구의 바나나 세 개 등 와이담, 서로 공부 못한 놈이라고 앙당되면서 히히 낄낄. 그란디 머슬 겁나게 많이 알아부러서 놀랠 노자.
해동사 오르는 길, 장동면 만련리 만수동이다. 긴급 제안이 들어 온다. 아직도 성장판이 열려 있어 키기 크고 있다는 이오배친구. 해동사 동네가 탯자리인데, 올라가다가 우리 보무님께 절 한번 하고 갑시다. 아 그랍시다. 약간의 언덕길을 올라 산소앞에 일열로. 야유회이지만, 성묘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살아신제 못했지만, 세배를 드리는 걸로 여기고.
광주에서부터 언제 개봉할까 조심 조심 간수했던, 이름을 말하기가 좀 그런 귀한 약초로 담은 약주.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약술병이 비었다. 언제 먹었나. 중간에 병이 깨져서 다 흘러버린 것. 으짠지 관광버스 바닥에 머인가 흐르더라. 그때사 말하는 친구들. 그 귀한 술을 친구들과 한잔씩 하려고 몇년간 담궈 뒀다 가져 왔는디.... 술기 머금은 약초를 병에서 꺼내 입맛을 다시는 친구도 있다. 허전함 뒤로하고 해동사 신실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장흥 유림의 의리정신과 해동사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당인 해동사(海東祠) 소재지는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 25-121. 1955년 장흥 죽산 안씨 문중과 전남도내 향교의 유림들이 나서서 만수사 부지 내에 건립하였다. 유림 의산 안홍천(義山 安洪天, 1895~1994)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동명월(海東明月)의 휘호를 받아 현판을 걸고 해동사(海東祠)로 이름 지었다. 전국에서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안의사 사당이다. 순전히 장흥 사람들의 의리정신의 발로가 시작점이었다.
1955년 10월 27일 장흥에서 해동사에 안중근 의사 위패를 모시는 의식을 가졌는데 전국에서 1만여 명이 모였다.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다. 당일 봉안식은 장흥대교를 지나는 시가 행진을 먼저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딸 안현생은 영정을 모시고 조카 안춘생은 위패를 모시고 참례하였다. 이때의 사진이 전하여 역사성을 반증한다.
2020년 안중군 의사 순국 110주년을 맞아 장흥군에서는 ‘정남진 장흥 해동사 방문의 해’를 선포하고 해동사를 성역화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탐방로, 역사공원, 기념관, 주변 정비, 일부는 완료했다. 1984년 만수사에 포함되어 전라남도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2019년 12월 26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별도로 지정되었다. 안중근 의사 관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시설물이자 안의사를 단독 배향한 유일한 사우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만수사 경내에 있지만 분리해 새로 지정한 것이다.
사당 봉심(奉審)에 대한 설명과 곁들여 배(拜) 흥(興) 배(拜) 흥(興) 예를 갖추고 강진 자응 기행을 마무리한다. 장흥 삼합으로 저녁을 거나하게 들고 광주로 향하는 차속에서 한곡조씩 하다가 관두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한다.
내가 억지로 가서 청바지를 사고 입고 왔어. 알제. 청바지.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이제 곧 칠십인데, 그때는 와상환자들도 있을 것이여. 얼마 안 남났어.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자고. 주봉지기천배소(酒逢知己千杯少) - 깨복쟁이 친구와의 술은 천 잔도 부족하다네.
*함께 한 친구들(ㄱㄴㄷ순): 김두조, 김상찬(해설사), 김선호, 김정수, 김준종, 김현정, 김희태(기록사), 노양재(만담가), 백종진(회장), 송승종, 안남수, 안오순, 위선동, 윤영팔, 이상범, 이영태, 이오배, 이재율, 임선모, 임운기, 정병길, 조정철, 최한석
*당일 회비는 한사람당 개인 거출 5만냥, 적립 회비 지원 5만냥 꼴로 처리했다. 십만냥 낸 친구도있었고. 참석 못한 친구(조창희, 정황채, 안현엽)들이 찬조 회비를 보내오기도 했다.
강진 가우도
회령진성에서 본 천관산
회령진성에서 동쪽을 보다 - 저 물길 건너 들이 간척장이다
회련진성 옛 성벽과 복원 성벽(2010.4.11) - 흥우회 답사 날은 성벽 위의 저 나무에 살구가 주렁 주렁. 전봇대 부근이 북문(北門) 자리
조선시대 지도에 나타난 회령진성과 천관산(1872년, 규장각 소장, 회령진지도) - 동문쪽으로 올라 북문 부근까지 성벽 답사
억불산 바라보며 탐진강(예양강) 강터에서 - 헤어지기 서운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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