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52 - 무안의 대봉감과 함평 대굴포의 김충수 의병 격전 옛터 안내판

향토학인 2021. 11. 12. 00:42

인지의 즐거움252

 

무안의 대봉감과 함평 대굴포의 김충수 의병 격전 옛터 안내판

 

김희태

 

대봉감이 한 상자 택배로 왔다. 이래도 되나 싶기는 하지만, 그 어르신의 정성을 받아 들이고 있다. 무안에서 온 감인데 함평과 연관이 있다. 우선 대봉감과 연관하여 무안이나 함평의 토산물과는 관련이 있을까 찾아보았다. 함평의 토산으로 감[柿]이 올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평군 토산조.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고 1530년(중종 25)에 신증본이 나온, 왕명으로 간행 된 관찬 지지이다. 무안 토산으로는 올라 있지 않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평의 토산으로 540년전 국가 기록에 나오는 감. 풍토가 비슷한지라 무안의 대봉감도 역사성이 깃들었을 것 같다.

 

“감 [柿] ”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말하려는 것은 역사인물과 유적현장에 관한 것이다. “감”등 지역의 산물은 문헌 기록의 역사성과 잘 꿰어서 홍보하자는 것이다. 그 현장은 함평 쪽의 정유재란 전적지이다. 무안 출신 귀암 김충수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평에서 격전을 치르다 가족과 함께 순절하였다. 함평 대굴포. 조선시대에는 무안에 속했던 곳이다. 그 역사 현장에 안내판을 세우고자 하여 나주김씨 무안종회에서 함평군과 협의를 하고 문안 작성을 부탁해 왔다. 자료를 뒤적여 정리한 것이 아래 안내문이다. 뒤에 들으니 현장에 잘 세웠다고 연락을 하셨다. 무안 몽탄에 사시는 김상풍 어르신이다. 안내판 설명문 파일 저장 연도를 보니 2013년 8월 12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퇴직한지도 몇 년이 지났는데 옛 정리를 잊지 않으시고 대봉감을 보내온 것이다.

 

귀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

龜巖 金忠秀先生 丁酉再亂 激戰殉節 遺址

 

이곳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귀암 김충수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격전을 치루다가 가족과 함께 순절한 곳이다.

 

김충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와 군마를 헌납하여 관군을 구제했고 군병을 모집해 근왕(勤王)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동과 향촌 장정 1천여 명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우려고 가다가 몽탄강(夢灘江)을 거슬러 올라오는 대규모 왜적을 맞아 분전하여 많은 적을 물리쳤으나 끝내 패퇴하여 대곡산에서 순절하였다. 이때 부인 금성나씨는 남편이 왜적에게 둘러싸여 사경에 처하자 그 앞을 가로막고 왜적을 꾸짖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김충수(1538~1597)의 자는 중심(中心), 호는 귀암(龜巖), 본관은 나주이다.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출신으로 조부는 김수남(金粹南), 부친은 통훈대부 광주목사(光州牧使) 취암 김적(鷲巖 金適)이다. 21세 때인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임진 정유왜란의 공으로 1605년(선조 38)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으로 녹훈(錄勳)되고 1799년(정조 23)에는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 議政府左叅贊 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되고, 부인 금성나씨에게도 정부인(貞夫人) 증직과 함께 정려를 내렸다.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배향되었고 고종조에 민영목이 시장(諡狀)을 찬술하였다.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충의정신을 기려 격전지이자 순절한 옛터에 이 표지를 세운다.

 

 

안내판은 2013년인데 그 5년 전에 인연이 시작된다. 2008년 9월 무안 몽탄면 다산리에 있는 선산 재실 (綿瓜亭)을 정비하다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있어 현장을 갔다. 재실은 앞면 4칸의 팔작지붕집인데 원 건물의 장혀에는 “숭정기원후 5임신(崇禎紀元後五壬申)의 연기 표기가 있어 1871년(고종 8) 상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원 건물이 남아 있었다면 귀한 건조물이다. 비석은 매안했던 것이 드러난 것 같았다. 김수남(金粹南, 1487~1540)선생의 묘표로 보인다. 김충수공의 할아버지이다. 5행의 글을 새겼다. 끝에 척나세찬서(戚羅世纘書)라 하여 인척인 나세찬의 글씨라 하였다. 1542년(중종 37, 嘉靖 壬寅)이다. 두 번을 갔었던 모양이다. 면과정 보고전은 2008년 9월, 비석을 찍은 때는 2011년 11월 11일이다. 10년전 오늘. 이제 보니 이 묘표는 나세찬(羅世纘, 14981551)선생의 문집 송재유고(松齋遺稿)에도 실려 있다.

 

"승사랑 교수 김수남 양중의 묘. 금성인이고 통훈대부 능성현령 우(祐)의 운손(雲孫, 8대손)이다. 부인은 금성정씨이다. 아들은 적(適) 원(遠) 순(巡) 형(逈)이고, 큰 아들은 진사에 올랐고 나머지는 어리지만 재능이 있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대범했으며 식리하지 않았으나 부유로웠다. 언행은 정직했고 그 풍모에 사람들이 감복했다. 연징산 동쪽에 장례했다. 한 자 남짓 비갈로 자세하기는 어렵다. 정미년에 태어나 임술년에 졸하였다. 1542년(중종 37)에 인척 사옹정 나세찬이 썼다.(承仕郞 敎授 金粹南 陽仲之墓 錦城人 通訓大夫 綾城縣令 祐 雲孫 聚錦城丁氏 子 適遠巡逈 長登進士 餘少而才 公性廉簡 不殖而富 言行正直 人服其風 生丁未 卒庚子 葬淵澄山東 餘寸碣難詳 嘉靖 壬戌 戚 司饔正 羅世纘書)"

 

2013년 안내판을 작성하였고, 2015년에는 호국유적과 관련하여 인연이 이어진다. 문화재청에서 추진한 호국유적 사적 지정 관련하여 정유재란 의병 김충수선생 등을 배향한 무안 우산사(牛山祠) 신청서를 제출한 것. 무안군과 전남도를 거쳐 문화재청에 제출했는데, 사액(賜額)을 받은 극히 일부 원사(院祠)만 1차 평가를 통과해 지정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러차례 소통하면서 자료를 정리한 바 있다.

 

또 한 가지는 장흥 보림사와 나주 안노현과 관련된 내용. 우리나라 역대 명문장을 모은 『동문선(東文選)』. “가지사 판상운(迦智寺板上韻)”과 “안로현(安老縣)에 이르러 첫 공사를 보며 앞의 운을 따라 다시 지음[到安老縣聞新事復用前韻]”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지은이는 월당(月塘) 김대경(金臺卿, 1305~1377). 나주김씨이고 1326년(충숙왕 13) 고려 문과에 급제한 문장가이다. 김상풍 어르신이 종중 어르신(김백형님) 한분과 사무실을 오셔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입력된 김백형님의 전화가 011인걸 보니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저 시에 나오는 가지사는 보림사를 이르는데 조선시대 초기까지 가지사로 썼다. 1407년(태종 7) 자복사(資福寺)를 지정할 때 조계종 가지사가 든다. 안노현은 고려시대에 나주의 속현이었는데 조선시대 초기 직촌화 될 무렵 나주에 속하였다. 1906년에 영암으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금정면 안노리 일원. “안노현...”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 안로폐현(安老廢縣)조에도 실려 있다. 나주 안노현, 치소는 오늘날의 영암 금정면 안노리. 가지사, 오늘날의 장흥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는 이웃한 곳이다. 안노현 임직으로 있을 때 가지사를 방문한 것 같다. 2015년 보림사에 “가지사 판상운(迦智寺板上韻)” 시 원문과 국역문 시판을 나주김씨 종중에서 걸었다.

 

가지사 판상운(迦智寺板上韻)

 

백 자나 되는 높은 탑이 반공에 솟았는데 / 百尺浮圖插半空

높고 큰 누각이 겹겹이 벌여 있네 / 飛樓傑閣幾千重

중을 찾는 흥치는 한가할수록 더하고 / 尋僧野興閑彌篤

불도 배우는 기연은 늙어 점점 깊어가네 / 學佛機緣老漸濃

걷고 벗고 수없는 물을 건너와서 / 揭厲屢經無盡水

잡으며 최고봉을 그에 올라왔네 / 扶持更上最高峯

저녁에 두 다리가 시큰하니 / 晩來雙脚多酸楚

포단에 목침을 베고 쭉 뻗고 누웠노라 / 木枕蒲圑忽放慵

*양주동역(한국고전종합DB)

 

택배로 온 “대봉감”을 실마리로 무안의 김상풍 어르신과의 인연을 되돌아 보았다. 무안과 함평, 장흥, 나주, 영암 여러 고을이 관련된다. 나로서는 지역의 여러 자료를 살펴 볼 수 있었고, 졸문이지만 안내판도 작성하여 보냈다. 사실 내가 공부를 한 것인데도, 그 어르신은 이런 인연과 정리를 잊지 않고 이따금 택배를 보내 오신다. 양파에 대봉에. 조그마한 인연도 소중히 하라는 큰 가르침이다. 늘 그랬듯 장흥 토산 무산김으로 답례를 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서야겠다. “귀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 안내판 현장 함평 대굴포를 거쳐 무안 몽탄면 차묏등의 김수남공 묘표를 둘러 보러.

 

2018년 3월 16일 나주 거쳐 도청 가는 길에 들러 사진에 담았다.

김충수공의 사마방목. 1558년(중종 13) 무오 식년시 생원. 본관(나주), 거주(무안), 부친(김적), 구경하(부모생존), 안항(형제, 효수, 덕수)

 

김수남공 묘표. 1542년 나세찬 서. 2011.11.11.

나세찬선생 송재유고의 교수김공[김수남] 묘표
김수남공 묘비를 둘러 보시는 김상풍 어르신(무안 몽탄면 나주김씨 선영)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평현 토산조의 감[枾](3행) - 1481년 간행하고 1530년 증보판[신증본]. 540년전 조선조때 왕명으로 간행한 관찬 지지에 나오는 감. 지역의 특산물은 문헌 기록 등을 덧붙여 홍보할 필요가 있다. 

김대경선생의 시 '到安老縣聞新事復用前韻', '迦智寺板上韻'(<동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