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47 - 당산나무를 돌면서 강강수~울래, 1938년 5월 장흥 원도리-83년전 사진을 통해 읽어 보는 마을 변천사-

향토학인 2021. 8. 11. 04:14

인지의 즐거움247 

 

당산나무를 돌며 강강수~울래, 1938년 5월 장흥 원도리

-83년전 사진을 통해 읽어 보는 마을 변천사-

 

 

김희태

 

1938년 송석하선생이 조사한 민속현장

 

1938년 5월에 찍은 민속현장을 찾았다. 2021년 8월 4일. 83년이 지난 현장.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1구 원도마을. 그 사진속의 당산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주변은 변했고 건너에는 고층 아파트 숲이 들어섰지만 두 당산나무는 사진속의 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저 사진의 설명을 찾아 보았다. 1938년 7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려 있다. 민속학자 송석하선생의 글. 당시 ‘향토문화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전국의 역사 현장과 민속풍물에 대한 조사 탐방 기획물을 연재 했는데, 여섯편의 장흥 기사 가운데 다섯 번째 “民俗의 가지가지”편의 일부이다.

 

舞踊

유독히 장흥 뿐만 아니라 순천, 보성, 해남, 완도, 진도 등의 해안지방 일대에 정월 上元의 저녁이나 8월 추석의 밤에 젊은 부녀자의 民俗圓舞인 ‘강강수월래’가 있는 것은 전에 소개한바 누차 있거니와 강강수월래는 한자로 ‘强羌水越來’라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이는 附會를 위한 附會에 지나지 못하고 舞踊學上이나 민요 발달의 자취로 보아서는 반드시 수백년 전의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고대인 古舞踊 형태의 하나라고 斷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용에 수반되는 민요의 곡조는 그간 불명하였으나 이제 실제로 조사하여 본 즉 진양조가 주가 되고 그 다음 점차로 急調로 급템포로 변하는 것이다. 무용은 비교적 심플하나 그 반면에 소박한 맛은 나쁘게 세련된 것 보다는 수배 優雅하다고 하겠다.(부녀자들의 강강수월래 장면 사진)

 

지금은 ‘강강술래’를 주로 쓰고 있지만 저 때는 ‘강강수월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자 표기 ‘强羌水越來’는 부회를 위한 부회라 언급하고 있다. 부회, 견강부회(牽强附會)를 말한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자기 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함을 비유하는 한자어. 발음은 ‘강강수월래’로 한다 해도 한자 표기를 ‘强羌水越來’라는 해석은 억지라는 것.

 

원도리 출신 고향친구(조정철님)에게 연락을 해보니 당산나무 하나는 죽었을 것이라 하였다. 친구가 죽었다 한 것은 윗부분이 잘렸던 것을 그리 이른 것 같다. 저 사진으로 보면 지금처럼 길은 크게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가 어렸을 때 자기 선고장(조행근님, 1927~2017)께서 막걸리를 몇말씩 부어주곤 했다고 한다. 생태적으로는 양분의 공급이고 마을 신목으로서는 정성의 헌성이다.

 

옛사진을 통해 읽어 보는 마을 변천사

 

저 사진속의 광경 1938년 당시는 장흥군 장흥면 원도리였다. 그 2년전까지는 부동면 원도리. 1936년에 부동면과 장흥면이 합해져 장흥면이 된다. 부동면은 조선시대 장흥의 읍격(邑格)인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읍치의 동쪽이라 “부동(府東)”이 면 이름이 되었다. 원도리(元道里)는 1912년 마을 조사자료에 처음 나온다. 이 원도리와 연곡리가 합해져 1914년에 원도리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벽사하리(碧沙下里)라 하였다. 전통시대 교통시설 국기기관이라 할 벽사역(碧沙驛)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1938년 이전으로 가면,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벽사하리(碧沙下里)로 나온다. 벽사역과 관련 됨을 알 수 있다. <호구총수>는 당시 전국이 군현별 면리명과 호구수를 기록한 관찬 지리지이다. 이어 1872년 전라도 장흥부 지도에서는 벽사도[역]와 부동면의 마을 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8도제는 1895년에 23부제로 개편된다. 전라도는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 4개로 나뉜다. 전라도 장흥도호부는 나주부 장흥군이 된다. 이듬해 1896년 8월에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개편된다. 그 이전의 8도에서 전라, 경상, 충청, 함경, 평안 5개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어 13도가 된 것이다. 장흥은 전라남도에 속해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를 정리해 본다.

 

〇1789년(호구총수) 전라도 장흥도호부 부동면(府東面) 벽사하리(碧沙下里)

〇1872년(장흥지도) 전라도 장흥도호부 부동면, 벽사역

〇1895년(행정개편) 나주부 장흥군 부동면 벽사하리

〇1896년(행정개편)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벽사하리

〇1912년(리동조사) 전라남도 장흥군 무동면 원도리(元道里) / 부동면 연곡리(淵谷里)

〇1914년(행정개편)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원도리 - 원도리+연곡리

〇1936년(명칭변경)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면 원도리 - 장흥면+부동면

〇1938년(민속조사)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면 원도리 - 강강술래 사진

〇1940년(행정개편)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 읍 승격

〇1945년(항공사진)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원도리 유래를 보자. 이곳 원도리와 관덕리 일대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벽사도 찰방역이 있었다. 벽사역을 비롯하여 가신역, 파청역, 양강역, 낙승역, 진원역, 통로역, 녹산역, 별진역, 남리역 등 10개역을 속역으로 거느렸다. 지금의 보성, 고흥, 강진, 영암, 해남에 속한 역이었다. 주변에는 벽사역과 관련된 마을이 들어서 역촌으로도 불렀던 것 같다. <조선지지자료>에 ‘역냇갓’을 ‘역천(驛川)’이라는 땅이름이 확인된다.

 

‘원도’는 ‘원두골’이 변한 이름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 역에는 숙소 기능을 하는(院)과 관련되기 때문에 ‘원(院)마을’이라고 했다. 원+마을>원마을>원말>원멀>원머리로 되면서 ‘머리 두(頭)’를 취해 ‘원두(院頭)골’이라 한 것이며 원두>원도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두(院頭)를 원의 우두머리로 풀이하기도 한다.

 

다른 유래로, 원두표(元斗杓, 1593~1664) 순찰사와 관련시켜 설명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두표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순찰사로 장흥을 순찰한 적이 있어 이와 연관하여 “원두-원도”리라 했다는 것이다. 원도마을 옆 관덕리 226번지에는 원두표 순찰사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 가운데에 “겸 순찰사 원후두표 선정비(兼巡察使元侯斗杓善政碑)”라 새기고 좌우로 4언의 찬문을 넣었다. 撫恤驛卒 萬世流芳(벽사 역졸에게 위로하며 베풀었으니, 아름다운 그 명성 만세토록 전하리). 연대 표기는 비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는 1635년 8월 1일조에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풍재(風災)를 치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자연 재해와 관련하여 순찰을 하면서 벽사역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고, 이로 인해 “撫恤驛卒”이라는 찬문을 새겨 선정비를 세운듯 싶다.

 

장흥 “지도리” 행정지명 확인차 83년전 강강수월래 현장 탐방

 

찌는 듯한 더위였지만 찾게 된 것은 두가지 인연. 하나는 2021년 7월 16일 받은 책.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이치헌이 글을 쓰고 김태영이 기획과 편집을 했다. 한국문화재재단 출판사인 문보재 출판. 2021년 4월 간행되었다. 진도 출신으로 가무악의 완성자라 할 무송 박병천(1932~2007)선생의 일생을 시대사와 사회사정을 함께 버무려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정리하였다. 금요일 오후에 받자마자 그날 저녁내 빠져 들었다. 국악이나 민속문화, 무형문화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아니라 해도 일독할만하다.

 

2월에 김태영님으로부터 가객(歌客) 박덕인(朴德寅) 명인에 대한 자료요청을 받고 <은파유필> 디지털 이미지 파일 일부를 제공하였다. <은파유필>은 무정 정만조(1858~1936)가 진도 유배기단 중 전반기(1896~1899)에 기록한 생활문화현장의 시집. "가객 박덕인에게 주다[贈歌者朴德寅]"라는 정만조의 시 제목 옆에 세주를 기록했다. 유배객이 받은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객의 나이는 70여 세로 모든 가곡의 고상함과 속됨, 맑음과 탁함, 느림과 빠름, 슬픔과 기쁨을 최고로 잘 하였다. 그것을 폐한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를 위해 비로소 펼친다고 하였다. 또 춤을 잘 추었는데, 가야금 및 퉁소를 부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歌者 年七十餘 凡歌曲 雅俗淸濁緩促哀愉無不極善 廢之二十年餘 爲余始發云 又能舞 尤工於伽倻琴及吹簫笛]

 

박덕인은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명인 박종기(1880~1947)선생의 부친이다. 박종기의 형님 박종현의 손자가 박병천선생이다. 국악명가로 내림이 있다.

 

또 다른 인연은, 2010년에 장흥문화원에서 매년 내는 향토학술지 <장흥문화> 32호에 이 사진을 소개한 바 있다. 1938년에 송석하선생이 장흥 지역을 탐사한 내용을 조선일보에 7월 7일부터 13일 사이 여섯차례 연재하였는데, 이를 장흥문화에 실었던 것이다. 당시 김기홍원장님이 마이크로필름본을 정리하여 보내온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 간행 자료(<석남 송석하-한국민속의 재음미>)와 비교하여 교정하고 주석을 덧붙여 실었다. 조선일보의 사진에는 마을명은 없었지만 “장흥”이니 이 현장을 찾아 봐야지 했었다.

 

최근 인연이 된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에는 강강술래를 설명하면서 “장흥 지도리 강강수월래”를 언급하고 있다. 강강술래가 진도와 해남 일원만이 아니라 육지부 등 여러 곳에서 행해졌던 민속놀이라는 설명을 하면서이다. 그런데 “지도리”라니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장흥 “지도리”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이다.

 

원본을 찾고자 뒤적거렸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송석하선생의 조사자료가 소장되어 있고 이를 디지털자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조사카드에 실린 사진자료의 설명에 “장흥면 지도리”라 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조사카드에 “元道里”로 표기했는데 약간 흘림체라 “元”을 “之”로 보고 이를 한글로 "지"로 표기해 버린 것 같다.

 

어떻든 그 현장 "원도리"로 나선 것이다. 최경석님이 동행하였다.

 

* 도움되는 자료

- 70년전의 長興의 文化遺蹟과 民俗 현장- 1938년, 장흥 향토문화를 찾아서-(송석하), <장흥문화>32, 장흥문화원, 2010, 54~69쪽.

- 국립민속박물관, <석남 송석하 -한국민속의 재음미 上·下->, 2004.

- 윤여정, 『대한민국행저지명1』-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 박명희·김희태 역해, <역해譯解 은파유필恩波濡筆>(정만조 저), 진도문화원, 도서출판 온샘, 2020.

- 이치헌 글, 김태영 기획·편집,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문보재, 2021.

1938년 5월의 원도마을 강강수월래(송석하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자료 부분 인용) - 마을에서 읍내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나무는 밑둥은 남고 윗부분은 자라지 못했다. 왼쪽 나무도 큰 가지 하나는 못 자란 것 같다. 가운데 아래 등에 업힌 꼬마는 지금은 85세쯤일 듯하다. 어쩌면 몇 분은 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현장을 기억하고 있을까. 다시 나서야겠다.

송석하선생 조사자료 원본 이미지(국립민속박물관 석남 384/이뮤지엄[www.emuseum.go.kr] 인용)-1938년 5월 날자와 장소, 내용을 기록했다. 다만, 후대에 元道里의 元이 흘림체라 之자로 보고 한글로 “지도리”라 표기를 한 기록이 보인다. 그래도 이 “지도리”라는 표기를 확인해 보고자 83년전의 역사 현장을 넘나드는 공부길에 들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벽사도(역)와 부동면 부근도(전라도 장흥부 지도, 1872년, 규장각소장, 奎10439) - 조선시대 면 이름은 읍치로부터의 방향에 따라 편제하는 경우가 많아 방위면(方位面)이라 하였다.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읍치(邑治, 오늘날의 군청 소재지)의 동쪽이라 하여 "부동(府東)"이 면 이름이 되었다. 동문(東門), 동교(東橋)의 지명도 보인다. 기양리 등 읍성 안과 부근은 부내면(府內面), 성불리 등 읍성 서쪽은 부서면(府西面)이다. 이 세 곳의 면이 오늘날의 장흥읍을 이룬다. 1914년에 부서면이 장흥면과 합해졌고 1936년에 부동면이 합해졌다. 강강술래 사진은 1938년, 장흥면일 때이다.

 

1918년 지형도 원도리 부근도(국토지리정보원)

1945년 항공사진(국토지리정보원) - 왼쪽 하단의 장방형이 장흥초등학교.

원도리 1구 원도마을 전경(장흥읍지, 2018)

순찰사 원두표 선정비(2016.4.20. 높이 101㎝, 너비 45㎝, 좌대높이 22.5㎝)

- 撫恤驛卒 萬世流芳 벽사 역졸에게 위로하며 베풀었으니 아름다운 그 명성 만세토록 전하리

순찰사 원두표 선정비 전경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1구 원도마을 당산나무 현장(2021.8.4) - 83년전의 그 당산나무는 그자리에 있었다. 오른쪽 나무는 윗가지가 자라지 못했다. 왼쪽 나무 건너로는 아파트 숲이 들어 섰다. 이 동네출신 조정철 친구님은 선고장께서 막걸리를 몇말씩 나무에 부어주었다는 것을 들었다. 생태적으로는 양분의 공급이고 마을 신목으로서는 정성을 모은 것이리라.

 

1938년의 나무는 밑둥에 조그만 생채기가 있었는데 83년이 지나면서 꼬마들이 끼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저 동각에서 어르신들의 옛 얘기를, 마을회관에서는 어머님들의 강강수~울래 민요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선선해지면 원도리 1구 원도마을 친구 조정철님, 박영배님, 2구 연곡마을 친구 김상찬님과 마을조사를 나서야겠다. 아니다. 친구들도 이제 “6학년”이니 우리 기억속의 마을 이야기부터 들어야겠다.

*조정철님은 창녕조씨로 선대는 화순에서 세거했는데 장평 복흥리로 옮겨 살았고 할아버지 때 원도리로 들어 왔다고 들었던 기억을 얘기했다. 아버님(조행근선생, 1927~2017)은 열살 무렵. 사진상의 강강술래 시기와 엇비슷하다. 동네에는 당골이 있었고 백중에는 당산나무에서 매구를 쳤다고 한다. 두사람의 동네친구를 말하며 그네들의 엄마가 동네일을 잘 알 것이다. 한분은 강진 "치랑(칠량)"에서 시집왔고 또 한분은 안양 사촌에서 오셨다. 사촌에서 오신 분은 우리 동창 김성님의 장모님이다. ... 이런 얘기가 모아지고 정리되면 마을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