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57 - ‘울금’의 역사 기록 검토와 해석, 2009

향토학인 2016. 6. 13. 01:09

인지의 즐거움057

 

‘울금’의 역사 기록 검토와 해석

 

김희태

 

  역사 기록의 검토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재상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시 가운데 “겉에는 울금이 덮였네 / 外襲鬱金衣”라는 구절에서 고려시대 중기에 “울금(鬱金)”이 국내에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삼별초 항쟁 이전의 기록이고 작자인 이규보는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점에서 기록의 역사성을 반증해 준다.

 

   고려시대 후기의 학자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실린 시 가운데 “울금으로 달인 술 감치면서도 순수하고 / 鬱金煮酒旨且醇”라는 구절에서 고려시대에 음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곡은 학자로 유명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부친으로, 목은 이색은 조선왕조 개창기에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480년 간행, 1530년 신증본)의 군현별 토산(土産)조에 기록이 나오는데 울금(鬱金)은 동복(현 화순 동복 일원), 광양, 곡성, 임실, 순창, 전주 등 주로 전라도 지역의 토산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인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1420∼1488)의 문집인 <사가시집(四佳詩集)>에 ‘울금을 읊다[詠鬱金]“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우리 선조들이 약용은 물론 관상용과 생활용, 조경용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은 전라도의 중심고을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의 중수기문을 짓기도 한 인연이 있다.

 

     울금(鬱金)을 읊다 / 詠鬱金

 

     늦은 봄 황폐한 정원에 울금을 심었으니

        春晩荒園種鬱金(춘만황원종울금)

     죽죽 자란 오월엔 산발처럼 더부룩해지고

        森森五月欲抽簪(삼삼오월욕추잠)

     가을이 오면 장차 천 길이나 높이 자라서

        秋來擬見高千丈(추래의견고천장)

      비바람 몰아칠 때 청아한 소리가 나는 걸 보겠지

        風雨聲中作鳳吟(풍우성중작봉음)

 

   그 시상. 집 앞 마당이 쓸쓸했는데 그 한켠에 울금을 심은게 늦은 봄. 죽죽 자라나 오월이 되니 산발한 머리처럼 더부룩 해진다. 아마도 이 무렵 지은 시인가 보다. 앞으로 가을이 오면 더 높이 자라나 하늘 가까이 올라 비바람 몰아치는 소리마저 먼저 보겠지.

 

   조선시대 후기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인 <산림경제> 제4권 치약(治藥)조에서 울금(鬱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울금’ 제목 옆에 한글로 ‘심황’으로 표기하고 있다.

 

     울금(鬱金) 심황 : 鬱金나는 곳에만 난다. 모양이 매미의 복부같이 생긴 것이 좋다. 이것은 매우 향기롭지는 못 하나 그 기운이 가벼워 주기(酒氣)를 높은 데까지 이르게 하므로 신을 내려오게[降神]할 수 있다. <의학입문> □월에 뿌리를 캔다. <속방> 물에 씻어 배건(焙乾)해서 사용한다. (鬱金 심황 : 在處有之 形如蟬肚者佳 此物不甚香 但其氣輕揚 能致達酒氣於高遠 以降神也 [入門] 月採 [俗方] 水洗 焙乾用)

 

   역사 기록의 해석

   이상의 역사 기록을 통하여 보듯이 ‘울금(鬱金)’은 고려시대 중기부터 기록이 확인되어 대대로 약용과 생활용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고,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인 이규보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어 삼별초 항쟁 이전에 우리나라에 분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별초 최후 항쟁기에 진도에서 패배한 삼별초군은 일본의 유구제도(오끼나와)로 옮겨 갔음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해류의 흐름, 오끼나와에서 발견된 고려 계통의 기와, 오끼나와 성곽의 고려시대 축성 기법 등과 비교하여 그 역사적 친연성이 확인되고 있다. ‘울금’ 등 식생활 재료도 전래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인 이곡의 시에서도 ‘울금’이 언급되는데, 이곡은 학자로 유명한 목은 이색의 부친이다. 목은 이색은 조선왕조 개창기에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장흥의 황보성 기문, 광주의 석서정 기문[석서정 기문에 ‘光之州’ 기록이 있다] 등을 남기는데, 이 시기에 전라도 일원에 분포하던 울금이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초기의 사회 인문 지리 상황을 기록한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동복, 광양, 곡성, 임실, 순창, 전주 등 주로 전라도 지역의 토산물로 ‘울금’이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초기 문신으로 나주목 객사(금성관)의 기문을 남긴 서거정은 ‘울금을 읊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는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선비들의 관상용으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서로서 농서이자 가정생활서인 <산림경제>에는 약용으로 중요한 산품임을 기록하고 있는 등 전라도 중심의 토산물인 ‘울금’의 역사성을 알 수 있다.

 

도움받은 자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가정집(稼亭集)>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1480년 간행, 1530년 신증본)

 - <사가시집(四佳詩集)>

 - <산림경제>(山林經濟)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 200904 작성, 2011011 장흥 한방특구 역사적 배경 강의문 게재. 201107 진도문화원보 기고.

 

 이규보(1168~1241) <동국이상사국집> 울금 언급 시(3행)

 

서거정(1420~1488)의 <사가시집> '영울금'

<신증동국여지승람>(권40) 전라도 동복현 토산조 '울금'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 치약(治藥)조 '울금'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