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35 - 홍교에 넘치는 물이 푸른 무늬를 이루고, 해남 남천교 중수기

향토학인 2021. 5. 20. 03:56

인지의 즐거움235

 

홍교에 넘치는 물이 푸른 무늬를 이루고, 해남 남천교 중수기

 

김희태

 

해남읍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2019년 4월에 발견된 「남천교 중수기(南川橋重修記)」비와 「청류정(聽流亭)」 명 표석의 내용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입지와 지명유래, 역사 배경, 규모와 이용, 해남인의 인식 등에 대해서이다.

 

이 비는 1781년(정조 5) 4월에 세운 것으로 남천교를 2가(架)의 홍교로 개건 중수한 기록을 적은 석비이다. 원래는 지금의 해남읍 읍내리와 평동리를 경계로 흐르는 해남천을 가로 지르는 남천교(南川橋) 곁에 있었다.

 

그리고 다리의 형식은 홍교로 구성하여 지명이 ‘홍교’가 되었다. 이 홍교 다리는 일제강점기에 새다리가 들어섰다. 그 시기는 『해남군지』 (1925)의 “사칸 구홍교(四間舊虹橋)”라는 구절로 보아 1925년 이전에 홍교는 바뀐 것 같다. 광복 직후 사진에서는 통행로에서 목조 가구도 보인다. 그래도 땅이름은 남아서 지금도 ‘홍교’, ‘홍교로’ 등의 역사 지명이 해남인의 생활 속에 깃들어 있다.

 

「남천교중수기」 비는 『해남문헌집』(1989)에 군청 곁에 있다고 하는 등 향토자료에 소개된 적이 있으나 근래에는 소재를 알기 어려웠는데 읍성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해남의 역사 현장 자료로서는 귀중한 재발견인 셈이다.

 

해남읍성의 남문 밖에는 지금은 해남천이라 부르는 큰 하천이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동문 앞으로 흘러 남문 앞을 해자(垓字)처럼 휘감고 있다. 이 물길을 건너는 다리가 남천교이다. 해남읍성의 남문은 관인들이나 주민들이 읍내외로 드나드는 주 관문으로서 일종이 정문 같은 구실을 하였다. 해남을 오가는 이는 누구든 남천교를 지나 남문으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문루는 “정원루(靖遠樓)” 또는 “해안루(海晏樓)”라 하였다.

 

남천교는 언제 어떤 형태로 설치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큰물이 넘나들며 훼손이 되곤 하여 설치와 중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1778년(정조 2) 여름에 물이 할퀴고 지난 뒤에 흙과 나무를 써서 만든 흙다리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해마다 손을 보는데 주민들의 고통이 뒤따랐다. 이에 1781년(정조 5)에는 홍교로 개건된다. 해남현감 김서구의 주도에 힘입어 건축할 수 있었고 그 곁에는 정자를 지어 청류정(聽 流亭)이라 했다.

 

1781년 4월의 남천교 중수에 참여한 이들을 보면, 감관(監官) 정석준(鄭碩峻)과 김철주(金喆柱)는 홍교 건립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이다.색(都色) 안종후(安宗垕)는 물자를 동원하는 총괄 책임자이다. 화주승(化主僧)은 공사에 참여한 기술 인력과 시주 등을 총괄하는 직임으로 대흥사 승려 총념(捴念), 총밀(捴密), 봉찰(奉察)이 담당했다.

 

시주질(施主秩)은 24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석수질(石手秩)은 일반 기능인 2명, 승려 2명이다. 전물(典物)은 제반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직역으로 1명이다. 음식 등을 담당하는 공양(供養)은 3인의 승려가 담당했다. 야장(冶匠)과 목정(木丁)은 각 2명씩이다. 그리고 남천교 중수 공사에 참여한 제반 잡역 인부는 승려 장권 등 29인이다. 대흥사를 비롯한 해남 관내의 승려들이 차출되어 동원되었을 것이다.

 

남천교 규모는 “홍교로 2개를 얽었고, 높이는 3장(丈), 너비는 10여 척(尺), 길이는 수십 보(步), 두 개로 새긴 용두(龍頭)에는 풍경을 매달아 아래로 드리웠다.”고 하였다. 현재 단위로 추정해 보면 높이는 3장은 9.09m이다. 너비는 10여 척은 300.3㎝, 길이 수십 보는 최소 18.2m 이상이다.

 

남천교의 개건 사례는 주민을 위한 행정의 표본으로 당시 사회의 귀감이 되어 전해졌던 것 같다. 20여년 뒤 인근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은 김서구 현감과 해남 주민의 남천교 중수 개건 사례를 『목민심서』에 올린다.

 

1781년 남천교를 홍교로 개건한 이후 이곳의 경관은 “홍교유수(虹橋流水)”라 하여 해남 팔경으로 형상화 되어 해남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조선시대 해남현을 들렀던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 1813~1886)은 정원루에 올라 홍교유수(虹橋流水)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문집 『송파유고』에는 “제해안루[해남](題海晏樓[海南)”로 올라 있다. 『해남군지』(1925)에는 누정제영조 정원루 설명 끝에 실려 있다.

 

이희풍이 활동하던 무렵에는 해안루라 했고, 그 해안루가 사진으로 남아 있다. 정원루 즉 해안루 시 두 수 가운데 하나는 홍교에 넘치는 물, 푸른 무늬로 갈라지는 광경을 보고 읊었다. 강의 양쪽 언덕에 늘어선 버들은 그늘을 이루어 한 폭 그림 같다. 이윽고 저물녘인가. 누각 동쪽 난간에 비추는 밝은 달빛. 죽지사에 옥퉁소로 화창을 한다. 그 동쪽에 청류정이 있었다. 어쩌면 두 번째 ”홍교수창록생의(虹橋水漲綠生漪)”의 시는 청류정에서 읊었을 것 같다.

 

홍교에 넘치는 물이 푸른 무늬를 이루고 虹橋水漲綠生漪

양안에 드리운 버들가지가 그늘 그림같구나 楊柳陰陰兩岸乖

누각 동쪽 난간에 비추는 밝은 달빛 아래 畵閣東欄明月下

죽지사(竹枝詞)에 옥소(玉簫)가 화답한다 玉簫和唱竹枝詞

 

일제강점기 들어 홍교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그 길은 해남의 주 교통로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홍교」, 「홍교다리」라는 땅이름은 살아 있다. 남천교 다리 이름은 “홍교”로 부르고 있으며 지번 주소를 대신해 2010년부터 들어선 도로명 지도는 “홍교로”이며, “홍교옛날통닭”, “홍교신발”, “홍교이용원”, “홍교쌀상회”, “홍교종합신발” 등 홍교가 들어간 상호가 즐비하는 등 해남인의 생활 속에서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

 

「남천교중수기」 돌비석은 한 때 소재를 몰랐다가 해남읍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시 드러났다. 「청류정」 표석도 함께 확인되었다. 해남읍성이 원형대로 보존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기는 하지만, 「남천교중수기」 비와 「청류정」 표석은 해남의 역사 문화 이해에 있어 더없이 좋은 사료가 될 것이다.

 

문화유산이나 기록물 등은 내용이나 성격을 규명하는 일과 함께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남천교중수기」비의 경우 원 자리로 옮겨 세우는 것이 역사성과 현장성 전승차원에서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현장은 도시화가 이미 진행되어 버렸고 공간 마련도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현장에는 사진과 함께 설명안내판을 설치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남천교중수기」비는 읍내의 상징적인 공간에 옮겨서 보존했으면 한다. 해남군청 앞의 광장에서 홍교로가 보이는 곳, 또는 해남군청 신청사 내에 마련 예정인 전시관이나 그 가까운 곳이라면 보다 더 많은 해남 주민들은 물론 해남을 찾는 이들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청사 전시관에는 옛 지도 등 자료와 함께 역사성과 그 속에 깃든 “청류유수( 聽流流水)”의 상징성을 설명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 김희태, <해남 ‘남천교 중수기’ 비의 내용과 성격 검토>

*발굴조사 : 해남군 청사 신축사업 읍성 정밀 발굴조사, 해남군∙전남문화재단 문화재연구소

 

남천교 중수기 비 탁본문(사진 전남문화재연구소)

청류정 표석 탁본문(사진 전남문화재연구소)

광복 직후의 “홍교” 사진. 통행로에서는 목조 가구(架構)가 보인다.(정윤섭, 1997, 『해남 문화유산탐구』, 향지사.)

발굴 조사 당시 현지 확인, 2019.04.24
조선시대 지동에 기록된 홍교(1872년 해남현지도, 규장각 소장)
홍교 다리

남천교중수기에 기록이 나오는 조선시대의 두칸 홍교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홍교 땅이름은 남아 있다. 1781년에 홍교로 개건된 이후 “홍교유수(虹橋流水)” 해남 팔경 경관으로 형상화 되어 해남인의 생활속으로 파고든다. 홍교는 없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홍교」, 「홍교다리」라는 땅이름은 살아 있다. 지번 주소를 대신해 들어선 도로명 지도는 “홍교로”이며, “홍교옛날통닭”, “홍교신발”, “홍교이용원”, “홍교쌀상회”, “홍교종합신발” 상호 등 해남주민의 생활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