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196
안중근 의사 배향 국내 최초 유일 사우, 장흥 해동사
김희태
“하얼빈의거 110주년”, 해동사 문화재 지정
안중근 의사(1879~1910)를 배향한 국내 첫 사우인 장흥 해동사(海東祠)가 2019년 12월 26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되었다. 해동사는 원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 만수사(萬壽祠)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동사는 안중근 의사 관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시설물이자 안의사를 단독 배향한 유일한 사우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만수사 경내에 있지만 분리해 새로 지정한 것이다.
안중근의사(1879.9.2~1910.3.26)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통감으로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을 격살한 ‘하얼빈의거“의 주인공이다. 대한 남아의 기개와 민족정신을 전 세계에 떨쳤던 역사인인물이다. 여섯차례의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를 받고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집행으로 순국을 한다.
특히, 사형언도 뒤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논책이다. 미완성이지만 죽음을 앞둔 시기의 저작물로서 현재까지도 중요한 평가를 받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국내 첫 사우 해동사, 1955년 위패 봉안
해동사는 광복 전후부터 건립이 논의되다가 1955년에 장흥 유림과 죽산안씨 문중에서 발의하여 전국 유림과 국민의 동참속에 건립하게 됐다. 유림대표로 의산 안홍천(義山 安洪天, 1895~1994)이 주도를 했다.
이에 앞서 해동사건립기성회(海東祠建立期成會)를 조직하여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기성회장 장흥군수 정재수, 부회장 장흥경찰서장 정주팔, 부회장 장흥교육감 엄을준, 도유사 안형중, 부유사 안종덕 안종삼 안병주, 총무 안형순 안협순, 안종채, 장재 안홍천 안병식 안종명, 감역 안대순 안희영 안홍국, 간사 안봉채 안상순 안종길 등이다. 고문으로 전라남도지사, 육군교육총감,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을 추대하였다.
1955년 10월 27일 안중근의사 위패를 봉안하였다.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다. 당일 봉안식은 장흥대교를 지나는 시가 행진을 먼저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딸 안현생은 영정을 모시고 조카 안춘생은 위패를 모시고 참례하였다. 이때의 사진이 전하여 역사성을 반증한다.
봉안례는 기성회장인 장흥군수의 축사에 이어 추념사는 문교부장관, 전라남도지사, 육군교육총감, 전남도의회의장 등이 하였다. 문교부는 고등교육국장이 참석하였다. 이어 상향 제향을 유림 주관으로 한다. 당시 대통령이 “해동명월(海東明月)”의 친필 액호(額號)를 내렸다.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향교와 유도회 또는 성씨별 문중 답통(答通)으로 추인을 받았다.
한칸 건물로 건립, 세칸 팔작집 중건
처음 지은 해동사는 사방 두칸 팔각도리 사모지붕집이다. 두칸이지만 앞면과 옆면 한쪽은 퇴칸이어서 신실은 사방 한칸의 규모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상부에 겹지붕을 두고 있으며 최상단에는 철제 장식물이 설치되어 있다. 단촐하지만 위엄이 있다. 1996~2000년 사이 만수사 중수와 함께 해동사도 중건하였다. 해동사는 앞면 3칸이고 옆면 1칸으로 툇간을 두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겹처마이다.
사우에는 당시 대통령 글씨로 알려진 "해동명월(海東明月)"이 전해 온다. 안에는 안의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안의사의 친필 글씨 3점의 영인본이 액자로 걸려 있다. “孤莫孤於自恃”는 명심보감에 나오는 글이고 오언시는 이백의 시인데 호방한 기상이 나타난다.
“孤莫孤於自恃[스스로 잘난체 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
“五老峯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내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
“極樂/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
만수사는 고려시대의 유학자 회헌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1946년에 시작하여 1951년까지 지은 사우이다. 회헌을 주벽으로 안원형, 안면, 안정생, 주세붕(1495~1554), 안중묵(1556~1607)을 배향하였다. 신실(만수사), 내삼문(경모문), 강당(여경재), 외삼문, 관리사가 있다. 해동사의 처음 신실은 만수사 곁에, 중건 신실은 입구에 따로 삼문을 두어 배치하였다.
안의사 순국 110주년, 해동사 방문의 해
1955년에 세운 장흥 해동사와 함께 1961년에 광주에 세운 안중근의사 숭모비도 기억되어야 한다. 광주 안의사숭모비는 국내 최초 기념비이다. 장흥과 호남의 유림, 나아가 전국민의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된다.
안홍천은 안중근의사숭모비를 세우는데도 주도를 하였다. 장흥 해동사 건립을 계기로 안의사에 대한 추숭활동이 연결된 것이다. 정규종(1879~1972)이 지은 <안의사 숭모비 창립사실기>에 “안홍천 어른이 호남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을미년(1955)에 장흥에 사우를 건립하고 올해(1961) 비를 세워 전국에서 제일 먼저 광주가 안의사의 대의 숭모를 창도(安翁洪天與湖南多士 崇慕安義士大義 乙未建祠長興 今年竪碑光州爲全邦之先唱)”하였음을 적고 있다.
안의사숭모비는 심산 김창숙(1879~1962)이 비문을 지었다. 끝에 “時義士成仁後五十一年朞辛丑三月二十六日”이라하여 비문 지은 날이 순국일자임을 적고 있다. 앞면 전서는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썼고 뒷면 비문 글씨는 청송인 심한구가 썼다. 이 비는 광주공원에 세웠다가 중외공원으로 이전했는데 1995년께 동상을 세우면서 비몸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하얼빈의거 11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나주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10월 25일 중외공원 동상 곁에 재건립하였다. 장흥 해동사의 문화재 지정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높여 주었다.
장흥 해동사는 역사 교육과 독립운동 체험 등 문화교육공간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전라남도에서는 <남도 안중근 로드를 가다>를 간행했다. 장흥군에서는 2020년 1월 1일 “안중근의사 순국 110주년 정남진 장흥 해동사 방문의 해” 선포식을 안중근의사 동상이 있는 정남진 장흥 전망대 에서 가졌다.
하얼빈역 천둥소리에 민족이 되살아 났네
해동사 건립에 따른 위패 봉안식에서 올려진 봉안문과 상향 축문에는 안중근의사의 기개와 하얼빈의거의 의의, 후인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만수사지(萬壽祠誌)>(1973)에 실려 있다. 봉안문(엄찬영 국역)을 옮긴다.
삼가 생각건대 공명정대하신 恭惟明公
불세출의 호걸 의사 間世傑士
절대 위인으로 絶代偉人
게다가 충효를 겸하셨는데 矧又忠孝
누가 이와 겨루랴. 有誰等倫
때에 뜻을 행하고 因時行志
일을 도모함에 변화에 응대하였네. 作事應變
오직 마음을 한결 같이하여 惟心惟一
공명정대하고 빛나네. 正大光顯
씩씩하고 굳세어 仡仡桓桓
홀몸으로 대한을 부지하셨네. 隻身扶韓
계책은 장모에 나오고 計出于張
의리는 문모와 같네. 義同乎文
하얼빈 역 천둥소리에 哈濱一雷
온 나라 놀랐네. 萬國震驚
저 큰 도둑을 미워하여 疾彼大賊
호랑이를 찔러 죽이고 고래를 베었네. 磔虎斷鯨
국혼이 다시 돌아오고 國魂復返
우리 민족이 되살아났네. 甦我民族
하늘에 붉은 해 天中赤日
해동에 밝은 달. 海東明月
호남의 양지쪽 만수 湖陽萬壽
회헌을 모신 이곳 사우 寔晦軒祠
그 곁에 사당을 세우고 于以建廟
영령을 여기 편히 모셨네. 英靈妥斯
위로는 어진 조상 있고 上有賢祖
의로운 후손 옆에 있네. 義孫在傍
이에 좋은 날을 만나 玆値吉辰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式薦馨香
*호남학산책-문화재창6 -2020.01.04. 토/한국학호남진흥원[https://www.hiks.or.kr]
안중근 의사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장흥대교를 지나는 행렬(1955.10.27)
- 영정 : 큰 딸 안현생, 위패 : 조카 안춘생(사진제공 : 안종복)
안중근의사 위패 봉안식 기념촬영(1955.10.27.)
처음 건립한 해동사(1955)
* 이 건축물을 지은 대목장이 안두만(安斗萬, 1919~1990)님이라는 전언을 최근 들을 수 있었다. 저 글을 올렸을 때(2020년 1월) 고향 친구[안오순님, 장흥중 동기, 장동면 만년 출신]가 자기 아버님도 성함이 나온다고 연락을 한 바 있었다. 간사를 맡으신 안종길님이 친구의 선고장이셨다. 시간이 한참 흘러 최근(2024.03.19)에 친구들을 만나 고향이야기, 해동사 이야기를 하다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1955년 처음 지은 사당의 대목장이 친구의 숙부님이라는 제보이다.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전언을 통해서라도 들을 수 있었으니 귀한 정보인 셈이다. 더 찾아 나서야 겠다.
해동사 신실
해동사 제향(2018.04.27)
해동사 제향(2018.04.27) - “義氣衝天驚世界” - 그 “義氣”는 이어질 것이다.
장흥 해동사 참배(2020.01.01)를 마친 뒤 -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정종순 장흥군수, 안순덕님(안홍천선생 따님)(사진 장흥군 제공)
안의사 숭모비 창립사실기(정규종[1879~1972], <송남유집>)
- 광주공원에 세워진 안중근의사숭모비의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안의사의 대의(大義)를 기려 호남유림과 거국적 성원으로 장흥 해동사를 건립한 뒤 광주에 안의사 숭모비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비문 본문 3~4행)
*역해
안의사 숭모비 창립 사실기[안중근][광주공원]
安義士崇慕碑創立事實記[安重根][光州公園]
옛날 선조(宣祖) 임진(壬辰 1592)년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앞장서 창의를 솔선하고 의기를 떨쳐 순절하시니 충성을 본받고 의리를 숭상하는 풍습이 세상에서 더욱 깊어져 서중학교(西中學校) 학생 독립운동에 이르러 만세(萬世)의 본보기가 되어 성대해졌다. 이에 세상에서 ‘호남은 충의의 창고’라고 칭찬하는 말은 진실로 속일 수 없다.
在昔穆陵壬辰, 霽峰高先生. 首先倡義殉節, 而效忠尙義之風, 與世益深, 至西中學生, 獨立運動, 蔚爲萬世矜式. 世所謂‘湖南忠義之府庫’者, 儘不可誣也.
안홍천(安洪天, 1895~1994) 어른이 호남의 인재들과 함께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대의를 숭모하여 지난 을미(乙未, 1955)년 장흥(長興)에 사우(祠宇 해동사(海東祠))를 건립하였다. 올해 광주에 기적비를 세우려고 하는데, 온 나라가 먼저 일어나니 어떻게 그렇게 하는 까닭이 없겠는가? 이 때문에 그 비를 세우려는 일의 실상을 찾아 구하고, 사우를 건립한 이후에 다시 비를 세우고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추모하는 정성과 기풍을 세우려는 뜻을 남기려고 하였다. 이윽고 기성회를 창설하고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공사가 바로 완수되었다.
安翁洪天, 與湖南多士, 崇慕安義士大義, 乙未建祠長興. 今年竪碑光州, 爲全邦之先倡, 豈無所以然哉? 以是而求其竪碑事實, 則建祠後, 更爲立碑記蹟, 以寓追慕之誠兼樹風聲之意. 創設期成會, 營始三載, 功乃告竣.
우뚝 서서 꿋꿋하니, 보는 사람들에게 절로 충의의 마음을 성대히 일어나게 하였다. 이를 쇠퇴한 시대에 미치어 생각하고 생각하니, 단지 긴 밤에 하나의 촛불만 되고 어떻게 세상의 교화가 거듭 빛나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일은 오로지 남성(南省)의 인재들의 협찬에 있고, 인재들의 협찬은 유사(有司) 여러분이 힘을 다한 데에 있었다. 유사의 힘은 박정규(朴禎圭)와 안홍천 두 어른의 피나는 정성에 있었다. 두 어른의 정성은 제봉 선생의 정령(精靈 혼백)이 실로 그들에게 세도(世道)를 장려케 하였을 것이다.
穹然特立, 使觀者, 忠義之心, 油然自生焉. 及此衰季, 商商, 非只爲長夜一燭也, 豈亦世敎重熙之消息歟? 是役也, 專在於南省多士之協贊, 而多士之贊, 在於有司諸氏之盡力也. 有司之力, 在於朴禎圭·安洪天, 兩翁之血誠也. 兩翁之誠, 霽峰先生精靈, 實使之而獎勵世道者也.
최일근(崔日近) 군 역시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니 공경할 따름이다. 다시 유사의 아름다운 이름을 비석에 새겨서 불후의 꾀를 도모하려고 박정규와 안홍천 두 어른이 내게 일의 실상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처럼 비위나 맞추고 재주가 적은 사람이 외람되게 어찌 감히 천성이 감동한 바를 기록할 수 있으며 게다가 어찌 감히 이를 위하지 않겠습니까?
崔君日近, 亦盡誠力可欽也已. 更銘有司芳名, 以圖不朽, 朴·安兩翁, 俾余記實. 如余諛寡, 猥何敢爲彛性所感, 又何敢不爲?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한마디로 힘쓸 것을 권하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의 인사(人士)가 안중근 의사의 절조를 공부하고 안중근 의사의 행실을 권장하기를 소원하였다.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격려하니, 추운 나라에 따뜻한 봄이 돌아오고 큰 나라에서 태평한 운수를 맞아 거의 날을 유지하여 기다릴 만하였다. 어찌 각각 힘쓰지 않겠는가? 안중근 의사의 확실한 자취는 시초 비문에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다시 군데기를 붙이지 않았다
竊惟一言奉勗者, 惟願我邦人士, 課義士之節, 責義士之行, 自勉自勵, 則回陽春於寒國; 迎泰運於丕邦, 庶可持日, 以待之矣. 盍各勉旃? 義士實蹟, 載在元碑, 玆不復贅焉..(국역 엄찬영 김희태)
광주 중외공원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와 동상(2020.01.02)
안의숭모비문. 1961년 3월 26일, 순국 51주기 되는 날 심산 김창숙이 글을 지었다. 비문 글씨는 심한구가 썼다. 앞면 대자 전서는 소전 손재형의 글씨. 이 숭모비는 원래 광주공원에 세워졌는데 1987년 중외공원으로 옮겼다. 1995년께 동상을 세우면서 비석을 내리고 좌대는 그대로 썼다. 비석은 행방이 묘연하다가 "하얼빈의거 110주년"인 2019년 나주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10월 24일 동상 곁에 재건립하였다.
전라남도 간행 <남도 안중근 로드를 가다>(2019.12) 표지[집필·사진 - 노성태 이건상 신봉수 김덕일]
-장흥, 보성, 나주, 함평, 장성, 광주와 연해주 안의사 관련 문화유산과 연고를 정리하였다.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학산책 문화재窓6(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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