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95 - 1568년 봄날, 부용정 시회에서 만난 광주 선비들

향토학인 2020. 1. 2. 02:51

인지의 즐거움195


1568년 봄날, 부용정 시회에서 만난 광주 선비들

-역사문화자원을 되살려 서사(敍事)로 풀어가자-

 

김희태

 

어느 봄날. 옻돌마을의 부용정에 모인 선비들.

중년의 한 사내가 읍을 하면서 깍듯하게 예를 차린다. 관복을 차려 입은 그 어른, 결기있는 한마디.

 

“큰 일 치르느라 애썼네. 어버이 여윈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잘 추스리시게. 이젠 예전의 응어리는 풀렸을 터이고 큰 일을 도모하게나.”

 

“아. 고맙습니다. 선고장 일이야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전 가르침대로 심기일전 하겠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다시 읍을 한다. 그 옆 젊은이 또한 예를 갖춘다. 다소 주저하면서 그 어른과 중년 선비를 번갈아 보면서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부용정의 내력은 어찌되는가요. 관찰사공이 정자를 지어 강학과 교류를 하면서 향약을 실시하여 향풍을 진작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새겨 보고 싶습니다.”

 

“알았네. 나도 기록으로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네. 그런데 관찰사공이 세상을 뜬지도 벌써 150년이 흘렀으니 갈수록 알기 어려울 거여. 문과에서 이름을 떨친 이순과 젊은 학사가 함께 정리하게나.”

 

아쉬움 겸 당부 겸 말을 하다가 부용정 저 멀리 이제 막 푸른 잎이 돋아나고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이윽고 하나씩 풀어 나간다. 부용정은 원래 김문발 선생이 건립했다는 것부터 시작이다. 김문발은 1418년에 세상을 떠나지 그 이전 시기, 벼슬살이로 보아 1411~1417년 사이로일 것으로 보고 있다.

 

시회를 열다 -송천 양응정, 제봉 고경명, 명암 김형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1568년 2월 17일 양력으로 3월 중순 봄날 부용정을 찾은 선비들. 나이든 선비는 쉰 살 노년기에 접어든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 중종 14~선조 14). 당시 광주 목사이다. 중년의 선비는 서른여섯의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 중종 28~선조 25), 이순(而順)은 고경명의 자(字)이다. 젊은 학사는 고경명의 문인 명암 김형(鳴巖 金迥). 1543년생이니 스물여섯 살 나이. 이밖에도 옻돌마을 일원의 광산김씨 집안사람들과 근동의 선비들이 함께 자리 했다. 전라도 광주목 칠석면 하칠석리 옻돌마을.

 

양응정은 목사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었지만, 광주 근동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문인학자. 고경명 등이 제자로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앞에서 “큰 일을 치르느라 애썼다”고 한 것은 고경명의 부친 고맹영이 예순 네 살로 세상을 떠난 뒤 3년상을 그해 1월에 마쳤던 것. “응어리”란 1563년(명종 18)의 일을 언급한 것. 1563년 8월 12일 홍문과 교리로 승급되었다가 가을에는 전적으로 좌천되고 울산군수로 나가도록 했는데, 당로자에게 꺼림을 받게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 와서 독서와 산수에 낙을 붙이고 있었던 것.

 

젊은 학사 명암 김형도 문장에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광주목지(光州牧誌)』(규10800) 고적조에 “열 길 되는 바위를 보고 시를 읊으니 바위가 궁궁하고 울어 궁암 또는 명암이라 했다”고 한다.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하겠다.

 

부용정에 걸려 있는 시판 가운데 송천 양응정, 태헌 고경명, 명암 김형의 시 끝에는 무진년 봄(戊辰春)이라는 간지가 표기되어 있다. 이 연기를 양응정과 고명명의 재세기간과 맞춰보니 1568년(선조 1)이다. 이 해에 마침 고경명은 부친 삼년상을 마쳤고, 봄이라 했으니 어쩌면 이월 중정(中丁)에 시회(詩會)를 했을 법하다. 광주목사 양응정은 시찰 겸 참관을 했을 터이고. 그해 이월 중정은 음력 2월 17일. 양력으로 치자면 3월 중순이다. 향약의 시행이나 원사 제향도 이월 중정과 팔월 중정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중정일로 맞춰 서사(敍事)로 풀어 본 것이다. 말하자면 스토리텔링이다.

 

이윽고 이들은 담소를 하면서 시를 짓는다. 먼저 양응정이 한 수를 읊는다.

 

이른 아침 비 실실이 내리더니         朝來雨意欲絲絲

석양 무렵 맑아 푸른 못 씻겨주었네. 向晚晴光綠池

하늘이 준 기회 아름다운 모임에      佳會豈非天所借

사군의 나들이 행색 절로 느리네.     使君行色自應遲

 

부용정의 현판에는 부용정운(芙蓉亭韻)이라 새겼다. 양응정의 문집인 송천유집(松川遺集)에는 제칠석모정(題漆石茅亭)이라 하였다. 칠석 모정이라 한 것을 보면 지금 보는 목조와가와는 다르게 당시는 모정이었을 것 같다. 정자 이름도 표기되지 않았다. 제목 옆에 세주로 “정자는 광주에 있는데 선생은 이때 광주목사가 되었다(亭在光州 先生時爲牧使)”라 하여 양응정이 광주목사 때 방문하여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정무를 미룰 수 없어 느지막이 나서 읊조리다

 

아침나절 하모정 동헌에서 정무를 볼 때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봄철의 비는 풍년이 올 징조라 했던가. 부용정에서 만나기로 나들이 약속은 했지만 일은 미룰 수 없지. 몇 가지 처결을 하고 지시를 한다. 이윽고 신시. 길을 나선다. 광리문을 지나 서남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금당산을 바라보고 향등을 지나 옻돌마을에 다다른다. 아끼던 제자 이순도 보이고 그 옆의 젊은이는 총기가 넘친다.

 

관청의 장부 실처럼 어지럽게 밀려오고  官裏文書掣亂絲

봄철의 순찰 습가지에 우연히 이르렀네. 行春偶到習家池

진탕 취하여 멈춘 것은 아니라              非關泥醉停騶御

버들을 묻고 꽃을 찾아 짐짓 더디었지.   問柳尋花故作遲

 

고경명의 차운이다. 광주목사로서 정무를 보면서 처리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얽히고 설켜 있는데 이월 중정일 잊지 않고 나들이 하셔서 이처럼 흥겨운 자리가 되었다는 것. 그 고마움을 애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술 한 잔 하면서 머무르려 한 것은 아니고 오는 길에 꽃향기를 즐기다가 더디었을 뿐이라 하였다. 

  

이어 명암 김형도 한 수를 읊는다. 가르쳐 준 선생님과 그 선생님의 은사. 어려운 자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 없으니 시를 한수 올린다. 하여 복보(伏步)라 제하여 삼가함을 나타내고 있다.


시선을 못내 그리다가 이미 머리 세고 苦憶詩仙髮已絲

함지의 부질없는 여운에 빠졌네.        空留遺響軼咸池

지방관에 오른 뒤로 소식 없더니        雙鳧去後無消息

단구의 밝은 해를 더디다고 하는가.    何處丹邱白日遲

 

양응정을 시선으로 추앙한 듯싶다. 자기가 배운 태헌[고경명]을 가르쳤으니 얼마나 영광일 것인가. 뵙고 싶고 배우고자 하여 언젠가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지 기다리다가 머리가 희어질 정도. 그 큰 문향을 듣기만하고도 즐거웠는데 오늘에야 뵐 수 있다니. 지방관에 나서신 뒤로는 더 없이 소식을 듣기 어렵더니 칠석 모정에서 스승 고경명을 모시고 뵈올 수 있다 하니 더디 오신들 어쩌랴.

 

부용정 현판의 몇글자로 풀어 본 451년전의 이야기

 

이상에서 광주 칠석동 부용정에 있는 시문 현판을 풀어서 서사(敍事)로 엮어 보았다. 이 동네는 고싸움놀이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 마을 복판에 있는 부용정은 우리나라에서 향약 시행을 처음 한 곳으로 기록에 나온다. 조선초기 향약 보급운동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100여년 전에 향촌 자치의 규약을 만들어 실행했다니 광주 선현들의 공동체 정신의 역사성을 입증해 준다.


이같은 역사성을 지닌 부용정 현장을 가서 보면 현판이 보인다. 일필휘지로 행서와 초서를 써 놓은지라 눈만 껌벅일 뿐이다. 해설문을 가까이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누군가 설명을 해주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그 목적에 딱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뜻을 담아서 쓴 글이 앞에서 본 것이다. 광주문화재단에서 간행하는 누정총서9(심미안) 『부용정·양과동정』의 부용정 앞 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현판에 새겨진 내용을 검토하면서 송천 양응정, 태헌 고경명, 명암 김형 세분의 시문 현판 끝에 있는 “무진춘(戊辰春)” 간지를 세분의 활동기간에 맞춰서 그 시기를 전후한 사회 사정과 시대 상황, 향촌 활동, 지명 들을 풀어가면서 엮어 본 것이다. 하여 1568년 부용정에서 열린 시회로 짐작하여 형상화 해 본 것이다. “송천-태헌-명암”과 “무진춘”. 몇 글자 안되지만 세밀하게 보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451년 전 “칠석 모정-부용정”의 현장 이야기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광주라는 역사문화도시, 호남의 명도(名都). 그 역사문화자원을 되살려 서사(敍事)로 풀어나가는 일, 어디이던, 무엇이던, 누구이던 가능하다. 함께 힘과 지혜를 모으자.


* <제석문화>1(구 금당문화), 광주광역시남구문화원, 2019.12, 7~11쪽


 


송천 양응정(1519∼1581)의 부용정 시판(戊辰春, 1568년 봄)(사진 인춘교)

  이 시판의 끝부분 연기 "戊辰春" 세글자 역사문화자원을 실마리로 하여 1568년 봄날 부용정 시회(詩會)에서 만난 광주 선비들을 서사(敍事)로 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