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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통신 - 담양 몽한각 소장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 회수, 2019.05.29.

향토학인 2019. 6. 5. 22:25

문화재통신


담양 몽한각 소장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 회수, 2019.05.29.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2008년 9월 전남 담양 몽한각 내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경기도 양평의 야산 비닐하우스에 장기간 은닉된 상태였다. 이에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이 첩보를 입수, 11년 만에 회수한 것이다.

 

문화재 사범들은 공소시효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유통하려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이번 문화재 사범들의 경우 취득 경위에 대해서 사망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수법을 사용하여 수사에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 담양 몽한각(潭陽 夢漢閣)은 1803년(순조 3년)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 재임 1802.5.10~1806.12)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재임 1803.03~18097.02) 등이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5대 후손인 이서(李緖, 1482∼?)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재실(齋室)로서 1974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담양 대덕면 매산리에 있다.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1827년 경 양녕대군 후손들에 의해 중각(重刻)되어 전라도 담양의 몽한각(夢漢閣)에서 보존되었던 것이다.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의 편액 대자(大字)인 ‘숭례문(崇禮門)’을 판각한 현존하는 유일의 목판본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 전(傳) 양녕대군 친필〈‘숭례문(崇禮門)’> 목판


  숭례문 편액의 대자(大字)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1394~1462)의 친필로 알려져 왔지만, 작자를 밝히는 낙관이 현판에 없기 때문에 현재는 다수설로 거론되고 있다.


숭례문 현판의 복원을 위한 고증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에서 숭례문 현판의 탁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 1814~1881)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복원을 위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이승보의 문집인『석산유고(石山遺稿)』의 내용이 뒷받침 하고 있으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도 이승보가 숭례문 현판의 개색건으로 판을 직접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덕사 소장 탁본과 이승보의 연관성은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존 최고의 자료로 추정되는 이탁본의 제작 시기는 이승보의 영건도감 제조재직 시기 이유원이 편찬한 『임하필기』가 1871년 집필되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1865년~1870년 무렵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종 연간 (1863~1907)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현판을 쓴 인물을 양녕대군이라고 밝혀 놓았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리 태조 5년(1396)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1422)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문을 숭례문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我 太祖五年 石築 平壤伯 趙浚監役 世宗四年改修 周一萬四千九百三十五步 周尺量爲八萬九千六百十尺 高四十尺二寸 立文八 正南曰 崇禮 重檐 讓寧大君書額 俗稱南大門)( <동국여지비고> 卷1 城郭[京城], 규장각소장 奎 가람古 915.1-D717-v.1-2)


 * 몽한각에 소장 되었던 양녕대군 필 후적벽부 초서 목판도 함께 회수되었다. 

 * 문화재청 보도자료( 안전기준과, 2019.05.29)


압수수색한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원 소장처 : 담양 몽한각)


<동국여지비고>권1 성곽[경성}조(규장각 소장, 1~4행이 한양도성과 숭례문 내용, 4행 아래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서액(書額)"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목판과 탁본, 숭례문 실제 현판의 사진. 2008년 화재 뒤 숭례문을 복구할 때 사용된 건 가운데의 탁본이다. 이번에 찾아낸 건 해당 탁본과 똑같이 제작해 보관하던 목판 2점이다. (중알일보, 2019.05.19)


양녕대군이 쓴 '후적벽부' 목판 마지막엔 '숭례문 목판과 함께 지덕사에 보관중인 후적벽부를 중각하여 몽한각에 보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붉은 네모로 표시된 부분은 '숭례문' '새기다' 지덕사' '몽한각' 단어들. (중알일보, 2019.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