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414 - 장흥 청원계(長興 淸源契),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사회사전』-사회조직편- 표제어 수록

향토학인 2026. 2. 1. 23:28

인지의 즐거움414

 
장흥 청원계(長興 淸源契),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사회사전』-사회조직편- 표제어 수록

 

김희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제8주제로 펴낸 『한국민속사회사전』-사회조직편-의 표제어로 ‘장흥 청원계’ 선정되어 집필을 의뢰받고 참여하였다. 2025년 12월 25일 발간 2책(①② 합 719쪽). 비매품.
 
『한국민속사회사전』-사회조직편-의 표제어는 공동체의 생활공간, 조직 형태, 구성원, 제도, 활동, 자료, 공동자원 등으로 범주를 나누어 선정했는데 모두 401항목이다. 국립민속박물관/학술·정보/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웹사이트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장흥도호부 남면, 지금의 장흥 용산면 단위로 이루어진 향약 조직으로 보통 ‘남면 면약(南面面約)’이라 하는데, 청원계(淸源契)라는 이름으로 고유명사화되었다. “청원(淸源)이라고 면안을 삼은 것은 그 뜻이 깊다. 그 면안은 겉이요, 청원은 속이다. 그 근원을 맑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내 마음을 밝혀야 한다.”라고 한데서 비롯된다. 1942년 면안 서문에 처음 나온다. 이후 1970년대에는 문서의 명칭에도 남면청원계(南面淸源契)라 표기된다. 이 ‘청원계’ 명칭이 표제어가 된 것이다.
 
이번 정리를 하면서 한가지 더 살펴볼게 있었다. 청원계의 시행 공간인 ‘남면’의 남상면과 남하면의 분면 시기이다. 조선후기에 마을이 커지면서 분면되는 경우가 많다. 남면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분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796년~1798년 장흥부에서 작성한 문서에서 남상면, 남하면 편제가 기록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18세기말로서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100여년 앞서 남상면, 남하면이 나오고 있다.
 
이 자료는 『장흥부소재 화성부둔답 양안(長興府所在華城府屯畓量案)』이라는 문서로 7건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96년에서 1798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화성부(華城府)에서 각지의 토지를 사들여[매득] 화성부에 부속시킨 둔토(屯土)의 토지대장이다. 부내면, 부서면, 안상면, 안하면, 남상면, 남하면 등 면별로 자호(字號)에 이어 각 필지마다 지번, 양전(量田) 방향, 토지등급, 지형, 지목, 장광척(長廣尺), 결부수(結負數)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사표(四標)와 마지기수[斗落數], 배미수[夜味數]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본 주인, 즉 화성부에 이 전답들을 팔았던[방매] 본주(本主)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문서의 끝에 장흥도호부사의 수결이 있어 장흥도호부에서 발급한 문서임을 알 수 있고, 이 시기에 남상면 남하면의 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장흥도호부사는 홍용건(洪龍健, 1796.01~1798.06 재임)이었다.
 
『한국민속사회사전』-사회조직편-에 수록된 전문을 소개한다. (사료부분만 [ ]에 추가함.)
 
장흥 청원계(長興 淸源契),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의 용산면에서 조선 후기 이후 시행된 남면 향약계.
 
【내용】
장흥 청원계(長興 淸源契)는 조선 후기에 전라도 장흥도호부 남면 일원에서 시행된 면단위 향약계로 남면면약(南面面約), 남면방약(南面坊約) 또는 남면 향약계(南面鄕約契)라 한다.
 
남면은 지금의 장흥군 용산면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장흥도호부 남면은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운영되기도 하다가 1932년에 다시 남면으로 합해졌고 1940년에 용산면으로 개칭됐다. 남면면약 또는 남면방약은 행정지명과 운영권역을 기준으로 한 명칭이다.
 
청원계는 주민이나 구성원 사이에서 써온 명칭이다. ‘청원(淸源)’의 의미는 1942년 『 남면면안(南面面案) 』 의 백형일(白亨一)이 지은 서문에 처음 나온다.
 
“청원이라고 면안을 삼은 것은 그 뜻이 깊다. 그 면안은 겉이요, 청원은 속이다. 그 근원을 맑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내 마음을 밝혀야 한다. 효우를 돈독히 하고 충신을 위주로 하면 사물을 응접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 마땅함을 얻지 않음이 없으리니, 이것이 청원의 실상이다.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것인가 [淸源爲案, 其義深矣 其案外也, 淸源內也. 欲淸其源, 必自先淸吾心. 敦孝友, 主忠信, 以至應事接 物, 無不得其當矣, 此淸源之實也. 盍相勉旃?”]”라고 한 내용이다.
 
‘청원계(淸源契)’ 용어는 무술년(1958) 회문(回文)에서 “오는 9월 그믐날은 우리 청원계의 원래 정해진 강신일이니 [來九月晦日, 惟我淸源契元定講信日,]”라 한데서 처음 보인다. 이후 『 계원출석부 』 (1972∼1996)나 『 효열표창안 』 (1978)은 표제에 ‘남면청원계(南面淸源契)’라 표기하고 있다.
 
장흥 남면에서는 1707년(숙종 33)에 향약계가 시행된 문서가 있다. 그 뒤 향약은 흉년이 들어 일시적으로 폐하기도 했다.
 
1734년(영조 10)에 장흥 선비 위세봉(위세옥)이 방약 시행의 필요성을 상소하고, 1733년 8월부터 1735년 9월까지 장흥 수령으로 재임한 유주기(兪冑基, 1689∼1760)가 관주도의 향약을 시행하게 되어 각 면에서 면약이 시행된다.
 
장흥부에서 12개조의 원칙인 관하십이조(官下十二條)를 작성하여 내리고, 각 면에서는 사정에 따라 조항을 설정하여 면보십이조(面補十五條)를 마련하여 면약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시행된 남면 면약은 1734년 관하십이조, 면보입이조 등 약조, 참여 명단인 면약안, 임원 명단인 수행안, 그리고 보민계 자료 등이 잘 남아 있다.
 
남면 면약 자료는 필사본으로 성책문서 형태이다. 남면 면약 자료는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707년(숙종 33)의 서문과 13개 약조, 1707∼1727년의 좌목 등이 있는 문서로 표제는 『 완의(完議) 』 이다. 13개 조문은 상하질서, 요역균등, 면임 등에 관한 규제와 선임, 임원선정과 운영, 추수기 곡식 절도방지에 관한 내용이다. 좌목은 공사원 2인, 별유사 9인이다.
 
둘째는, 1734년 관주도 향약 시행 이후 면약의 서문, 참여자 좌목, 약조, 발문 등이다. 『 남면방약안 』 (1734년)은 이희증(李希曾, 1690∼1735)의 서문, 상하안 좌목, 관하십이조, 면보십오조, 조경범(曺景範)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상안좌목은 어산(語山) 등 15개리 163명의 명안을 성명, 자, 생년순으로 기록했다. 하안좌목은 어산 등 23개리 330명으로 성명만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 남면방약안 』 (1763) 『 남면방약안 』 (1783) 『 남면면안 』 (1796) 『 남면면안 』 (1818) 『 남면방약안 』 (1183) 『 남면면안 』 (1861)이 있다.
 
셋째는, 면약의 임원을 적은 기록인 수행안이다. 『 집강수행안(執綱隨行案) 』 (1761)은 1831년까지 도유사, 공사원, 유사, 직월 등의 직임과 명단을 1∼4년 단위로 53회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 면약수행안 』 (1788)은 변진정(邊鎭鼎, 1724∼1796)과 백시환(白時煥)의 서문, 어동(語東) 등 34개리의 「각리 본조 수합기(各里 本租 收合記)」, 약조 11개조, 면중 추약, 1788∼1796년 사이 도유사, 공사원, 전곡유사 등 명단이다.
 
넷째는, 보민계 자료이다. 『 장흥부 남면 보민계 절목(長興府南面補民契節目) 』 (1831)은 절목, 각면 호총 분배전 수효 급 별유사 질(各面戶摠分排錢數爻及別有司秩)」, 약조 6개조가 있다. 그리고 『 남면 보민계 추절목 』 1845) 『 남면보계절목 』 1846)이 있다. 『 장흥부 각인등 징전출급 각면 구폐절목(長興府各人等徵錢出給各面捄弊節目) 』 1847)은 이향(吏鄕) 등의 민폐를 바로잡아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며 어사 수결과 마패인이 있다. 절목에 이어 16면의 호수와 분배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특징 및 의의】
장흥 청원계는 조선 후기에 관주도로 시행된 면 단위 향약으로 근현대기에 이르러서도 시행된 자료가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에서 근현대기에 이르는 향촌사회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자료】
「조선후기 호남 鄕村面約에 대하여-장흥지방을 중심으로-」(김희태, 조선대석사논문, 1994)
『장흥 향약 모음』(장흥문화원, 1994)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전남 장흥군 용산면 면약 및 마을 자료」(『수집사료해제집 1』, 국사편찬위원회, 2006)
『칠리안속 상금마을』(국립민속박물관, 2011)
「조선후기 장흥부 남면 면약의 시행배경과 내용」(김희태, 『지방사와 지방문화』10-2, 역사문화학회, 2007)
『장흥향약1』-남면 면약-(한국학호남진흥원, 2024)
「장흥 남면 면약의 특징」(권수용, 『장흥향약1』, 한국학호남진흥원, 2024)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김기홍 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자료 탑재, 2012)
 
【필자】 김희태(金熹台)

장흥 청원계(남면면약) 자료(한국학호남진흥원)

남면방약안(1734년) 표지

남면방약안(1734년) 서문(이희증)
남면방약안(1734년) – 상안(上案)에는 어산(語山) 52명, 송치(松峙) 7명, 관촌(鸛村) 등 15마을 163명, 하안에는 어산(語山) 15명, 풍치(風峙) 13명, 운주동(雲柱洞) 31명 등 22마을 330명이 올라 있다. 참여마을은 27마을이며 참여인은 모두 493명이다.

 

청원계 서궤(2004.04.25.)
『 장흥 향약 모음 』-향토자료총서 제2집-(장흥문화원, 1994) - 청원계(남면 면약), 용계향약, 부산향약, 고상향약 등 9개지역 향약자료를 조목 위주로 국역을 하고 발췌하여 영인을 하였다. 앞에 <향약의 시행과 장흥향약의 성격 해제> (김희태)글이 있다.
『 한국민속사회사전 』-사회조직편-(국립민속박물관, 2025) - 공동체의 생활공간, 조직 형태, 구성원, 제도, 활동, 자료, 공동자원 등 401항목의 표제어가 올라 있다.)
장흥 청원계(『 한국민속사회사전 』-사회조직편-)
『장흥향약1』-남면면약 - 표지(한국학호남진흥원, 2024) - 장흥 청원계(남면 면약) 문서는 김희태의 석사논문(조선대, 1994)에서 처음 소개된 뒤, 『장흥 향약 모음』(장흥문화원, 1994), 「장흥군 용산면 면약 및 마을 자료 사료수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칠리안속 상금마을』(국립민속박물관, 2011),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김기홍 외, 20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탑재) 등에서 해설과 영인, 부분 국역이 이루어졌다.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호남한국학 향약자료집을 발간하고 있는데 2024년에 『장흥 향약1』-남면 면약-으로 해제, 탈초 원문, 국역문, 원본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장흥부소재 화성부둔답 양안(長興府所在華城府屯畓量案)』 첫면(1797년, 규장각 奎18668)

『장흥부소재 화성부둔답 양안』(1797년) 남상면 조

『장흥부소재 화성부둔답 양안』(1797년)  남하면 조

『장흥부소재 화성부둔답 양안』(1797년) 발급자 - 장흥도호부사 洪(龍健, 1796.01~1798.06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