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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의 즐거움367 - 김종직의 <금성곡>과 임상덕의 <금성잡곡>-가을 무 뿌리가 큰 것은 옹기보다 크고-

향토학인 2024. 10. 13. 10:30

인지의 즐거움367

 

김종직의 <금성곡>과 임상덕의 <금성잡곡>

-가을 무 뿌리가 큰 것은 옹기보다 크고-

 

김희태

 

금성곡(錦城曲)은 모두 12수인데 고려 시기의 사적과 나주의 풍물 경관 특산 등에 대해서 읊은 기속시(紀俗詩)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1487(성종 18) 전라도 관찰사 시절 순행차 나주에 왔다. 이무렵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종직의 연작 기속시는 후삼국 분열기의 왕건의 사적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염백의 누선이 변한 지방을 지나가니 환호성이 이미 금성산을 진동하였네[鹽白樓舡過卞韓 歡聲已振錦城山]”라 하였는데, 염백의 누선은 왕건 휘하 수군의 위용을 말한다. 당시에 전후 상황을 파악한 금성 고을 사람들은 왕건 부대를 환대하였는데, 그 환호성이 금성산을 뒤흔든다고 하였다.

 

이어 교활한 오랑캐 깃발이 덕진을 뒤덮었을 제 어찌 남포에 천인이 주둔한 줄을 알았으랴[猾虜旌旗蔽德津 豈知南浦駐天人]”라 하여 덕진에서 견훤군과 겨루었을 때 남포에 주둔한 천인(왕건)의 사적을 말하고 있다.

 

왕건의 나주 정벌 승리는 나주 토성 오씨와의 기연으로 이어져 용손이 당일에 군함을 여기에 대고서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네[龍孫當日艤戈船 忽夢朝雲暮雨仙]”라 하면서 왕건은 용의 자손으로 격상하고 오씨는 신녀로 신격화 했다. 하여 행인들은 그곳을 가리켜 완사천이라 하네[行人指點浣紗泉]”라 하여 완사천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비단 빨던 강가는 혜종 외가의 고향으로 흥룡사 안에 그 서광 어리었도다[濯錦江邊舅氏鄕 興龍寺裏藹祥光]”라고 하여 왕건의 처가이며 혜종의 외가인 금강진(錦江津)과 그곳에 세워진 흥룡사(興龍寺)를 돌아보며 서광을 말하였다.

 

다음으로는 고려 현종의 나주 몽진 사적을 대동강 푸른 나무가 전란으로 문드러지자 현종이 배에 올라 비단 빨던 강으로 왔으니[浿江靑木爛戈矛 顯廟來航濯錦流]”라 한다.

 

고려 말기에 나주로 유배를 왔던 정도전의 행적도 살핀다. “부질없이 동문에서 부로들 유시했다던데 잠자코 회진에 숨어 지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謾煩父老東門諭 爭似三緘隱會津]”라 하였는데, 아마도 김종직 관찰사도 동문루에 올랐던 것 같다.

 

정도전은 나주 거평부곡 소재동에서 13755월부터 13777월까지 3년여 동안 주민들과 생활하며 호남 농민의 생활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고 이 경험은 그가 추구한 민본의 바탕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종직은 약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한 것 같다.

 

김종직은 나주의 산천, 인물, 명물을 두루 예찬하였다. “삼향의 대화살은 천하에 소문났으니[三鄕竹箭聞天下]”라 하여 특산품을 삼향의 죽전(竹箭)은 천하에 유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향은 지금의 무안군 삼향면 지역인데, 당시 나주목의 월경처였다. 전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화살대[竹箭] 산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35권 나주목 고적조에 군산부곡(群山部曲)ㆍ극포부곡(極浦部曲)ㆍ임성부곡(任城部曲) : 이상 세 부곡은 지금은 합하여 삼향리(三鄕里)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토산조에 죽전(竹箭)은 삼향리(三鄕里)에서 난다.”는 기록이 있다. 1906년에 이르러서 나주 소속에서 떨어져 무안으로 편입된다.

 

이어 영산창의 백만섬 곡식, 앙암(仰巖)과 복암(伏巖) 바위와 유람객 뱃놀이, 금강과 수홍교, 수려한 월정봉(月井峯)과 학교(鶴橋)의 경관, 나주의 재래 음사 풍속 폐해를 차례대로 읊고 있다.

 

김종직의 금성곡처럼 연작 형태로 된 시는 임상덕(林象德, 1683~1719)금성잡곡(錦城雜曲)을 들 수 있다. 임상덕은 능주목사,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1705(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장원했다. 저서로는 동사회강(東史會綱)·노촌집(老村集)이 있다.금성잡곡세주에 원래 16수였는데 6수는 잃었다고 하였다.

 

금성은 이름 난 고을로 산천의 풍속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남의 풍속이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일찍이 옛 흔적의 풍요를 모아 금성12영이라 하였으니 자못 옛날의 죽지사의 체제를 본받았다. 그러나 일을 간혹 잃어 버려 내가 일찍이 한가한 날에 고금의 30여 건의 일을 잡다하게 엮었는데 16수를 읊조려 금성잡곡이라 하였다. 16수 중에 6수를 잃었다.”

 

고려 태조의 목포 전투, 흥룡동의 사적, 현종의 나주 순행, 나주 인물, 청림산의 빗돌, 토산물 순무와 토란, 학교와 잠실 등 역대 사적과 토산 풍물에 대해서 읊고 있다.

 

토산에 대한 시의 세주에 성 밖의 영산강의 들에는 모두 무밭인데, 나라 안에서 유명하다. 큰 것은 지름과 둘레가 수척인데, 나주 사람들은 이것으로 생계로 삼는다. 무는 일모작 무이다.(城外榮山之野, 皆蘿葍田, 名於國中. 大者經圍數尺, 羅人以此爲生理. , 一作蘆.)”라 하였다. 성안의 벽오동과 대가 유실수라면, 성밖의 천이랑 순무와 토란은 토산 식품이라 할 것이다.

 

성 안에 벽오동과 대는 온갖 집에 있는데 城中梧竹十千家

성 밖에는 무, 순무가 천 이랑에 꽃 피웠네 城外蘿菁千畒花

가을 무 뿌리가 큰 것은 옹기보다 크고 秋蘿根大大於甕

민강의 흙에서 캔 토란은 자랑할 것 없네 岷土蹲鴟不足誇

 

임상덕은 1707(숙종 33)에 전라도 도사, 1709(숙종 25) 8월에는 남평 현감이 되는데, 이 무렵 지은 것 같다.

 

*김희태, 선현들의 시문해제, 선현들의 시문속에서 나주를 읽다1, 나주문화원, 2021.

나주 죽림동 어느 논서밭의 무꽃(2023.07.27.)
무꽃(사진 박순천)
임상덕의 금성잡곡 중

임상덕의 금성잡곡(노촌집, 한국고전종합DB

김종직의 금성곡(점필재집, 한국고전종합DB 인용)

김종직의 ‘(금성)십이영’(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제영 신증조) -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에 편찬되, 새로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에 편찬된다. 증보한 내용은 항목에 ‘新增’이라 표기하였다. 김종직의 ‘십이영’은 ‘신증’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