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21 - 필암서원 목판, 장기간 거쳐 새긴 다양한 종류의 목판

향토학인 2021. 2. 5. 03:40

인지의 즐거움221

필암서원 목판, 장기간 거쳐 새긴 다양한 종류의 목판

-인종필 묵죽도, 김인후 유묵, 하서선생전집, 1568~1802년

 

김희태

 

<장성 필암서원 소장 목판>

 

하서 김인후(1510~1560)는 동국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로서의 역사성, 필암서원(사적 242호)의 역사성, 목판각의 연대(임진왜란 이전인 1568년부터 18세기 후반), 지방에서 장기간에 걸쳐 판각된 다양한 종류로 목판 제작 기술사에서의 중요성, 완본의 보존상태, 안진경체에 바탕한 하서 친필 유물 목판의 예술사(서예사)적 가치, 인종 묵죽도판의 역사성, 소장 유물(필암서원 문서, 보물587호)과의 비교 연구 관련한 학술성, 그리고 기 지정된 목판(보물 260호 미암일기 부 판목 포함) 등과 비교하여 볼 때 706매를 합하여 국가지정문화(보물)로 지정할만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고 사료됩니다.

 

2004년 8월 26일 작성한 보물 지정신청 의견서 맺음부분이다. 문화재청에 제출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1999년 7월에 전남 유형문화재가 되었으니 5년만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의 경우 보통 두 가지로 추진한다. 관할 시군에서 지정신청을 하면 도에서 검토, 조사하여 전남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신청하는 절차. 또 하나는 도에서 학술조사나 전문가 의견을 받아 먼저 검토하고 시군에서 신청 자료를 제출 받아 하는 방안이다.

 

장성 필암서원 목판의 경우 두 번째 방안으로 하였다. 1998년 학술조사 때 국가지정문화재급 가치를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지정신청서를 제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준비 과정에서 일부가 도난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기 때문이다. 상징성이 큰 인종 묵죽도 목판 3점.

 

“세계유산 필암서원 내 ‘하서유묵 목판’ 회수”

 

그로부터 15년여.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세계유산 필암서원 내 ‘하서유묵 목판’ 회수” 2021년 2월 2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보자마자 김인수 필암서원 도유사님께 바로 전화를 드렸다. 아직은 소식을 못 들으신 듯 했는데 무조건 반가워하신다. 정년을 한지 몇 해 지났지만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아쉬움 몇 가지. 그중에 하나였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1차, 2015년]에서 전문가 실사를 할 때 설명을 맡았었는데, 그때도 사실은 ‘조마조마’ 했다. 웬지 그걸 제대로 관리 못했느냐고 물을 것만 같기도 하여...

문화재청은 서울경찰청과 공조하여 2006년 장성 필암서원 내에서 도난당한 전남 유형문화재 제216호 ‘장성 필암서원 하서 유묵 목판 일괄(56판)’ 중 묵죽도판(墨竹圖板) 3점을 포함한 총 34점의 도난문화재를 회수하였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도난문화재 관련 첩보를 2019년 7월 입수하여, 문화재매매업자와 문화재사범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끈질긴 수사 끝에 도난문화재를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회수하는 성과를 거둔 것.

 

이 목판은 원래 필암서원 내 경장각에 보관되던 것으로 조선 중기 인종이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하사한 3점이다. 1568년(선조 1)과 1770년(영조 46)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인종)과 신(김인후)의 이상적인 관계를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묵죽도판을 통해 판각의 변천양식과 조선사회 생활방식을 파악할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특히, 필암서원이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이번에 회수한 문화재를 전시나 교육에 활용할 경우, 필암서원의 가치를 보다 높일 수 있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하서선생 유묵 목판과 문집 목판

 

김인후는 장성 황룡면 맥동 출신으로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의 박사와 부수찬, 옥과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나 10여 권의 문집을 남겼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에도 정통하였으며, 제자로는 정철, 조희문 등이 있다. 동국 18현의 1인이며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모셔졌고, 시호는 ‘문정’이다.

 

필암서원 목판은 3종류이다. 이번에 회수한 인종필 묵죽도, 하서 김인후 선생의 친필 유묵 목판, 저술인 하서선생문집 목판. 이 가운데 인족 묵죽도와 하서유물 목판은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의 명칭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호, 문집 목판은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으로 전남 유형문화재 제 215호로 지장하였다.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 목판>은 모두 56판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새긴 『초서 천자문(草書 千字文)』18판과 『해자 무이구곡(楷字 武夷九曲)』18판, 1568년(선조 1) 새긴『백련초해(百聯抄解)』13판과 『유묵』 4판,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으로 1568년(선조 1)과 1770년(영조 46)에 새긴 것이다.

 

안진경체에 바탕한 김인후의 초서체 글씨는 당시 성리학자 특히 호남 학자들 사이에 전형적인 모범 글씨가 되었다. 『백련초해』는 100가지 싯구를 한글로 해석한 것인데,『백련초해』한글판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섰고 인종의 판체인 묵죽도판은 판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은 하서 김인후 문집을 새긴 목판이다. 김인후가 죽은 뒤 8년만인 1568년(선조 1)에 처음 간행되어 1686년(숙종 12) 중간본과 1797~1802년에 걸쳐 세 번 간행된다. 초간본 목판 1매, 중간본 목판 258매, 세 번째의 목판 391매로 모두 650매이다.

 

하서문집목판은 김인후 저술로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판각연대가 올라가며 누락된 목판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도 크다.

 

국가지정문화재(보물) 목판 가운데 유가문집(儒家文集)으로 <퇴계선생문집 목판>(보물 제1895호)은 1600년(선조 33) 판각하였는데 752매(본집 709매, 외집 15매, 별집 28매)이다.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보물 260호)에 포함된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집>은 19세기 후반(원집 판각 1869년)에 판각한 것이다. <필암서원 목판>은 문집 목판과 함께 하서 유묵, 인종필 목판이 함께 있어 또 다른 특징이 있다.

 

1569년(선조 2)에 판각한 <월인석보(月印釋譜) 목판>(보물 582호)은 판각 연대가 이르기는 하지만 57매중 46매만 남아 있다.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 목판>(보물 591호, 212판)은 1673년(현종 14),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 목판>(보물 917호, 162판)은 1679년(숙종 5)에 판각한 것인데 중국의 불서와 자전 등 중국책을 들여와 새긴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한양 지도를 판각한 <수선전도(首善全圖) 목판>(1823~24년경, 보물 853호, 1점), 중국에서 들여온 세계지도를 판각한 <곤여전도(坤輿全圖) 목판>(1860년경, 보물 882호, 3점) 등이 있는데 필암서원 목판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장성 필암서원 소장 목판(706판)은 보물 지정된 다른 목판류 보다는 연대가 더 빠른 시기의 목판(1568년, 백련초해 13판, 인종필 묵죽도 1판)을 비롯하여 김인후 친필의 유묵 목판과 17세기 중반(숙종 12, 1686)에 판각된 <하서선생집>등 연대적으로 앞서며, 인종필 묵죽도는 조선시대 군신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나타내 준다는 점에서도 역사성이나 학술성,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 이제 <필암서원 목판>도 문화재 지정격을 높이는데 지혜를 모아야겠다.

 

인종필 묵죽도 목판과 묵죽도

하서 유묵 목판 - 초천자문 목판

하서선생문집 목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