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86 - 산신이시여 비를 내려 주소서, 진도 금골산 기우문, 1668년.
인지의 즐거움286
산신이시여 비를 내려 주소서, 진도 금골산 기우문, 1667년
김희태
아 산신이시여 /維嶽有神
해방에 내려와 보소서 /降監海方
가뭄이 한 달이 지속되어 /經月暵乾
농사일이 끝내 걱정입니다 /穡事卒痒
가엾은 우리 백성들은 /哀我赤子
이 참혹한 일을 만났고 /遭此慘酷
사방 들녘은 벌겋게 익어지려 하며 /四野將赤
온 밭고랑이 이미 갈라졌습니다 /千畝已圻
한 섬안의 백성은 /一島生民
재앙에 급박하고 옹색하니 /禍迫涸轍
산령께서는 그 말을 생각하시어 /厥惟山靈
백성의 의탁을 알아주소서 /庇民是識
모든 곡식은 이미 걱정되니 /百穀已痒
만백성은 무엇을 먹으리요 /萬民何食
바라건대 은택을 내려 /願降惠澤
우리 생물을 되살려 주소서 蘇我生類
구름을 뭉게뭉게 일으켜 세찬 비를 /油然沛然
곳곳마다 두루 내려 주소서 /徧于百里
처음처럼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여 /既優旣渥
곡식물을 무성하게 하도록 /茂我黍稷
영험스런 비를 내려 주소서 /靈雨其零
산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애끓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빈다. 한달 넘게 가뭄이 지속되어 사방 들녘은 벌겋게 변해 간다. 온 밭고랑이 갈라진지 오래이다. 섬 안의 온 백성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요. 부디 구름을 뭉게 뭉게 일으켜 세찬 비를 내려 주소서. 여러 곡식들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신령한 비를 내려 주소서.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우문이다(엄찬영 번역). 진도현감 이구징(李耉徵, 1609~1688)이 지은 글이다. 언제인가. 1668년(현종 9) 여름으로 보인다. 현감 부임 이듬해이다. 현감 이구징은 1667년(현종 8) 8월 13일 부임하여 이듬해 11월까지 재임(李耇徴 丁未 八月 十三日 到任 戊申 十一月日 貶去)하는 기록이 『진도군읍지』 선생안에 나온다.
이구징의 문집인 『죽헌문집(竹軒文集)』에 <금골산 여귀산 범굴산 기우문(金骨山女貴山 梵窟山祈雨文)이 실려 있다. 금골산과 여귀산, 그리고 범굴산에서 함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문집에는 또 하나의 기우문이 더 있다. <망적산 첨찰산 지력산 기우문(望敵山尖察山智力山祈雨文)>. 당시 진도 6개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첨찰산(일명 占察山)과 여귀산(女貴山)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도현 봉수조에 나온다.
『죽헌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62-885-161) 한국한중앙연구원 장서각(D3B^334)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2권 1책으로 1911(重光大淵獻, 辛亥)년 간행되었다. 서문은 정진헌(鄭鎭憲), 발문은 8세손 이주해(李主海)가 썼다. 경인문화사의 한국역대문집총서 2362집(한국역대문집DB)으로 영인본도 나왔다.
1667년 무렵 진도 지역의 가뭄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1667년(현종 8) 7월 4일조에 “이 당시 몇 달 사이에 가뭄이 거듭 가혹하게 들어, 관원을 보내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7월 22일조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가을 가뭄이 이토록 심하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건대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비록 질병 때문에 직접 기우제를 지내지는 못하나 마음은 매우 편치 못하다. 차례에 구애될 것이 없이 대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라."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저 기우문의 2행 해방(海方)은 해안 국경, 바다 밖의 다른 나라, 바닷가 등 여러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섬지방 진도를 이른 것이리라. 10행의 학철(涸轍)은 수레바퀴 자국에 고여 있는 물에 갇힌 물고기라는 의미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어려움을 뜻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학철부어(涸轍鮒魚)’의 고사가 보인다.
이구징 현감의 금골산 기우문을 확인하게 된 사연. 금골산(金骨山)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하고, 금골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 지정하자는 논의가 모아져 신청서 작성을 위한 학술조사가 시작되었다. 진도군 지원으로 마한문화연구원에서 조사팀이 조사에 나섰다. 2022년 8월 26일.
지질 지형 분야, 경관 조경 분야, 불교 조각 분야, 역사 문헌 분야 전문가들이 등정길에 올랐다.진도군청 학예사도 함께 했다. 순천의 문화동호인 두분도 동행하였다. 어찌보면 높지는 않지만 오르기는 어렵다. 날씨마저 찌는듯하다. 그래도 정상에 서니 울둘목, 그 물길과 섬, 망금산, 군내면의 간척지, 둔전리, 덕병리, 오류리, 세등리. 벽파나루 등 두루 보인다. 마애애래좌상 앞에서 여러 논의를 한다. 실측조사도 논의하였다. 조선전기 명문이 확인된 전국 10여곳의 불상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산성응회암 등 지질에 대한 설명 등등.
명승(名勝)은 경승지로서 예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정기준은 종교·교육·문화·생활 등과 관련된 경관 유적 및 저명한 전설지와 자연과 함께 역사·문화 및 문학적 상징 가치가 어우러진 곳을 지정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전에는 자연경관 중심이었지만, 역사 문화의 상징가치도 들어가 확대된 것이다.
금골산은 소금강산이라 칭할만큼 그 자연유산 측면에서는 잘 알려 있다. 그리고 『동문선』에 실린 이주(李胄)의 「금골산록(金骨山錄)」과 같은 기록유산이 전해 와 역사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금골산록」에는 마애여래좌상의 조성과 해원사 사찰 경관에 대한 내용도 있고, 문인들의 교류와 관련된 내용도 있어 문화와 예술 측면의 상징가치도 있다.
이주의 문집 『망헌집』에는 「도상굴(到上窟)」, 「동굴(東窟)」, 「증승(贈僧)」, 「야좌(夜坐, 金骨山作)」 등 금골산에서 머무를 때 지은 시가 많다. 이 「금골산록」 외에도 소재 노수신의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 시에도 금골산 내용이 보인다. 이처럼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된 금골산 시문을 통하여 당대인들의 인식을 읽어낼 필요도 있다.
이들을 포함한 기록자료는 물론 관련 사진이나 지도, 구전 자료 등도 모으고 분석하여 정리해야 한다. 이구징 현감의 기우문은 진도 주민의 생활사와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미 알려진 사진이지만 금골산 일부가 나오는 금골산 오층석탑의 1914년 사진도 중요하다. 유리건판 자료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지털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원경으로 찍힌 석탑이지만 자세히 보니 1층 탑신 면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면석까지 잘 갖추고 있다. 아마도 저 사진 무렵에 일층 면석은 주변에 널부러져 있었던 것 같다. 언제가 다시 맞추었을 것이다. 주민들사이에서 이에 대한 구전을 들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중요하다. 저 사진의 날짜도 확인된다. 1914년 6월 19일이다. 이때 사진이 강강술래, 고인돌, 제공소, 체격측정 등 16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금골산 오르는 길에서 만난 석류나무와 유자나무. 지금의 진도 특산물이지만,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신증 1530년) 진도군 토산조에 석류(石榴)와 유자(柚)가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온다. 그만큼 풍토에 맞는다는 것이다. 조선초기 관찬기록에 나오는 만큼 이들 자료들도 그 역사성을 서사(敍事)로 풀어볼 필요도 있다.
1872년 진도현지도(규장각 소장), 동여도(東輿圖, 규장각소장) 등 고지도에도 금골산이 보인다. 동여도에는 봉산(封山) 표기도 보인다. 봉산은 국가 소용의 목재 확보를 위하여 벌채를 금지하고 특별 관리하는 산이다. 봉산에는 소나무를 보호하는 봉산과 관곽에 쓰이는 황장목을 보호하는 황장봉산(黃腸封山), 신주에 쓰이는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그리고 배에 못으로 쓰이는 참나무를 보호하는 진목봉산(眞木封山) 등이 있었다. 금골산의 수종을 살피면 어떤 종류의 봉산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곡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왔는데 금골산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과 「금골산록」을 미처 가져 오지 못했으니 보내주시라는 편지를 작은형 김수흥(金壽興)에게 보내고 며칠 뒤 「후명을 듣다[聞後命]」는 절명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후명(後命)이란 유배 간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을 명하는 일이다. 금골산과 관련된 현장과 자료들에 대한 제보를 기대한다.
《금골산록(金骨山錄)》은 전에 등본(謄本)이 있었으나 미처 가져오지 못했는데, 그 기록을 보여 주신다면 파적거리로 삼을까 합니다. 그 산은 군(郡)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섬 가운데 있어서 바위산이 제법 볼만하지만 이른바 삼굴(三窟)은 극히 위험한 절벽이어서 발을 돌리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죄인의 행적이 비록 이와 같지는 못하겠지만, 쇠약한 나이에 병든 다리는 실로 올라갈 가망도 없습니다. 나머지는 계절 따라 만사 건강하시어 그리워하는 마음에 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사연은 이만 줄이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년(1689, 숙종15) 윤3월 초3일.[김수항, 「백씨께 올림. 기사년[上伯氏. 己巳]」, 『문곡집』 제28권 서독(書牘)(한국고전종합DB)
동여도(東輿圖, 규장각 소장)의 진도 금골산 부근도(三窟과 封山, 封山은 국가의 목재 확보를 위해 벌채를 금지한 산이다)
금골산 여귀산 범굴산 기우문(1668 현종 9, 진도현감 이구징, 죽헌문집)
금골산 마애여래좌상
금골산 입로의 석류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