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26 - 나주의 사적비, 신도비, 선정비를 모트다 - <나주금석문Ⅰ> 발간
인지의 즐거움226
나주의 사적비, 신도비, 선정비를 모트다 - <나주금석문Ⅰ> 발간
김희태
나주의 금석문 가운데 사적비(11기), 신도비(6기), 사찰유물(3기), 선정비(69)를 모아 탁본문과 함께 해설한 <나주금석문Ⅰ>이 발간되었다.(나주문화원, 디자인감, 351쪽)
나주문화원(원장 최기복)에서는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하여 매년 총서 형태로 내고 있는데, 2020년 사업으로 나주 소재 주요 금석문에 대한 탁본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정리하여 국역 해설하여 발간한 것이다.
이번 조사는 나주 지역 주요 금석문을 대상으로 탁본 조사, 판독과 교감, 국역과 해설 등을 하였다. 사적비와 신도비는 탁본조사를 하였고 사찰유물은 원진국사 승탑 명문을 탁본조사를 하였다. 운흥사와 불회사 입구의 석장승은 사진으로 제시하였다. 서성문안 석등 명문은 개설에서 기존 논고를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선정비는 음기나 찬문이 있는 경우에 탁본조사를 하였고 나머지는 사진과 현장답사를 통하여 정리하였다.
나주의 금석문은 백제시대의 목간부터 그 연원을 들 수 있다. 목간은 복암리 유적에서 31점이 출토되었는데 백제의 도성이 아닌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문서 목간, 꼬리표(付札목간), 봉함목간, 다면목간, 습지목간 등 다양한 형태와 성격을 지닌다.
고려시대 금석문은 서성문 안 석등의 명문을 들 수 있다. 이 석등은 본래 전라남도 나주읍 서문 안에 있던 것을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국립나주박물관으로 환안되어 2017년 5월 11일 제막 점등식이 열렸다. 서성문안 석등 명문은 고려시대의 명문과 1929년 옮겨간 연대를 새긴 명문 2종이 있다. 여러 여건상 이번 조사에서 새로 탁본은 하지 않았다. 자세한 보고서가 있어 참고가 된다.
사적비-절부리비, 충효리비, 사마교비, 유허비 등 11개소
사적비는 어떤 사실이나 인물, 건조물, 유적의 내력을 기록한 비로 기적비(紀績碑)라고도 한다. 나주 관내 사적비 11개소를 조사하였다.
절부리비는 1424년에 세웠는데 나씨 자매의 열행(烈行) 정표 비석으로 2기이다. 국가에서 표창하고 조세 등을 면제해 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절부리(節婦里)”지명도 국가에서 내려 주는데 나주지역에서는 오래된 역사행정지명의 하나라 하겠다. 시내를 떠돌다가 현재는 문화원이 있는 향토문화회관 앞마당에 옮겨져 있다. 절부리비와 비경되는 유산이 금천면에 있는 조한룡의 “효자리비(孝子里碑)”이다. 1404년에 새기고 1858년에 중각하였다. “효자리” 지명과 “여충선효(麗忠鮮孝)”를 새겼다. 전통시대의 이념인 충효열 가운에 효열의 역사성을 알 수 있다.
서원과 사우의 묘정비나 유허비는 4개소를 조사하였다. 정렬사비(旌烈祠碑)는 1626년에 건립한 비로 의병장 김천일을 위시한 충신 의병들의 공적을 기린 비이다. 일본 교토대[京都大] 도서관 소장 『금석집첩(金石集帖)』에서 1760년대 정렬사비 탁본첩을 확인하여 사진 이미지를 전재하였다.
천동서원 묘정비(泉洞書院廟庭碑)는 문신 학자 이민서, 이관명, 이건명을 배향한 천동서원 중수시에 1782년 세웠다. 광주와 나주 유림이 참여하였다. 금계사 유허비(錦溪祠遺墟碑)는 무열공 노신과 금게 노인을 기려 세운 금계사의 유허비로 거평사에 있다. 충복사 유허비(忠僕祠遺墟碑)는 임진정유란 때 향교를 수호한 공을 기려 세운 비이다.
역사인물의 유허비 가운데 무성공 문다성 유허비(文多省遺墟碑)는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공의 행적비이다. 금남 최부 유허비(錦南崔溥遺墟碑)는 조선초기 문신 학자이자 표해록을 남긴 최부의 유허비이다.
사마교비(駟馬橋碑)는 1654년에 현감이 세운 비로 고려 초기 국왕이 행차하였던 사마교와 관련된 기록이다. 비문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데 이번에 몇 글자를 새로 읽었다.
동사리비(東舍里碑)는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는 당산숲에 신목과 함께 있고 매년 이 비 앞에서도 제를 지내왔다. 내용은 당산숲의 토지를 매입한 내용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는 동학농민혁명 전쟁기에 나주 수성군과 동학농민군의 전투 내용을 기록한 비이다. 유학자가 관군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동학농민혁명 연구와 나주 향촌사회사 이해에 중요한 유산이다.
번 | 유산명 | 소재지 | 연대 | 찬서자 | 건립 | ||||
서기 | 왕력 | 연호 | 찬 | 서 | 전 | ||||
1 | 절부리비(節婦里碑) | 시청길22 향토문화관[문화원] 마당 | 1424 | 세종6 | 永樂22 | ||||
2 | 정렬사비 (旌烈祠碑) |
정렬사길 43(대호동 116) | 1626 | 인조4 | 天啓6 | 張維 | 李潚 | 金尙容 | 유림, 관찰사, 목사 외 |
3 | 사마교비 (駟馬橋碑) |
금성관길8 (과원동 109-5) | 1653 | 효종4 | 順治10 | [현감 정지호] | |||
4 | 동사리비 (東舍里碑) |
남평읍 동사리 44[당숲] | 1700 | 숙종26 | 崇禎73 | [주민] | |||
5 | 천동서원 묘정비(泉洞書院廟庭碑) | 노안면 학산리 57-1 | 1782 | 정조6 | 崇禎後三壬寅 | 洪樂命 | 徐有隣 | 李衍祥 | 나주 광주 유림 |
6 | 무성공 문다성 유허비(文多省遺墟碑) | 남평읍 오계리 산506-1 | 1852 | 철종3 | 崇禎 紀元後 四壬子 |
文秉烈 | 文祐錫 | ||
7 | 조한룡 효자리비(曺漢龍孝子里碑) | 금천면 죽촌리 산90 |
1404 1858 |
태종4 철종9 |
永樂甲申,崇禎4戊午 | ||||
8 | 금성토평비 (錦城討平碑) |
금성관길8(과원동 109-5) | 1895 | 고종32 | 乙未年 | 奇宇萬 | 宋在會 | 宋益勉 | 나주유림 |
9 | 충복사 유허비 (忠僕祠遺墟碑) |
향교길 38 (교동 32-3) |
1924 | 甲子年 | 나주향교 | ||||
10 | 금남 최부 유허비 (錦南崔溥遺墟碑) |
동강면 인동리 산42-1 | 1923 | 癸亥年 | 李胤鍾 | 吳大奎 | 崔應相 | ||
11 | 금계사 유허비 (錦溪祠遺墟碑) |
문평면 동원리14(거평사앞) | 1964 | 甲辰年 | 趙重穆 |
신도비 - 고려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묘도문자 6개소
신도비(神道碑)는 능묘의 동남쪽에 세워 주인공의 신원과 약력을 기록한 일종의 묘비이다. 일정 직급 이상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경우에 세운다고 하지만 전통시대의 법전 등에서 그 근거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 신도비는 묘표(墓表), 묘비, 묘갈(墓碣), 묘지(墓誌)등과 함께 묘도문자(墓道文字)라 한다.
나주 신도비는 6개소를 조사하였다. 세운 순서로 보면 1716년에서 1949년까지이다. 고려시대 인물로 송와 나문규(松窩 羅文奎, 1312~1379), 조선시대 인물로는 송재 나세찬(松齋 羅世纘, 1498~1551), 이소재 이중호 신도비(履素齋 李仲虎, 1516~?), 무숙공 최희량(武肅公 崔希亮, 1560~1651), 임서(林㥠, 1570~1624), 송암 나위소(松巖 羅緯素, 1582~1666)이다.
5기는 문신 학자의 신도비이고 최희량은 무관이다. 비문이 지어진 무렵에 세운(나세찬, 나위소 등) 비도 있지만 후대에 추기(최희량, 임서)와 함께 세워지기도 하였다.
나위소 신도비는 비면이 거의 떨어져 나가 판독 자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대부분이다. 다행히 1760년대의 탁본첩이 확인되어 전문을 대교할 수 있었다. 일본 교토대[京都大] 도서관 소장 『금석집첩(金石集帖)』에 실린 나위소 신도비 탁본첩의 사진 이미지를 전재하였다.
유산명 | 소재지 | 연대 | 찬서자 | 건립 | |||||
서기 | 왕력 | 연호 간지 | 찬 | 서 | 전 | ||||
1 | 송암 나위소 신도비(松巖羅羅緯素神道碑) |
안창동 산57-1 |
1716 | 숙종42 | 丙申 | 許穆 | 鄭奎祥 | 李俁 | 鄭岐壽 |
2 | 임서 신도비 (林㥠神道碑) |
다시면 가운리 159-2 |
1859 | 헌종1 | 崇禎紀元後 四己未 |
金尙憲 | 李景在 | 林永洙 | |
3 | 송재 나세찬 신도비(松齋羅世纘神道碑) |
문평면 송산리 108 |
1899 | 고종3 | 潳維大淵獻/己亥 | 宋秉璿 | 宋秉始 | 趙夔夏 | |
4 | 무숙공 최희량 신도비(武肅公崔希亮神道碑 |
다시면 가흥리 369 |
1901 | 고종5 | 光武五年 | 宋穉圭 | 宋之憲 追記 |
崔貴翰 외 3인 |
|
5 | 송와 나문규 신도비(松窩 羅文奎神道碑) |
문평면 대도리 15 탄방 |
1925 | 旃蒙赤奮若/乙丑 | 洪淳馨 | 尹用求 | 李承旭 | ||
6 | 이소재 이중호 신도비(履素齋 李仲虎 神道碑) |
남평읍 광촌리 749벽태동 |
1949 | 檀紀4282 | 鄭寅普 | 林哲周 | 李秀馨 |
사찰유물 - 고려 원진국사 승탑 명문, 1719년 석장승 명문
서성문안 석등(반남면 국립나주박물관)은 1093년, 원진국사 승탑[부도](다도면 불회사 입구)은 1317년, 불회사 석장승(다도면 불회사 입구)은 1719년, 운흥사 석장승(다도면 운흥사 입구) 조선 후기에 건립하였다. 나주 다보사에 있는 동종 등 추가로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선정비 - 나주 목사, 남평현감, 전라우영장 등 69개소
나주 관내에서 조사된 선정비는 모두 69기이다. 나주 목사, 금성현감, 남평현감, 전라우영 영장, 전라도 관찰사 등의 선정비가 나주객사 금성관내에 24기, 나주향교 2기, 남평향교 18기, 남평초교 9기, 영산동행정복지센터 8기, 송현동행정복지센터 1기, 세지면행정복지센터 2기, 다도면행정복지센터 3기, 향토문화회관 1기, 무학당터 1기가 있다.
종별로 보면 나주목사 17기(행[行]목사 4기 포함), 금성현감 1기, 나주군수 5기(행나주군수 1기 포함), 남평현감 26기(행남평현감 3기 포함), 남평군수 2기(행남평군수 1기 포함), 전라우영장 6기(행영장 1기 포함), 전라도관찰사 3기, 그리고 영의정, 대원위(大院位), 어사, 명례궁 세감(明禮宮稅監)이 각각 1기씩이다.
행직(行職)은 품계는 높으나 임직(任職)은 낮은 경우의 그 관직을 뜻한다. 이럴 경우 그 직함(職銜) 앞에 행(行)자를 붙이므로 이 용어가 있다. 그 반대인 경우는 수(守)를 붙인다.
나주 관내 선정비를 소재지별, 종류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나주 관내 선정비의 소재지별 종별 현황
종별 | 계 | 나주객사 | 나주향교 | 남평향교 | 남평초교 | 영산동 | 송현동 | 세지면 | 다도면 | 향토문화관 | 무학당터 |
계 | 69 | 24 | 2 | 18 | 9 | 8 | 1 | 2 | 3 | 1 | 1 |
나주목사 | 13 | 10 | 2 | 1 | |||||||
행나주목사 | 4 | 4 | 1 | 2 | |||||||
금성현감 | 1 | 1 | |||||||||
나주군수 | 4 | 2 | 2 | ||||||||
행나주군수 | 1 | 1 | |||||||||
남평현감 | 23 | 12 | 7 | 1 | 3 | ||||||
행남평현감 | 3 | 3 | |||||||||
남평군수 | 1 | 1 | |||||||||
행남평군수 | 1 | 1 | |||||||||
전라우영장 | 5 | 1 | 2 | 1 | 1 | ||||||
행전라우영장 | 1 | 1 | |||||||||
전라도관찰사 | 5 | 3 | 2 | ||||||||
기타 | 4 | 1 | 1 | 2 |
*기타 : 영의정, 대원위, 어사, 명례궁세감 * 무학당터 : 무학당광장[나주성당 인근]
나주금석문 조사에 참여한 사람은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편집총괄, 교열, 교정),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조사책임자), 정선종 전 남도불교문화연구회장(탁본 총괄)이 기획과 자료수집, 탁본조사, 교감과 국역 해설 작업을 담당하였다. 탁본조사 실무에서는 이재인, 양승문, 손명심(남도불교문화연구회원)이 참여 하였다. 번역은 엄찬영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이 협조해 주었다. 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권혁주)에서 행정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임경렬(전 나주문화원장, 교열 및 교정), 나홍채(전 향평향토문화연구회장), 이수진(동신대문화박물관), 성대철(전남문화재연구원), 이수경(지역유산연구원)이 도움을 주었다. 고경스님(송광사성보박물관장)은 일본 교토대 도서관 소장 『금석집첩(金石集帖)』의 정보를 알려 주어 ‘정렬사비’와 ‘나위소 신도비’를 보완할 수 있었다.
정리는 탁본조사를 한 금석문은 사진과 탁본문을 차례대로 배치하였다. 비문은 원문을 교감하여 싣고 국역문을 뒤에 배치하였다. 국역문은 새로 번역한 경우도 있고 기존의 자료에서 인용하되 내용은 증보를 거쳤다. 비문은 현지 자료를 원칙으로 교감하였으며 해당 비석의 행이 바뀐 곳에서 줄바꿈을 하였다. 비문 원문은 문맥에 맞추어 띄어쓰기를 하였다. 끝에는 탁본의 과정을 사진으로 실었다.
『나주 금석문』Ⅰ에는 모두 90개소의 금석문을 소개하였다. 탁본조사와 자료수집, 사진촬영, 판독, 교감, 국역, 해설 등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최기복 나주문화원장님과 김권영 사무국장(기획), 선성경 주무관(진행)과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풀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교토대[京都大] 도서관 소장 『금석집첩(金石集帖)』에서 정렬사비와 나위소신도비 탁본첩을 확인 하여 사진 이미지를 전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도 깁고 보태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관심과 제보를 기대한다.
이들 금석문은 나주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 귀중한 유산이다. 이 자료를 기초로 하여 좀 더 진전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제2, 제3의 금석문집이 나왔으면 한다.
** 나주 금석문 탁본조사는 2020년 5월부터 시작하였다. 그무렵 남도불교문화연구회[남불회]의 30주년 기념사업도 추진하고 있던 터라 "불철주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주 금석문 조사팀이 남불회 회장(윤여정), 연구간사(정선종, 김희태), 총무(양승문) 등 남불회 30주년 행사의 주요 구성원이었기 때문이다. 남불회는 기증탁본전(2020.05.11~08.09)과 도록 발간, 학술대회(2020.06.12), 학술지 발간(불교문화연구 13집, 2020.06.12 배부) 등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가고(家故)가 있어 급하게 서울을 오가야 헸다. 한여름철에는 손명심회원이 골절상으로 한달 이상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여러 어려움속에서도 힘과 지혜를 모태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 나주문화원, 『나주 금석문』Ⅰ, 2021
* 나주문화원(원장 최기복) 보도자료(2021.01.18) 갈무리
* 인지의 즐거움217 - 신축년 모타부러! 속인들의 포행, 송광사 나들이 - 금석집첩(金石集帖), 219책의 탁본첩[2021.01.17 / http://blog.daum.net/kht1215/719 / 김희태 향토학 블로그]
* 인지의 즐거움225 - 1760년대 제작 김천일 의병장의 정렬사비(旌烈祠碑) 탁본첩[2021.03.21. / http://blog.daum.net/kht1215/744]
금성토평비 판독, 20200512, 김희태, 정선종, 윤여정, 이재인. 사진 양승문
금성토평비 판독, 20200507, 윤여정, 정선종, 이재인, 손명심. 사진 김희태
나위소 신도비, 20200507, 탁본 윤여정, 정선종, 김희태, 이재인, 양승문, 손명심
일본 교토대[京都大]도서관 소장 <금석집첩(金石集帖)> 중 나위소 신도비 탁본첩(부분)
절부리비 탁본문 전시(나주 문화원의 날, 20201223, 나주 문예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