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23 - 1940년대 절집의 ‘사계부(寺計簿)’, 송광사 금전출납부(1943~1948)
인지의 즐거움223
1940년대 절집의 ‘사계부(寺計簿)’, 송광사 금전출납부(1943~1948)
김희태
송광사성보박물관(관장 고경스님)에서 <송광사금전출납부(松廣寺金錢出納簿)(1943~1945)>를 송광사역사자료집1로 발간하였다.(古鏡∙魏珉景, 384쪽, 별책부록[원문] 52쪽, A4 규격)
1943년 1월 6일부터 1948년 12월 31일까지의 사중 금전 출납에 대한 문서 책자를 한글로 옮겨 정서하고 인명 색인, 정리 인명 색인, 승려 약보와 색인, 공리(결재) 소임자 등을 정리하였다. 별책 부록은 원본 금전출납부 200쪽을 한면에 2쪽씩 영인하였다.
흔히 집안의 출납을 정리하는 자료를 ‘가계부(家計簿)’라 한다. 연말이 되면 달력과 함께 가계부를 만들어 홍보하기도 한다. 그런 가계부를 구하려고 기웃거린 적도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필기용 가계부는 그리 많이 찾지 않을 것이다. 기관이나 단체, 국가는 그에 맞는 수입과 지출, 세입과 세출이 있다. 그런데 사찰에서는 어떤 기록이 있을까. 궁금하던차 귀한 자료를 보네 오신 것. <송광사금전출납부(松廣寺金錢出納簿)(1943~1948)>. 일전 송광사 들렀을 때 본적도 있고 <송광사 사찰숲>(전영우교수)이라는 저서에 소개한 것도 읽었다. 그런데 그 6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하여 정서하고 색인까지 책을 낸 것이다. ‘가계부(家計簿)’에 빗대 ‘사계부(寺計簿)’란 용어를 써본다.
송광사금전출납부의 전래와 획인, 보관, 정리와 간행 등에 대해서는 조계총림 방장 현봉스님의 격려사와 송광사성보박물관장 고경스님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그대로 올린다.
방장 현봉스님의 격려사에는 예전 사찰의 경관과 생활사 현장을 보는 듯 읽을 수 있다. 1970년대 원두 소임을 맡았을 때 사감고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금전출납부를 봤었다는 것, 1980년대 사감고는 헐리고 다른 전각이 들어섰다는 것, 한때 잊고 지내다가 디지털 사업을 계기로 옛 기억을 되살려 송광사의 경관을 설명해 주고 있다.
관장 고경스님의 서문에는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진행해온 유물 전수조사와 함께 특별전을 바탕으로 얻은 성과물로 시리즈로 계획중인데 그 첫 번째이고, 1984년 행자 시절에 공양간에서 소임을 맡던 중 해당 공루에서 발견하였고, 당시 재무였던 광훈(廣薰) 스님에게 전달하였고, 이후 교무였던 지묵(知黙)스님이 보관하다가, 1995년 박물관장 소임을 맡고 얼마 안돼 박물관에 인계하여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된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2017년 신축 박물관을 개관하고 성보유물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2019년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금전출납부를 위민경과 함께 디지털화하였다.
정리 내용은 하루에 1건만 기록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1943년 12월 30일의 경우 85건을 정리하고 있다.
첫 기록은 1943년 1월 6일인데 전년도 이월금을 기록하고 이어 첫 항목은 금고수선비이고 모두 14항목이다. 항목만 나열해 보면 절집의 일상을 알 수 있다. 금고 수선, 화재 의연금, 벌교 포교당 건축 보조금, 단체 의연금, 지세, 농회비, 임야세, 혜전생 학비 보조금, 출장 여비, 가위 구입, 나한 법요비 등이다. 화재 의연금은 물론 장학금도 지불하고 있다.
금고 수선비
송광면 왕대리 화재 의연금
벌교읍 포교당 부속 노전 신 건축비 보조금
무덕회 순천지소 및 조선방공협회 의연금
본년도 송광, 주암, 문덕, 외서, 쌍암 소유 사유지(寺有地) 제1기분 지세
동(仝) 쌍암면 소재 서묘련(徐妙蓮) 논 제1기분 지세
동 송광, 주암, 쌍암, 외서 농회비
동 쌍암면 소재 서묘련 논 농회비
동 송광, 주암 사유림(寺有林) 제1기분 임야세
동 문덕면 소재 사유지 논 농회비
혜전생(惠專生) 1, 2, 3월분 학비 보조금
송촌(松村) 외 1인, 신년 축하회 참석차 송광면 출장여비
수호(水湖) 3본, 신문 가위 1개 구입대금
본년도 나한 법요비
1945년 8월 16일 해방 다음 날의 기록은 8항목으로 출장여비, 내빈용 김 구입, 고용인 임금, 찹쌀 교환 대금, 파 종자 대금 등이다.
김포교사, 순회 강화차 금성리 출장여비
사고 내빈용 김 300매 대금
동 내빈용 콩과자(太菓) 절구질 고용인 임금
동 내빈용 찹쌀(糯米) 교환 대금
동 종무소 내빈용 와구 수선 면사 대금
동 내빈용 파 종자 대금
김포교사, 순회 포교차 광주 출장여비
김서기, 기와 고용인 청림차 화순 3일간 출장여비
1948년 12월 31일 이 책의 마지막 기록은 16항목으로 수입 9항목, 지불 7항목이다. 수입은 송재 매각대금, 화목 대금, 부산물 대금, 비자 열매(10되) 대금, 여관대가 수입, 기본재산과 통상예금 이자, 향촉대금∙찬대금∙불공금, 성금기와 수입 등이다. 73년 전에 향촉대금, 기와 성금은 물론 부산물 대금이나 비자 열매 판매 대금도 금전출납부에 기록하여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불은 대웅전, 불조전, 영산전 등 불전의 봉급, 화목 인부임, 기도비 등이다. 이어 끝에는 “신장부 일항에 조월함(新帳簿 壹項에 繰越함)”이라 하여 금전출납부 1책이 끝나면 다른 장부에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1949년 이후의 금전출납 자료도 전래될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수입]
본년도 신흥리 李富祚 허적송재 4,294재(才) 매각 대금(최왈○ 외 4인)
〃 외송구 춘기분 화목 대금(〃)
〃 임야 정리 부산물 대금(〃)
〃 비자(榧子) 열매 3되 매각 대금(〃)
〃 여관 대가료 수입(김진○)
〃 기본재산 조성 4,708원에 대한 연2푼 이자 수입(〃)
〃 통상예금 이자 수입(〃)
본년도 향촉대금 및 찬대금, 불공금 수입(〃)
〃 성금 기와 수입(〃)
[지출]
〃 12월분 대웅전 불전 1인 봉급(김국○)
〃 〃 대웅전 불전 2인 양미 3말 1되 대금(〃)
〃 〃 불조전 불전 봉급(강득○)
〃 〃 불조전 불전 양미 1말 5되 5홉 대금(〃)
〃 〃 영산전 불전 봉급(김원○)
〃 추기 대웅전 화목 인부 임금 및 식미 1,335g 대금(장동○ 외 14인)
〃 대웅전 임시 기도비(김국○)
전영우교수는 <송광사금전출납부> 내용을 토대로 광복 전후(1943~1948) 송광사의 총수입액과 임산물 수입액을 정리하였다. 다음 표에서 보는 것처럼 송광사 총 수입액 가운데 임산물 수입액 비중은 평균 57.0%에 이른다.(전영우, <송광사 사찰숲>, 모과나무, 2019, 184쪽)
연도 |
총수입액 |
임산물 수입액 |
임산물 수입액 비중(%) |
1943 |
37529.45 |
28446.77 |
75.8 |
1944 |
46325.09 |
24304.82 |
52.5 |
1945 |
70408.01 |
50006.50 |
71.0 |
1946 |
551392.82 |
256676.76 |
46.6 |
1947 |
809017.02 |
314550.00 |
38.9 |
1948 |
1993317.06 |
1143816.70 |
57.4 |
평균 |
57.0 |
<송광사금전출납부>(1943~1948).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기, 정부수립 직후까지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도에서도 꼼꼼하게 정리한 기록정신. 오늘날 조계총림 송광사의 밑거름이 된 것이리라.
격려사
조계총림 방장 현봉
1970년대 지금의 주지실과 장독대가 있는 곳은 텃밭이었다. 원두 소임을 맡은 나는 그 텃밭에 여름에는 고추 오이 가지 등의 농사를 짓다가, 가을이 되면 대나무를 베어다가 휘어 묶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그 속에서 겨울 상추를 가꾸었다.
당시에 국사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경사진 길이였는데, 그 오른쪽에 허름한 창고인 사감고(寺監庫)가 있었다. 그 창고의 양지쪽 추녀 밑은 농사짓는 농기구들을 세워두는 곳이기도 했는데, 사감고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한쪽은 연탄창고로 쓰였고 소방장비도 있었으며, 한쪽에는 낡은 세간들이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금전출납부 같은 서류뭉치들도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저 버려놓은 옛날의 낡은 서류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1983년부터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를 시작한 몇 년 뒤에 그 사감고는 헐리고 그 자리에 주지실을 지었는데 지금의 차실로 쓰이는 영월루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그때 보았던 사감고의 그 남은 문서들이 가끔 생각이 났으나 행방을 몰랐는데, 다행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번에 디지털화시키면서 책자로 엮어내게 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 내용은 1943년부터 1948년까지의 살림살이가 들어있다.
그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대동아 선으로 사찰의 물자들이 수탈당하고 있던 때부터 해방공간을 거치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0월 19일에 여순 사건이 일어나 거기에 관련되었던 반군(叛軍)들과 동조하던 민간인들이 쫓기다가 11월에 조계산으로 들어와 산비(山匪)가 되어 소란을 일으키면서 12월부터 송광사가 사찰 행정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기까지의 기간이다.
예전 송광사의 절집 살림은 공과 사가 분명하고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법도에 맞게 운영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어려웠던 당시의 살림을 살아가는 모습과 그 규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번에 책자를 내면서 원본의 영인본과 한자로 된 글씨를 연구원 위민경이 컴퓨터에 꼼꼼히 입력하고, 박물관장 고경스님이 부록으로 그 금전을 사용하던 대중들의 명단과 승적 사항들도 잘 정리하여 그 금전이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 흐름도 쉽게 파악하게 하였다.
낡은 휴지더미 속에서 먼지를 털어 이를 건져낸 고경스님과 이를 보관하여 전해 준 광훈스님, 지묵스님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자는 그 당시 송광사의 회계장부로서 사료가 되어 후대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니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다. 앞으로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많은 다른 유물들도 잘 정리하여 활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佛紀 2565年 2月
曹溪叢林 方丈 玄鋒 合掌
서문
성보박물관장 고경
이번에 발간하는 『송광사 역사 자료집1』은 그동안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진행해온 유물 전수조사와 함께 특별전을 바탕으로 얻은 성과물로 향후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하여 시리즈로 책자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로 발간하는 자료집은 1943년부터 1948년까지 송광사 살림살이를 세세하게 기록한 금전출납부 입니다. 1943년부터 1948년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남북분단과 여순사건과 같은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송광사의 살림살이를 들여다 보면 당시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불교계의 상황도 단편적이지만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송광사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참화를 입어 귀중한 성보들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많은 유물이 그 불길을 피해 지금은 박물관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금전출납부 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4년 행자 시절에 공양간에서 소임을 맡던 중 해당 공루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작은 글씨로 또박또박 씨 내려간 금전출납부 가 귀중한 자료로 생각되어, 당시 재무였던 광훈(廣薰) 스님에게 전달하였고, 이후 교무였던 지묵(知黙)스님이 오랫동안 보관하다가, 1995년 박물관장 소임을 맡고 얼마 안돼 박물관에 인계하여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하였습니다. 2017년 신축 박물관을 개관하고 수장고 및 경내 곳곳에 보관된 유물들을 정리하고 전수조사를 하였는데, 때마침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마침내 금전출납부를 박물관 위민경과 함께 디지털화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전영우 교수의 송광사 사찰 숲 등에 인용하는 것을 보아 근현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임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송광사성보박물관은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등곡병렬(藤谷丙烈)’ 스님과 ‘활룡정수(活龍正洙)’ 스님이 소장한 사진을 바탕으로 특별전과 함께 송광사 역사사진전 1, 2 도록을 발간한 바 있으며, 2019년에는 3.1절 100주년과 조계총림 설립 50주년을 맞아 송광사 근현대 자료 특별전과 관련 도록을 선보였습니다.
앞으로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는 그동안 진행해온 유물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송광사 관련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있으며, 중요한 자료들은 자료집을 연차적으로 발행하여, 연구자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한국불교사와 송광사 의사를 함께 하는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佛紀 2565年 2月
松廣寺聖寶物館長 古號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