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06 - 강진 월남사지의 역사적 의의, 2017-2019 호남고고학 성과전-, 국립나주박물관, 2020.05.12~07.09

향토학인 2020. 6. 16. 08:36

인지의 즐거움206

 

강진 월남사지의 역사적 의의

2017-2019 호남고고학 성과전-, 국립나주박물관, 2020.05.12~07.09

 

김희태

 

고려 중기 국력이 모아진 월남사

 

월남사(月南寺)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강진현 불우조의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다. 고려의 스님 진각[慧心, 1178~1234]이 처음 세웠으며,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잘 알려져 창건을 고려 중기로 보아 왔다.

 

비문에 “문하시중인 진양공 최우(崔瑀, ?~1249)가 두 아들을 스님에게 보내어 참례하여 모시도록” 했고, “상주물(常住物), 자구(資具), 다향(茶香), 약품, 진수, 명과, 도구, 법복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이 제공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더하여 국왕 강종(康宗, 1212~1213 재위)이 “만수가사와 마납(磨衲, 법복), 차와 향과 보병(寶甁) 등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있다. 물론 이때는 진각국사가 송광사(수선사)에 주석할 때이지만 당대의 실질적인 집권자와 국왕까지도 상주물을 하사할 정도로 큰 스님인 진각 혜심의 비석이 월남사에 있고 규모가 웅대한 삼층석탑 함께 있어 ‘고려 진각국사 월남사 창건설’은 기정 사실이 되어 왔다.

 

그런데 근래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가고 있다. 강진군의 꾸준한 지원과 월남사의 협조, 그리고 문화재 전문기관의 학술조사가 바탕이 되고 있다. 1994년 목포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했고 2011년 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한 이래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백제시기 유물, 창건의 소급 가능성

 

우선은, 백제시기의 와당과 평기와가 확인된 점인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때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만 머무르던 월남사가 백제시기까지 훌쩍 올라간 것이 첫째 성과이다. 특히 이 시기는 백제의 혜현(慧顯, 慧現, 570~627경)스님의 수행시기와도 비슷하다.『속고승전』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현의 수행 입적처 달라산(達拏山)이 월출산으로 비정되고 월남사가 큰 구실을 했을 것으로 연결할 수 있다. ‘송계사(松溪寺)’ 명문기와 출토도 중요하다. ‘송계사’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던 진경대사 심희(855~923년)가 888~892년 머무르며 수행한 광주 송계선원으로 보인다. 월남사 사명 이전에 송계사 또는 송계선원으로 불렸음직하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도 월남사에 들렸을 것 같다. 대각국사문집에 “보월산 백운원(寶月山白雲院)”, “보월산 용암원(龍巗院)”, “보월산 사자사(師子寺)” 시가 있다. 보월산은 월출산이다. 백운원은 지금의 백운동, 용암원은 국보 마애불상이 있는 구정봉 하, 사자사는 지금의 천황사. 이들 사찰의 중심 도량이 월남사였다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대각국사는 월남사를 중심으로 월출산을 유상, 수행했을 것.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1132년)에도 월남사스님 승명이 나온다. 진각국사 창건설 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

 

월남사의 상징, 진각국사비와 삼층석탑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는 왕명으로 이규보가 앞면 비명[병서]를 짓고 김효인(金孝印)의 글씨이다. 제액은 정안(鄭晏)의 글씨이다. 뒷면 음기 서문은 왕명에 따라 최자(崔滋)가 지었고 탁연(卓然)의 글씨. 이를 새기고 비를 세우는 사람도 확인된다. 총괄은 영암군 부사, 현장 감독격인 입비차사원은 승평군 부사와 도강군 감무, 현장 실무책임자는 영암 군리가 담당한다. 강진 땅이지만 영암군의 월경처로 관리되었기에 영암군 부사가 총괄한 것.

 

진각국사가 입적[1234년]한 뒤 승탑은 송광사에 바로 세워지지만, 탑비는 1250년(고종 37)이 되어서야 월남사에 세워진다. 비몸은 절단되고 곳곳이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동문선』에 실려 있고 앞면은 탁본문도 전해진다. 음기도 많은 부분이 판독되었다. 건립에 이름을 올린 공경대부가 110명에 이른다.

 

삼층석탑은(보물 제298호)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이다. 일반적인 백제계 석탑과 달리 옥개석의 낙수면이 여러 층단으로 조립되어 있다. 석탑 조성시기는 후백제기부터 고려중기까지 여러 논의가 있다. 무엇보다도 진각국사와 관련 된 시기에 이 탑을 중심으로 월남사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14년 정밀구조안전진단 결과 해체수리가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와 2017년 4월에서 9월 사이 해체를 하였고 2018년에는 부재의 과학적조사와 기초지반조사를 하고 2019년에 다시 조립하였다. 석탑의 높이는 8.4미터, 외부 부재는 188기, 중량은 약 48.5톤에 이르는 최대급 석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초기에는 대선사(大禪師)도 배출되지만 중기로 들어서는 “옛탑은 촌락의 담장옆에 끼어있고 낡은 비석돌은 다리로 놓여 있네[古塔依村塢 殘碑作野橋]”라는 백호 임제(1549∼1587)의 시처럼 향화가 멈춘다.

 

월남사지는 백제시기부터 유물이 확인되고 신라하대 선종과도 연결된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도 들렸을법하고 진각국사 혜심 시절에는 국력이 모아질 정도로 의미있는 사찰이었다. 진각국사비와 삼층석탑은 보물이다. 그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 월남사지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는데, 9년에 걸친 여덟차례의 발굴, 여섯 번의 학술대회 결과를 반영하여 격을 높여야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 * 국립나주박물관·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한국문화유산협회, 『땅속 울림, 역사 풀림, 전시 알림 ; 2017-2019 호남고고학 성과전』-국립나주박물관 2020년 특별전-, 2020.05.12(화)~2020.07.19(일), 174~175쪽.

 

강진 월남사지 발굴 전경(2017.07.14)

강진 월남사지 출토 백제 와당(민족문화유산연구원, 2012)

월남사지 삼층석탑(해체 복원 뒤, 2020.02.14)

강진 월남사지 전경(민족문화유산연구원, 2012)

특별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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