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84 - 천년토록 지나가는 자 본받을지어다. 김억추 신도비와 현무묘
인지의 즐거움384
천년토록 지나가는 자 본받을지어다. 김억추 신도비와 현무묘
김희태
신도비와 현무묘, 전라남도 기념물 지정
강진 김억추 신도비와 현무묘(康津 金億秋 神道碑와 顯武廟)가 2024년 8월 1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 고시되었다. 지정 사유를 간추려 보자. 김억추는 강진 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김억추 신도비는 1881년 당대 대학자인 송병선이 비문을 짓고 기우만이 글씨를 써서 1882년에 세웠다. 신도비에 김억추의 충효정신을 알 수 있는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송병선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를 비롯한 비의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 신도비 형식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사례로 가치가 있다. 현무묘는 조선 후기 건립된 전형적인 사우 건축의 형식으로 세부기법에서 조선후기 별묘건축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진군의 지원과 청주김씨 종중의 협조로 지역유산연구원에서 조사를 하여 2022년 3월 17일 학술 보고회를 하였다. 2022년 8월에 지정신청서를 강진군에서 전라남도에 제출하였고, 전라남도에서는 관계전문가 조사를 10월 이후 몇차례 실시하였다. 2023년 11월에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하여 도지정문화재(기념물) 지정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어 30일간 지정예고를 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된 것이다. 강진군 향토문화재 제67호에서 승격되었다. 현무묘는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453번지, 신도비는 작천면 평기리 742번지에 있다. 동네를 달리하고 있지만 금강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김억추장군은 강진군 작천면 박산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방로(邦老)이며, 무과에 급제해 제주판관, 사복시판관, 진산·순창 등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기에 활동하며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이순신장군과 함께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신도비는 1881년 10월 당대 대학자 연재 송병선(1836~1905)이 비문을 짓고 송사 기우만(1846~1916)이 글씨를 써서 1882년 2월에 세웠다. 김억추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비문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도 당대 대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한 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임진왜란기의 절의 활동이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존숭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현무묘(顯武廟)는 고격을 갖추고 있는 조선후기 불천위 별묘 건축이다. 사우 건축의 전형적인 정면 3칸, 개방형 전퇴가 있는 맞배지붕 형식이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화려한 이익공형태의 초익공 공포나 창방, 보머리의 장식 부재에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인다. 김억추 장군을 배향한 금강사(전라남도 기념물)와 함께 충의 교육의 현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신도비, 절의정신의 전승, 송병선 찬, 기우만 서
신도비는 연재 송병선(1836~1905)이 1881년에 비문을 짓고 송사 기우만(1846~1916)이 글씨를 써서 1882년 2월에 세웠다. 김억추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비문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도 당대 대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한 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임진왜란기의 절의 활동이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존숭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신도비는 작천면 평기리 교동마을의 입구에 있다. 앞으로 금강천이 흐르고, 신도비는 북향하고 있다. 건너에 현무묘가 있다. 신도비는 보통 묘소의 남동쪽에 위치하는데, 김억추 신도비도 예전에는 묘소가 있는 금강사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현무공실기』의 별묘도(別廟圖)에는 별묘 삼문의 남동쪽에 위치한 모습이 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논 가운데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신도비는 자연석으로 기단부를 형성하여 자갈을 깔고 이 위에 신도비가 있으며, 이 좌측에는 오석의 표지석, 우측에는 현무공 김억추장군 안내판이 있다.
신도비는 비신을 받치는 형태가 단순한 방형으로 되어 있고 비문이 새겨진 비신, 그리고 비신의 덮개돌이 팔작지붕 형식으로 이루어진 옥개석으로 구성되었다.
신도비 상단의 제액은 사면을 돌아가며 “병조판서 청주 김공억추지신도비(兵曹判書淸州金公億秋之神道碑)”라 새겼다. 비문은 앞면 12행, 좌측(향우)에 4행, 뒷면에 12행이 있다. 뒷면 끝에 “숭정 오회 신사 시월 상한 통정대부 이조 참의 겸 성균관 좨주 시강원 찬선 경연관 서연관 은진 송병선 찬」 진사 행주 기우만 서(崇禎五回辛巳十月上澣 通政大夫吏曹叅議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經筵官書筵官 恩津宋秉璿撰」 進仕幸州奇宇萬書)”라 하여 숭정 기원 후 다섯 번째 신사년 즉, 1881년(고종 18) 10월에 은진인 송병선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행주인 기우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측면(향좌)에는 “광서 팔년 임오 이월 일(光緖八年壬午二月 日)”의 연기가 있어 1882년(고종 19) 2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이다. 청나라가 들어섰어도 유가에서는 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의 연호인 숭정(崇禎) 기원후 ○년, 또는 간기로서 표기하였다. 전서 제액은 신도비, 문집에는 묘갈이라 하였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하부의 방부의 정면에는 거북이 3마리가 볼록하게 새겨졌으며, 좌측 두 마리는 하부를 향하고 있고, 우측은 상부로 향하고 있는 형태이다. 머리와 등, 네발은 확인된다.
옥개석은 일반적인 지붕형태로 처마부분은 얇게 상하부가 수평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상부에서는 지붕의 마루와 같이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크게 처리하였다. 비문은 국역문(나상필 역)을 옮긴다.
병조판서 청주 김공억추지신도비(兵曹判書淸州金公億秋之神道碑)(제액)
만력(萬曆) 섬 오랑캐의 변란에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실로 나라를 재건하신 공훈이 우레처럼 찬란하여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린다. 대개 이 일은 김공 휘 억추(億秋)가 전라우수사)로서 계책을 보좌하고 도모하여 이 뛰어난 공을 수립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자는 방로(邦老),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대장 김보(金甫)의 자손으로 김인(金麟)에 이르러 조선 태종조에 직간을 잘하여 도승지로 장흥에 좌천되어 이곳에서 살아왔다. 첨정(僉正) 김영(金玲), 참의로 추증된 김우필(金友珌), 참판으로 추증된 김충정(金忠貞)은 공의 삼대 선조이다. 경주(慶州) 이희남(李煕南)은 공의 외조부이다.
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상례에 따라 초상을 치르니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 칭송하였다. 글재주가 일찍이 성취하여 경서와 역사서를 널리 섭렵하고 약관이 채 되기 전에 명성이 남쪽지방에 퍼졌다. 정축년(1577) 알성시 무과에 급제하니 선조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 명하여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 겸사복에 발탁하였다가 곧 부장(部將)으로 승진되었다.
선조가 선릉에 행차하였다가 환궁하면서 하교하기를 “내삼청(內三廳) 무신 중에 교룡기(交龍旗)를 들고 휘두를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니 병조판서 김명원(金命元)이 공을 적임자라고 하자 공은 명을 받아 교룡기를 휘둘렀다. 교룡기 장대에 모래 다섯 말을 매달고 완력을 시험한다고 청하자 선조는 공을 장하게 여겼다. 이후로 임금의 총애가 날로 두터웠다.
조정은 북쪽 변방이 걱정거리였는데, 공을 무이보(撫夷堡) 만호에 특별히 제수하고 변방의 오랑캐와 세 번 싸워 세 번을 이기니, 적이 다시는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연달아 초산(楚山, 정읍)과 순창의 수령을 지낼 때 왜란의 징조가 이미 있었다. 임진년(1592)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할 때 공을 호종관으로 부르자 공은 순창 임소에서 달려가 패수(浿水)에서 알현하였고, 평안방어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싸워 승전보를 올리자 품계가 가선에 올랐다.
얼마 있다가 안주목사가 되었고, 갑산 전투에 군사를 지원했으나 이르지 않아 패배하였다. 결국 관직이 면직되었으나 백의종군하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이 매우 많았다. 선조가 이전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고 주사대장(舟師大將)에 임명하여 대동강을 방어하게 하였다. 별장 김경서(金景瑞)와 진을 쳐서 서로 지켜주는 형세를 만들었으나 많은 적군이 이르자 수장(守將)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공은 홀로 꿈쩍도 하지 않으며 호령은 정비되고 엄숙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과 백사(白沙, 이항복) 두 공이 보고 감탄하며 “진짜 장군이구나.”라고 하였다.
갑오년(1594) 여주목사로 나아가 우포장을 겸하였다. 이후 경상수사로 총융대장에 임명되었고, 곧 장흥부사 겸 전라방어사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 왜구가 거듭 쳐들어와 호남이 혹독해지자 선조는 공과 이충무공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경들은 충성을 다하여 적을 막으라.”고 하였다. 이충무공이 회령포에 이르러 공에게 격문을 보내 거북선을 제작하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한신(韓信)이 위표(魏豹)를 사로잡기 위해 만든 목앵(木罌)의 옛 제작입니다.”라고 하며 큰 전함을 제작하였다. 마침 이충무공은 진도에서 철쇄와 철갈고리로 적선 수 백 여척을 쳐부수고 침몰시켰다. 승기를 틈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였고, 적의 시체가 바다를 뒤덮었으니, 이것이 명량대전이다. 해안가 사람들은 모두 공의 귀신같은 용맹을 칭송하였다. 이후에 이충무공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는 왼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그 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다시 일어나 종군하라는 명으로 경상병사와 충청 병사에 연달아 제수되었다. 또 제주목사로 옮겼으나 난리가 그치자 고향으로 돌아와 선영 아래 집을 짓고 삶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일찍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삼년상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불효이다. 신하로 풍신수길의 목을 베어 대궐 아래에 매달지 못하였으니 불충이다.’라고 하였다. 처사 김응정(金應鼎)을 찾아가 묻기를 “공정한 의리가 없으면 충신이 아니요, 사사로운 정이 없으면 효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공사 둘 다 온전하게 하여 충효를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김 처사가 말하기를 “효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시작이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중간이 되며, 입신양명하는 것이 끝이니, 공은 충효를 겸하였다고 말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공을 알 수 있다.
무오년(1618) 1월 22일 죽으니, 태어난 가정(嘉靖) 무신년(1548)년과의 거리가 71년이다. 인조조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부인 조씨(曺氏)와 강진군 초곡면 호동(虎洞) 사원(巳原)에 예장(禮葬)되었다. 부인 조씨는 창녕(昌寧) 명문 귀족이고, 아버지는 조명세(曺明世)이다. 아들은 충의위 김여일(金汝鎰), 첨사 김여현(金汝鉉)을 낳았고, 김여철(金汝鐵)이 있고 한종(韓宗)은 사위이다. 손자는 통덕랑 김찬종(金纘宗)이다. 증·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았고, 지금 나에게 글을 청하는 자는 공의 10대손 김동현(金東炫)과 족인 김재헌(金載憲)이다.
아! 공은 충성과 용맹의 자질로 문무의 재주를 겸하여 국가가 어지러울 때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훈을 세웠으나, 충무공 이순신 등 여러 공과 호남 바닷가의 사악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사를 서로 잊고 그 기미를 보고 그칠 곳을 알았으니, 진실로 옛 명철군자(明哲君子)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 비석에 새겨 세웠으니 영원하리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학을 탄 언덕 駕鶴之原[가학지원]
산악을 짊어졌네 負山嶽兮[부산악혜]
명성과 높이 다투니 名與爭高[명여쟁고]
길이 영원하리라 永不涅兮[영불열혜]
천년토록 有來千秋[유래천추]
지나가는 자 본받을지어다 過者式兮[과자식혜]
숭정 5회 신사 시월 상한 통정대부 이조 참의 겸 성균관 좨주 시강원 찬선 경연관 서연관 은진 송병선 찬」 진사 행주 기우만 서(崇禎五回辛巳十月上澣 通政大夫吏曹叅議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經筵官書筵官 恩津宋秉璿撰」 進仕幸州奇宇萬書)
광서 팔년 임오 이월 일(光緖八年壬午二月 日)
한편, 김억추의 묘소는 신도비 및 현무묘와 떨어져 작천면 평기리 산 132-1번지 일봉산에 있다. 묘소 앞에 있는 묘갈은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지은 글인데 문집에 「증판서김공묘갈명[병서](贈判書金公墓碣銘[幷序])」라 올라있다. 1953년에 세웠다. 묘갈의 명문을 옮긴다.(이주형·채현경 역/한국고전종합DB)
충과 효는 維孝與忠[유효여충]
사람의 본성으로 人之秉彝[인지병이]
어려서나 자라서나 幼篤壯韙[유독장위]
공은 천성대로 하였지 公惟性之[공유성지]
이 충무공의 큰 공로 중 李爺弘功[이야홍공]
명량대첩이 제일 뛰어난데 鳴梁最奇[명량최기]
화살 한 발로 왜장을 죽이고 一箭取馘[일전취괵]
공이 적기를 빼앗았도다 公實搴旗[공실건기]
하늘이 온전히 귀향시켜 天使全歸[천사전귀]
전쟁터의 시신이 되지 않았지 馬革不屍[마혁불시]
왜적이 쓰러져 죽자 封豕旣殪[봉시기에]
나라가 다시 평화로워졌네 王國再夷[왕국재이]
돌아가자 고향으로 歸歟桑梓[귀여상재]
박산의 산굽이 아래로 博山之峓[박산지이]
집안에서나 나라에서나 家而國而[가이국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네 惟心不欺[유심불기]
칠순에 편안히 돌아가시니 七耋考終[칠질고종]
그 누가 이 복록과 같으리오 孰如其祺[숙여기기]
미덥도다 빗돌이여 允矣貞石[윤의정석]
천고토록 기울지 않고 千古不欹[천고불의]
김공의 이름이 있어 金公有名[김공유명]
보는 사람 반드시 탄식하리라 觀者必唏[관자필희]
현무묘, 개방형 전퇴가 있는 전형적인 사우 건축
현무묘는 작천면 현산리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금강천이 흐르고 천변으로 낮은 구릉이 형성된 곳의 남쪽에 위치한다. 현무묘의 바로 우측이 김억추의 생가터였다고 전한다. 신도비는 금강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교동마을의 입구에 위치한다. 교동마을은 김억추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고 전한다.
현무묘는 『강진군의 문화유적』(전라남도·강진군·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251쪽)에 1801년 건립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현무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과 개방형 전퇴가 있는 맞배지붕으로 전형적인 신실의 형태이다.
자연석 두단의 낮은 기단 위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으며, 이 위에 장초석과 자연석 초석을 함께 사용하였다. 경사지라 앞면은 두벌대의 자연석 기단인데, 옆면은 한단, 뒷면은 기단 상부면과 지면이 거의 일치한다.
초석은 가장 앞 열에는 장초석을 사용하였고, 뒷면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뒷면 우주는 자연석 초석 위에 다시 장초석을 놓았다. 옆면의 하방은 장초석에 장부 홈을 내고 장부 맞춤하였다. 내부에는 김억추 장군과 정부인 조씨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현무묘는 개방형 전퇴가 있는 전형적인 사우 건축의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대들보 한본으로 전후면 평주를 연결하였으며, 내부 고주는 없이 구성한 3량가이다. 공포는 초익공 형식인데 초익공의 단부 초각을 두갈래로 나누어 화려하게 보이려 하였다. 측면의 장여와 창방 뺄목을 초익공과 동일하게 조각하여 장식성을 주었으며, 창방 부재를 춤과 너비를 모두 크게 하여 안전성을 고려한 격식있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퇴칸열과 배면에서는 장혀 하부에 역삼각형의 받침재를 사용하고, 공포부재의 주심첨차와 같이 양단부에서 소로를 끼워 장혀와 일체성을 확보하는 방법 또한 구조적 성능을 확보하려는 기법으로 보인다. 격식을 가추고 있고, 세부 기법들이 고격을 보이고 있다.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우건축의 형식을 가진 별묘 건축으로서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임진왜란 극복의 역사성, 절의정신의 전승, 격식을 갖춘 별묘건축
강진 김억추 신도비 및 현무묘의 문화유산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〇 김억추장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를 참전한 장수로써 이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성 있다.
김억추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방로, 시호는 현무이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 후 제주판관, 사복시판관 및 진산, 순창, 초산 등의 현감을 지냈다. 작천군 박산마을에서 태어났고, 현무묘의 우측 주변이 김억추의 생가터로 전하고 있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이순신과 함께 명량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호남절의록에 기록된 김억추는 부모에게 효(孝)로 정성을 다했으며, 왜란이 발생하자 충(忠)으로 임금을 호종하며,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많은 공을 세웠다. 김억추 신도비와 현무묘는 현재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〇 신도비는 절대연대를 확인할 수 있고, 찬자, 서자로 보아 임진왜란의 절의활동이 후대까지 연결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도비는 1881년에 비문을 짓고 써서 1882년에 세웠다. 신도비 내용으로 볼 때 김억추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비문의 찬서자도 당대 대학자이자 의병장 등으로 활동한 절의인물이라는 점에서 임진왜란기의 절의 활동이 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존숭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〇 현무묘는 조선후기 별묘건축으로서 격식을 갖추었고 고식 기법들이 확인되어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확인된다.
현무묘는 김억추의 불천위 별묘로 금강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독립적으로 제향을 하던 곳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사우 건축의 전형적인 정면 3칸, 개방형 전퇴가 있는 맞배지붕 형식이다. 공포나 창방 등의 부재에서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초익공을 두갈래로 나누어 화려하게 보이려고 하고, 측면의 창방과 장여 뺄목을 초익공과 동일하게 초각한 기법은 매우 희귀한 기법으로 고식에 속한다. 조선 후기 별묘건축으로서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확인된다.
* 강진우리신문 2025.01.08. / 2025.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