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국가유산

새문화재 - 신여량 상가교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397호 지정, 2017.05.08.

향토학인 2017. 3. 10. 18:07

새문화재


신여량 상가교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37호 지정. 2017.05.08.

 

신여량 상가교서(申汝樑 賞加敎書)1604년에 무신 신여량이 세운 전공을 평가하고 이에 대한 포상으로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문무관 품계)로 자급을 승진시키면서 내린 상가교서(賞加敎書)이다.


이 상가교서는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평가하여 발급한 교서라는 점에서 특별하고, 공신교서의 경우 18세기에 발급한 건까지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데 비추어 충분히 국가문화재로 지정․보존할 가치가 있다

 

*신여량(申汝樑, 1564년생) : 1583년(선조 15)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고, 권율(權慄)의 부장으로 행주전투에서 승리.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움. 그리고 경상우도 수군 우후(160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1605년~) 등을 지냄.


신여량 상가교서(申汝樑 賞加敎書)  

 - 지정별 ; 보물 제1937호

 - 지정일 ; 2017.05.08

 - 수   량 ; 1점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 (매곡동, 국립광주박물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관리자(관리단체) ; 국립광주박물관


[원문]

01 敎慶尙右道水軍虞侯汝樑力戰倭賊有此擒斬之擧賞加書

02 王若曰何相知之晩未聞眞卿之名無以酬

03 其功用嘉善之秩茂績旣著異典

04 宜加惟卿湖右雄才山西猛氣忠節有

05 足取志在殉國忘身膽勇大過人射能

06 雙帶兩鞬頃値海賊之漂到實犯我國

07 之地方槐木松脂石灰船艦旣極堅緻毒

08 丸長槍利劒兵器亦甚精强雖以遇風而

09 爲辭亦足乘機而肆毒兵少多之有異

10 縱云彼少而我多船小大之不同何能以小

11 而敵大出入凡若干戰死傷殆數十人兩

12 日相持士氣未免於少挫雙帆已掛賊

13 棹將返於晩潮微卿奮臂於前鋒夫孰

14 唾手而繼進長繩勝石頭鐵鎖寧患

15 王濬之銷融火箭過赤壁蒙衝不啻

16 黃蓋之撞破雖謀猷或由於指授而事

17 功實賴於先登擒斬止於一船雖曰不足

18 爲武變亂以後十載未見如卿之功顧玆

19 二品之陞何損一嚬之愛玆授卿嘉善大

20 夫於戱益期後效無替初心獲小醜以爲

21 多寧可自滿於一捷見大敵而亦勇終

22 必勉圖於全故玆敎示想宜知悉

23 萬(施命之寶)三十二年七月十七日

 

[역문]  

경상우도수군우후 신여량申汝樑은 왜적과 역전力戰하여 이런 금참擒斬한 일이 있으므로 상을 더해 교서를 내린다.

 

왕은 이르노라 어찌 서로 아는 것이 이리 늦었느냐. 진경眞卿이 같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그 공을 갚지 못했다. 이로써 가선嘉善의 벼슬을 내리고 훌륭한 공이 이미 들어나므로 특별한 은전을 의당 가한다. 오직 경은 호남의 웅재雄才요 산서山西의 맹기猛氣로 충절은 충분히 취할만하고 뜻은 순국하는데 있어서 몸을 돌보지 않았다. 담용膽勇이 남보다 뛰어나 활쏘기에 능하여 양 팔에 쌍건雙鞬을 차고 순식간에 밀려온 해적이 실로 우리국토를 침범한 때 바야흐로 괴목槐木, 송지松脂. 석회石灰, 선함船艦이 모두 떨어졌으나 독환毒丸과 장창長槍, 이검利劍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병기 또한 정강精强하여 비록 심한 풍랑을 만나도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저들이 기회를 틈타 독기를 부릴 때 병사의 많고 적은 차이가 있어서 저들은 적고 아군은 많다고 하나 선박의 크기가 달랐는데 어찌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있었겠느냐? 밀고 당기는 약간의 전투에서 왜적은 사상자가 거의 수십 인이나 되었다. 양일간 버티느라 사기가 조금 꺾임을 면치 못하자 쌍돛을 이미 내걸고 장차 만조를 이용해 돌아가려 하였다. 경이 팔을 걷어붙이고 선봉에 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손바닥에 침을 뱉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겠느냐?

장승長繩을 이용한 석두성石頭城의 승리에서, 강 속에 설치한 쇠사슬은 왕준王濬이 녹이는데 어찌 근심 했겠느냐?, 적벽에서 불화살을 쏘고 몽충선蒙衝船을 화공선으로 삼아 부딪치게 한 황개黃蓋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담대한 꾀는 지시에 따랐다고는 하나 공을 세운 것은 실로 먼저 올라갔기 때문이다. 금참擒斬이 한척의 배에 그쳤으니 비록 무력이라 할 수는 없지만 변란 이후로 십년간 경과 같은 공을 세운 자를 보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번에 2품으로 승진시키는 작은 사랑을 어찌 아끼겠느냐. 이에 경에게 가선대부의 직을 내린다.

아! 후일에 더욱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니 초심을 잃지 말라. 소수의 적을 잡은 것을 많다 여기고 어찌 한번 승리로 자만할 수 있겠느냐! 대적을 만나면 또한 용맹을 떨쳐 기필코 만전을 도모하는데 힘쓰도록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바라건대 의당 그리 알라.

만력 32년(1604. 선조 37) 7월 17일

 

* 국역 녹양 박경래(고문연구원장)